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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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1376년 나옹 혜근의 입적 후 무학 자초는 나옹 혜근과 벽암 지공을 추모하는 불사에 참여한 것 외에는 명산과 대찰을 유력했다. 이러던 중 무학 자초는 설봉산 석왕사(釋王寺:북한 강원도 안변군 설봉산에 있는 고려후기에 창건된 사찰)의 토굴에서 은둔 수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성계를 만나 새 왕조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무학 자초는 토굴에 숨어서 이름을 감추고 솔잎만 먹으며, 칡 베옷을 입고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이성계를 만나기 9년 전이라고 하는데, 그 유명한 이성계가 서까래를 지고 닭이 우는 꿈을 해몽한 것이 1384년이니, 9년 전이면 1375년이다.

그런데 이때 무학 자초는 송광사와 회암사에 머물 때였으므로, 1376년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석왕사는 조선왕조 내내 이성계가 조선 건국을 꿈꾼 중요한 사찰인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전교하기를,

“석왕사(釋王寺)는 왕업이 일어난 곳이므로 다른 곳에 비해 소중하기가 각별하다. 일찍이 들으니, 국초(國初:나라를 처음 세운 시기)에는 나라에서 준 토지와 그에 딸린 백성이 있어 그 수가 모두 500명이 넘었으므로 절의 재력이 넉넉했으나 철권(鐵券:공신에게 나눠 주던 훈공을 적은 서책)의 빛이 바랜 뒤로는 토지 1결, 노비 1구(口)도 주지 않아 절 형편이 옛날 같지 못한다고 한다. 이제 만약 토지 몇 결 정도, 노비 몇 구 정도를 떼주면 적절하겠는지 경은 지방 수령과 자세히 의논해 하나로 결정지어 아뢰라” 했다.

위의 기록은 정조 대에 정조가 석왕사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석왕사에 어떤 지원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무학 자초가 솔잎만 먹는 모습은 곽재우에게서도 확인되는 모습으로, 보통 음식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면서 수행을 하는 모습에 솔잎을 먹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혹시 무학 자초도 그의 수행에서 도교 방식의 벽곡을 한 것은 아닐까?

1384년 이전에 무학 자초는 청계사 주지를 역임했다. 청계사는 원래 천태종 계통의 세족 출신인 조인규(趙仁規) 가문의 원당(願堂:죽은사람의 명복을 빌었던 법당)이었다. 이것은 자초가 신조(神照:승려로서는 유일하게 공신호를 받은 인물), 조구(祖丘: 고려전기 제1대 태조의 국사로 책봉된 승려) 등 천태종 계통의 승려들과도 제휴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무학 자초가 당시 조인규를 비롯한 고려의 기득권 세력과도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학 자초는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태조)으로 즉위한 지 3개월 후에 태조의 부름을 받고 왕사(王師)로 책봉됐다. 이후 태종 대에 입적하기 전까지 13년간 왕사 직을 수행했다.

태조 재위 기간 동안, 무학 자초는 1392년에 왕사로 책봉되고, 오교양종(五敎兩宗:1260년~1418년까지 불교 종파의 총칭)의 승려가 모인 자리에서 설법을 했다. 이후 태조 재위 기간 동안 무학 자초는 회암사에 머물면서, 회암사를 지공-혜근-무학이라는 삼화상(三和尙, 수행을 많이 한 세 명의 승려)의 도량(道場:승려나 도사 등이 수행하는 장소)으로 완성했다.

회암사는 지공, 혜근이 오랫동안 머물렀고, 무학 자초 역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을 삼화상의 도량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무학 자초가 조선 왕조를 연 것에 기여한 것을 바탕으로, 그동안 노력했던 지공과 혜근의 추모 사업을 완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고려 불교계에서 배척됐던 무학 자초의 스승인 지공과 혜근의 위상을 높였으며, 이것은 무학 자초가 조선 초 불교의 최고 실권자가 됐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울러 개성에 있으면서 연복사 5층 석탑 낙성식 불사도 주관했는데, 이 사건은 신진사대부의 억불정책의 단초가 됐던 행사다.

무학 자초가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도읍을 정하는 일이었다. 개성에 머물면서 천도(遷都: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법식)를 위한 자문을 받고, 태조에게 이것을 건의했다.

앞에서 언급한 계룡산 지세 확인 역시 새로운 도읍을 정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고, 무악(毋岳:서대문구에 있는 산)이 후보지로 물망에 오르자, 그곳 역시 지세를 살피기 위해 순행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특히, 세 곳 모두 태조가 직접 거둥하고, 무악 자초가 동행했다. 태조가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 무학 자초를 매우 총애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무학 자초는 도읍을 정할 때 왕실의 능침을 지점했다. 훗날 정종의 묘터도 무학 자초가 잡았다. 태조가 1394년 무학 자초를 데리고 몸소 능침을 구하러 다니다가, 산 하나를 얻고 “대대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무학 자초가 고려말 조선초 불교계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태조 이성계의 총애도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학 자초는 5일간 계룡산의 지세를 살폈고, 이후 태조의 초빙으로 개성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연복사 문수법회를 주관했고, 궐에서 태조에게 접대를 받았다.

또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무학 자초는 태조 재위 기간 대부분을 회암사에서 머물렀다. 이때도 태조는 회암사에 사신을 보내 문안을 보내거나, 어의를 보내서 무학 자초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

또한 1398년 7월 태조의 명으로 무학 자초의 부도를 회암사 북쪽에 조성했다.

무학 자초와 태조와의 깊은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태조가 태상왕으로 궁궐 복귀를 거부할 때 무학 자초가 태조를 환궁시킨 것이다.

태조는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개성을 떠나 함흥, 소요산, 회암사 등에 머물렀는데, 1402년 6월-11월까지 회암사에 머물면서 무학 자초에게 위의해 신실하게 신행을 수행했다.

11월에 이성계는 태상왕 신분으로 다시 함흥으로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렀는데, 이 때 무학 자초가 이성계를 궁궐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무학 자초는 1405년에 입적하기 전까지 회암사, 금강산, 용문사 등에서 주지로 머물렀다.

무학 자초는 도읍을 선정하거나 왕실의 능침을 지정하는 등 조선 왕조의 기반 조성에 참여해서, 왕조 창업에 이은 국가 과업 성립에 기여했다.

또한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왕사로서 불교계를 이끌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무학 자초와 태조 이성계 사이의 남다른 관계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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