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억압된 현실을 날카롭게 찍어 누르다…뮤지컬 ‘리지(LIZZIE)’
[최윤영의 더 리뷰(The Re:view)] 억압된 현실을 날카롭게 찍어 누르다…뮤지컬 ‘리지(LIZZIE)’
  • 최윤영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5.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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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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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끼 한 자루와 불타버린 드레스 외엔.”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날, 의문의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살해된 사람은 보든 부부로, 범행에 쓰인 도구는 도끼였으며 범행 현장은 너무나 참혹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든 부부의 둘째 딸, 리지가 지목된다. 이토록 끔찍한 살인 사건의 범인이 두 사람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보든가에서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뮤지컬 ‘리지’가 1892년 8월 4일, 어느 미친 여름날의 기억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스티븐 체슬릭 드마이어와 팀 매너, 알랜 스티븐스 휴잇의 뮤지컬 ‘리지’는 1990년, 단 4개의 곡으로 실험적인 첫 무대를 선보이며 소재만큼이나 파격적인 시도를 한 뒤 20여 년의 개발 기간을 가졌다. 2009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초연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후 김태형 연출과 양주인 음악감독의 손을 거치며 익숙한 정서를 덧입고, 올해 4월 드디어 한국 관객들과 첫인사를 나누게 됐다.

뮤지컬 ‘리지’의 모티브가 된 ‘리지 보든 사건’은 메사추세츠주 폴 리버에서 일어났던 실화다. 친아버지와 의붓어머니가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이 사건은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당시 미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다. 용의자로 지목된 리지의 발언과 태도 모두 모순되는 점이 많았지만, 살해 동기와 공범 존재 여부, 구체적인 정황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채 미제로 종결됐다. 법정을 나온 리지가 취재진을 향해 “나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성이다”라고 말한 일화도 더불어 종종 언급된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마무리를 남긴 사건인 만큼 갖가지 추측과 소문 또한 끊임없이 뒤따랐다. 유산 상속과 재산 분할에 대한 갈등을 살해 원인으로 보기도 하고, 뮤지컬과 동일하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성적 학대가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사회에서 동성애가 발각된 것이 리지를 압박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같은 이유로 ‘리지 보든 사건’은 뮤지컬 뿐만 아니라 영화와 연극,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재로 다뤄지면서 21세기 미국 대중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다. 그만큼 인기도 대단했다. 심지어 문제의 사건이 벌어졌던 리지 보든 하우스는 현재까지 관광명소로 보존되고 있을 정도다. 

높은 벽에 걸린 보든 부부의 초상화는 악마 같은 미소를 띤 채 내내 그날의 이야기를 관망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자산가지만 씀씀이에 유난히 인색했던 아버지와 재산을 노리고 보든가에 들어온 계모란 존재는 자매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심지어 아버지는 밤이면 리지를 찾아와 괴롭히고, 리지가 아끼던 비둘기들에게까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괴로운 리지의 곁에 이웃 친구 엘리스가 찾아오고, 둘은 서로 깊이 의지하게 된다. 모든 것을 지우고 감옥 같던 집을 떠나고 싶었던 자매는 결국 각자의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는데, 엠마보다 리지의 행동이 빨랐다. 모두 집을 비운 사이, 보든 부부는 도끼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듬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리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펼쳐지는데 결국 법정은 리지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뮤지컬 ‘리지’는 이처럼 파격적인 소재에 강렬한 넘버와 개성 있는 연출이 더해져 매력있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화려한 불빛 아래 공간을 가득 채운 에너지와 지루할 틈 없는 전개, 록과 발라드를 넘나드는 28개의 넘버들이 순식간에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당긴다. 뮤지컬 ‘스위니토드’와 견주어본다면 그보다는 규모가 작고, 상대적으로 관람하기에도 편안하다. 물론 주된 스토리가 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나 소품 등의 활용, 번역된 가사가 다소 거칠고 강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록 뮤지컬이라는 장르 역시 취향을 탈 수 있는 부분이긴 하나 진입장벽이 아주 높은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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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보기 드물게 여성 배우들만으로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이목을 집중시킨다. 리지 보든과 그의 언니 엠마 보든, 가정부 브리짓 설리번, 리지의 친구이자 이웃인 앨리스 러셀까지 네 배역 모두 더블 캐스팅되었다. 회차마다 색다른 네 개의 보석이 모여 무대를 빛내는데, 어떤 조합으로 작품을 보느냐에 따라 느낌도 상당히 달라진다. 발음하기 어려운 번역 투 가사와 속도감 있는 넘버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놀라운 소화력으로 각자 맡은 배역을 더 눈부시게 만들었다. 뮤지컬 ‘리지’에 더이상 연약한 여성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턱 밑까지 죄어오던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파격적인 로커 스타일로 변신해 이내 시원한 고음을 내지르는 모습을 보다 보면 마치 콘서트에 온 것처럼 짜릿한 기분이 든다.

다만 마이크의 잦은 이동으로 초반 집중이 다소 분산되고, 음향과의 균형이 적절치 못했던 점은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정작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치 못했으며, 극 후반부 법정에 선 앨리스의 심경 변화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느낌 역시 지우기 어려웠다. 하지만 뮤지컬 ‘리지’가 보여준 새로운 시도, 배우들의 돋보이는 열연,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존과 우애, 연대의 모습만큼은 충분히 뜨거운 박수와 응원을 받을만하다. 

▲ 최윤영(평론가/아나운서)

본 공연만큼이나 화려했던 커튼콜이 끝난 후 텅 비어버린 무대엔 내리꽂힌 도끼 한 자루만 남았다. 새장 속에 갇힌 채 자유를 갈구하던 하얀 새처럼 비상을 준비하던 리지의 마지막 모습은 불안한 희망을 그린다. 원치 않게 스며든 얼룩은 반드시 벗겨내야만 할 상처였다. 물리적으로 피해를 입증할 방법조차 없던 시기, 끔찍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누군가의 죽음뿐이었다. 결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절망적이다. 리지의 드레스가 핏빛으로 물들 때 모두를 감싸던 탄식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침전한다. 새 삶을 얻기 위한 대가는 그가 겪어온 악몽만큼이나 끔찍했지만,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이에겐 그조차 간절했을지 모른다. 남은 삶을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가녀린 손으로 들었어야만 했던 도끼는 억압된 현실을 깨부술 유일한 도구였다.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고 있는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어두운 무대 위로 자꾸만 시선이 꽂히던 건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리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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