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사법부가 외면해 온 ‘가장 보통의 준강간사건’ 대법원은 정의와 상식으로 응답하라! 기자회견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여성단체가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을 비판하며 대법원에 합당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위기센터,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한국여성의전화 등 163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준강간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7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준강간 사건에 대한 엄벌을 촉구했다.
공대위에 따르면 피해자는 지난 2017년 5월 5일 새벽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의 한 클럽에서 만난 남성 A와 합석해 이들이 건넨 술을 마신 뒤 의식을 잃고 서울 외곽지역의 모텔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피해자는 심신상실, 항거불능 상태에서 준강간 피해를 당한 후 당일 낮에 깨어났다. A는 피해자가 깨어난 뒤 저항했음에도 피해자를 강간했다고 공대위는 주장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남성아 활동가는 “우리나라 형법상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폭행 또는 협박을 전제로 하는데, 검찰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제압한 유형력은 있었으나 그것이 폭행·협박에는 이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해 입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강간죄에 대해서는 불기소처분 됐다”며 “재판에서 가해자는 검찰의 불기소를 피해자와의 합의로 성관계가 이뤄졌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공대위가 사건 현장의 CC(폐쇄회로)TV를 확인한 결과 피해자는 혼자 서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A와 일행 3명에게 짐짝처럼 끌려 모텔에 들어갔다. 모텔 직원은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방을 내줬다.
검찰은 당초 이 사건을 불기소하려 했으나 피해자 측의 재정신청 끝에 준강간미수 혐의에 대해서만 기소가 이뤄지게 됐다.
그러나 A는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CCTV상으로 당시 피해자가 만취상태임이 명백하게 확인됐음에도 A가 피해자의 만취상태를 이용해 강간했다는 고의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공대위에 따르면 이 사건 1심을 맡은 인천지법 형사13부는 피해자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재판을 결정했다. 또 검찰에 죄를 묻지 않고 구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백지구형’을 해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대위는 “검찰은 ‘클럽에서의 사건은 국민참여재판에서 이길 수 없다’며 가해자의 범죄를 증명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면서 “피해자는 편견과 통념에 갇힌 검사, 재판부, 배심원들로 진행되는 재판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었고, 1심 재판은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배심원들의 5대2 무죄평결을 그대로 반영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호소했다.
2심 역시 피해자의 주장을 배척하고 가해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객관적으로 만취에 의한 심신상실이 인정된다”면서도 “가해자에게 고의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공대위는 “증거조사와 피고인 신문을 통해 가해자의 진술이 모순되고 경험칙상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볼 수 없음이 드러났음에도 재판부는 ‘모텔에 가기 전 이미 성관계에 동의했었다’는 가해자의 진술을 받아들였다”며 “만취한 여성을 상대로 네 명의 여성이 조력하고, 모텔직원의 방관까지 더해져 범죄가 일어났지만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2020년 우리 사법부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공대위는 “검찰에서 불기소된 사건을 재정신청까지 한 끝에 기소된 A가 처벌받기만을 바라던 피해자의 3년의 기다림은 처참히 무너졌다”고 호소했다.
이어 “가해자와 그 일행, 모텔직원까지 CCTV에 등장하는 다섯명의 남성들 모두는 늘상 있는 일처럼, 당연한 것처럼 만취한 여성을 모텔방으로 데려가기 위해 서로 조력하며 가해자를 도왔다”며 “피해자의 몸이 어떻게 성적대상화 되고 있는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한 상태였다는 가해자의 거짓에 의해 변질됐고, 가해자의 범죄를 조력했던 남성들은 ‘동의했다기에 데려다준 것 뿐”이라며 사건에서 유유히 빠져나갔다“며 ”검찰은 가해자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허울뿐인 훈계를 한 뒤 불기소처분했다“고 비판했다.
공대위는 “‘취한 여성의 몸은 그래도 된다’는 가해자 논리, 그에 부합해 가해자 논리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사법부의 판단에 공분하지 않을 수 없고, 참담할 뿐”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법원이 사법부가 철저히 외면해 온 수많은 준강간 사건 피해 여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응답하길 바란다”며 “피해자가 2020년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도록 본 사건을 유죄취지로 파기환송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공대위는 피해자의 입장문을 대독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입장문을 통해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신고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법이 가해자를 심판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제 손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법은 가해자의 말만을 듣고 그의 손을 들어줬다”고 호소했다.
이어 “더 이상 인면수심의 가해자와 가해자를 도와 성폭력을 방관하는 사람들이 선량한 시민의 얼굴을 한 채 사회를 활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많은 지지와 연대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공대위는 향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지난해 준강간 사례를 조사하고 이 사건의 유죄취지 파기환송을 위한 연서명 탄원서와 함께 전문가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