ⓒ 게티이미지뱅크
ⓒ 게티이미지뱅크

각하의 웃음

남영화     

각하는 처음에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 슬픔이 안겨 있는 듯한 애련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환갑 나이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깔끔하게 옷단장을 하고 시설에 입소한 그는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조급증, 판단력장애, 언어장애, 기억장애, 우울증까지 있는 알츠하이머 치매환자였다. 석 달 동안은 한 방을 맡아 케어하는 체계라 내가 그의 방 담당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그래서 일등이 아니면 안 되었고 작은 일에도 한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나보다 먼저 그를 보살폈던 동료들이 옆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봐온 나는 그를 담당하게 되면서 단단히 마음을 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 옆에서 나는 소리가 본인에게 하는 줄 알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특히 아침에 소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히려 하면 유난히 짜증을 부렸고 때로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손을 휘두르고 허공을 발로 차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훅 하고 밀려 나오는 상한 감정들을 가슴속 깊이 꾹꾹 눌러 앉혔다. 최대한 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부드러운 말과 편안한 얼굴빛으로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요양보호사는 어르신들이 침을 뱉거나, 욕을 하거나 갑자기 폭력을 하려고 접근할 때엔 방어적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나 역시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온몸에 멍이 들고, 할퀸 자국이 생겼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육두문자를 들어야 했고, 얼굴에 가래침으로 봉변을 당하는 일도 예사였다. 여러 환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는 어김없이 다툼이 일어났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며,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내려놓아야겠다고 수십 번 다짐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중년의 나이에 마음 놓고 일할 곳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함께 웃고 울다 보니 피붙이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야간인 어느 날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이리저리 똑같은 장소를 계속 왔다 갔다 하다 갑자기 난폭해졌다. 그리고 흥분하여 주먹을 쥐고 공격적 행동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치매의 한 증상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고 눈높이를 낮추어 대처해 나갔다. 한자 카드나 책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책장을 넘기다 동물 이름을 물어보면 생각은 나는 듯하는데 표현을 못해서 알려주면 “맞아 맞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스킨십을 좋아해서 이성이 아닌 어린아이라 생각하고 따뜻하게 손을 잡고 걸으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말은 하고 싶은데 뇌에서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입에서만 ‘아이구아이구’ 하는 말이 맴돌았다. 대변을 보고 싶으면 배를 만지며 아프다고 했고, 거실에서 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해주면 아픈 흉내를 내며 손을 호호 불었다. 식사를 가져다주면 어떤 것으로 어떻게 먹는 방법을 몰라 가만히 음식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김치를 수저에 올려주면 환하게 웃으며 뭐든지 잘 먹었다. 산책로에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으면 노래에 맞춰 춤도 추었고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색칠공부방이며 노래방교실에 참석하여 인지기능도 살려주고 리듬에 맞춰 흥겨운 노래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가 삶의 희망을 가지게 되고 건강이 회복되는 모습에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간다 싶었는데, 전문적인 의료시설로 가서 더 많은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그가 살그머니 내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각하, 어느 곳에 가셔도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식사 잘 하고 건강하게 지내야 돼요”라고 하니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다가
“알았네, 그동안 고마웠네, 자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굵은 빗방울이 내 가슴 깊은 곳으로 흘러 내렸다. 그를 보내고 난 후 며칠 동안은 심하게 가슴앓이를 했다. 60세라는 아직은 젊은 나이에 치매가 왔으니 그 가족들의 심정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치매라는 질병 앞에서는 가족들은 속수무책이고 이젠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름이 원자, 수자라 “각하”라고 부르며 거수경례를 하면 좋아서 항상 크게 웃곤 했다. 기저귀를 교체할 때마다 신속하게 해 줘야 좋아 했고, 세수를 하라고 하면 뽀드득뽀드득 깨끗이 닦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혼자 대화를 하며 화를 내다가도 “각하 여기서 뭐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겸연쩍게 웃어주던 그.


그때 그 시절엔 그를 돌봐주기가 많이 힘들었다. 지금에 와 생각하니 그래도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는 건, 그와 마음을 함께 나누고 부족하나마 그의 입장을 많이 배려하며 지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받은 많은 스트레스가 치매라는 질병으로 다가올 줄이야. 이런 몹쓸 치매를 그분 스스로 이겨낼 재간이 없으니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하루하루가 허망할 것이다. 치매환자의 수는 전세계적으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 치매환자의 수는 75만 명이다. 65세 이상 인구 중 10명 중 1명 비율이고, 이중 남성이 27만 5천, 여성이 47만 5천으로 여성이 훨씬 많다.

 

― 각하, 안녕히 가세요 이곳에 계시는 동안 나쁜 기억들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세요. 각하의 아픈 소리가 나의 울림으로 귀 기울이지 못한 것, 따뜻한 사랑을 담아 ‘각하’라는 말을 많이 건네지 못한 것, 항상 각하를 존중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 때로는 침묵으로 머물러주는 여유와 유연함으로 배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잔잔히 밀려오네요.
각하를 보내면서 나는 이렇게 요양일기를 썼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6년. 저녁마다 써온 요양일기가 이제는 제법 두툼해졌다. 그들에게 무례한 행동, 마음에 없는 말, 때론 마음은 캄캄한데 환하게 웃고 있는 이중적인 나의 얼굴은 없었는지 되돌아본다. 만일 내가 저들처럼 몸이 불편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손을 잡으며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가 곁에 있다면, 그 죽음은 서럽고 외로운 것이 아닌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것이다. 당장이라도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고단함과 외로움이 묻어 있는 그들과 그들 가족들에게 섬김이란 진정한 사랑과 헌신이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알려 주고 싶다.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 몸처럼 그들을 섬기고 아끼는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과 의미로 남을 것이다. 

 


▲ 수필 부문 당선자 남영화(서산 힐링노인요양병원 근무)

수필 부문 남영화 당선자 당선소감 

영혼이 허공에서 둥둥 떠 다녔다. 마음을 잡을 길 없어 밭으로 향했다.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겨울을 이겨낸 냉이와 달래를 한 움큼 캐서 바구니에 담는다. 봄 내음이 코끝으로 진하게 밀려온다. 6년 동안의 고된 시집살이에 밤마다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아무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도서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쉬는 날이면 도시락을 싸들고 하루 종일 책과 사귀며 놀았다. 행복했다. 3년 동안의 해미 문창반 시절은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열정의 시간이었다.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며 글을 쓰도록 도와준 선생님과 문우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고난과 인내는 축복의 주머니였다. 멈추지 않고 달려온 오십 대 후반에 하나의 큰 과업을 이루어낸 것 같아 내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 존경해’ 라며 박수 쳐주는 아들 딸이 있어 이 저녁 더 행복하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