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컴퍼니 

“내지 않을 거야, 집세를. 올해도, 작년 것도, 내년에도!”

재개발을 앞두고 한참 밀린 집세를 내지 못해 고민하는 청년들치고는 꽤 당돌하다. 넘치는 에너지로 등장부터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들은 록 스피릿이 가득한 라이브 밴드 연주를 배경 삼아 무대 위를 마음껏 휘젓고 다닌다. 이것 참, 은근히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후련하다. 그리고는 곧 깨닫는다. “그래, ‘렌트(RENT)’가 돌아왔구나”
 
뮤지컬 ‘렌트’가 오랜만에 반가운 인사를 전했다. 2011년 마지막 공연 이후 무려 9년 만에 돌아온 무대다. 지난 6월 13일 서울 디큐브 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이번 8번째 시즌 공연은 ‘렌트’ 한국 초연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 더욱 감회가 새롭다.  

작품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지아코모 푸치니의 3대 오페라 중 하나인 1896년 작 ‘라 보엠(La Bohème)’에 현대적 감각을 덧입혀 탄생했다. 1830년대 크리스마스 이브 파리 뒷골목은 199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로, 빛나는 청춘들을 아프게 했던 병명은 폐결핵에서 에이즈(후천적 면역 결핍증)로 바뀌었다. 가난한 시인은 고뇌하는 록 뮤지션이 되었고 다른 인물들의 삶 역시 자연스레 다른 그림을 그리지만, 주어진 인생을 자유로이 즐기는 청년 예술가들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했다는 점만큼은 변함없이 동일하다.
 
1996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렌트’는 원작자 조나단 라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뮤지컬로도 유명하다. 그는 동성애, 에이즈, 마약 등 좀처럼 쉽게 다루기 어려운 파격적인 소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고통 속에서도 주어진 삶을 즐기고 생의 의지를 놓지 않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자 노력했다. 록, 탱고, R&B, 발라드, 가스펠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모아 만든 오페레타 형식의 흐름도 새로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나단 라슨은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기 하루 전날, 36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처럼 극적인 스토리는 ‘렌트’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데 일조했다. 당시 미 언론과 관객 모두 이 ‘렌트’에 주목했다. 작품은 이후 토니상·퓰리처상·연극 협회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미국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상징으로도 자리 잡게 됐다. 

사실 작품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 단번에 호흡을 따라가기 쉬운 작품은 아니다. 무대 변화 없이 같은 공간에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다 서브플롯이 많아 다소 복잡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게다가 작품의 소재 역시 아무래도 국내 정서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확실히 취향을 탈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뮤지컬 ‘렌트’에 담긴 은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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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처럼 만난 8명의 청년들은 내지 못할 집세를 고민하면서도 늘 행복을 꿈꾼다. 그리고 믿음 없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저마다의 빛을 잃지 않고 힘겨운 오늘을 살아간다. 누군가 잠시라도 그 빛을 잃으면 다른 이가 그의 촛불이 되어 따스하게 다독인다. 가난한 청년 예술가들에게 음악과 춤, 카메라와 마이크는 삶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이겨내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던 이들이 ‘La Vie Boheme’을 외치며 그토록 자유로울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인생 역시 빌린 것일 뿐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데 있었다. 갚아야만 할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오직 사랑만큼은 갚지 않아도 되었기에 서로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전한다. 오해와 갈등으로 인해 잠시 멀어졌다가도 결국 그 사랑을 매개로 다시 모이게 된 청춘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 최윤영(평론가·공연 칼럼니스트, 아나운서)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요즘, 미지의 시간을 달리는 우리에게 뮤지컬 ‘렌트’에 담긴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준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평범하다고 말하기엔 좀처럼 어려운 캐릭터와 낯설고 이질적이었던 소재들은 어느새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현실이 되었다. 사회 분위기는 서서히 변했고, 대중의 인식 또한 바뀌어 왔다. 그동안 뮤지컬 ‘렌트’만이 지닌 특별한 에너지, 희생과 연대, 사랑의 정신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화려한 도시에서 물질만능주의 뒤편에 가려져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비로소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사랑으로 두려움을 떨쳐낼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오늘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No day, But Today!”를 외치던 젊은 보헤미안들의 열정 가득한 모습은 답답한 현실에 대한 극복 의지를 담은 은유다. 그러니 우리도, 다시 한번 일어서야하지 않을까. 하루하루 모인 오늘은 곧 희망찬 내일을 그릴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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