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병원에 가면 늘 보는 장면이 있다. 환자와 가족들은 의사를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의사’나 ‘의사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꼭 뒤에 선생님을 붙인다.

선생(先生)이란 낱말을 한자 그대로 풀면 먼저 태어난 사람이다. 여기엔 자연스럽게 두 가지 의미가 담긴다. 하나는 뭔가를 알려주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먼저 태어나 익힌 게 많은 사람은 뒤에 태어난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을 전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지시하고 따르도록 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적대적인 자연환경에 맞서기 위해 집단을 조직하고 이를 운용할 체제를 만들어냈다. 먼저 태어나 체제를 체화한 사람은 다음 세대에게 이를 전수해 집단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에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체제질서에 입각해 단정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진다. 이 어른의 권위를 마주한 사람은 따르는 위치에 자동으로 서게 된다.

사회는 먼저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렇듯 경외를 심어준다. 그러니 남을 높일 때 ‘선생’을 쓰는 건 상대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세를 예우의 차원으로 옮긴 것이다. 더해서 세상에 나온 순서 이상으로 배우고 익힌 사람에겐 더욱 권위를 실어준다. 실제로 사회에서 ‘~~선생님’이라 불리는 이들에겐 어떠한 가치판단이 맞다 틀리다 말할 때 힘이 실리는 특권이 주어진다. 

때문에 많이 배울수록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마저 높아지는 우리사회에서, 덜 배우고 돈도 적게 벌고 지위가 낮은 이들은 ‘선생님’들에 비해 불평등을 겪는 일이 더러 있다. 

하나의 낱말이 쓰이는 모습에서 사회에 내면화된 질서가 보일 때가 많다. 선생님이 접미사로 쓰일 땐 그저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의 조아리는 기분이 배어 있다. 물론 요즘은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높아지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예전같은 극단적인 불평등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한번 자리 잡힌 사회적 맥락은 오래가기 마련이다.

한때는 이게 마음에 안 들었다. 의사나 나나 자기 일 하는 사람이긴 마찬가지인데 왜 내가 내 돈 내고 진료받으면서 굽신거리는 느낌의 낱말을 써야 하나. 그래서 어떤 호칭이 서로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지 생각해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 내 입에서 ‘의사선생님, 저희 어머니 잘 좀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뇌가 생각하기도 전에 목에서 나온 말이다. 고개도 깊이 조아렸다. 

아… 신체가, 안위가, 목숨이 타인의 손에 내맡겨지면 이렇게 절로 허리가 숙여지는구나. 신이 땅 위에 내려오지 않는 이상 환자에겐 의술을 가진 이가 절대적 존재가 된다. 환자 측의 절박함은 의사를 선생이든 산신령이든 가장 크고 높은 곳으로 영전시키도록 만든다. 비굴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비굴한 마음이 든다 한들 그깟 게 무슨 대수이랴 싶다. 그래서 다들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하는 것이다.

절박함의 파생어를 입에 달고 매달려야 하는 환자 입장에선 의사들의 짧은 진료시간과 무표정한 얼굴이 종종 오만함이나 매정함으로 비쳐진다. 게다가 의사들 중엔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신망을 이용해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도 있다. 매체들은 인식과 실제가 뒤섞인 이러한 인상을 의사집단 전체의 대체적인 성향인양 소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짐작하듯이 짧은 진료시간과 미흡한 감정교류는 구조적 문제의 결과다. 지나친 고양감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의사는 다른 모든 직종과 마찬가지로 일부의 이야기다. 의사 한 명 한 명은 삶의 애매한 교차로에서 서성이는 우리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의사든 환자든 거개의 사람들이 거기서 거기라면, 이 불편한 감각은 인식의 문제다. 의사를 의사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불평등한 기분이 드는 건,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관계하는 모든 낯선 이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진료실의 의사도 선생님이라 부르고 길거리의 걸인도 선생님이라 부르면 이 호칭이 부당한 감정을 일으킬 상황이 없어진다. 의사도 걸인도 예의를 갖춰 존중해야 하는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근래 문제가 되고 있는 ‘의사 선생님’들의 집단적인 의견표출을 존중하고 응원한다. 코로나19 방역상황만 아니라면 적절한 선에서의 파업도 지지했을 것이다. 일각에선 밥그릇 싸움하냐며 의사집단을 힐난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의 투쟁이 더욱 심각한 밥그릇 싸움이길 바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저마다 자신의 밥그릇을 들고 부딪혀야 협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실질적인 균형이 잡히기 때문이다. 

의료계의 주장에는 귀담아들을 부분이 있으며, 파업을 지지하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의사들의 고뇌도 존재한다. 또한 투쟁의 장에서 온건한 이들과 급진적인 이들이 함께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의사선생님이라 불리는 건 대체로 절박함 때문이지 의업의 대한 존경 때문은 아니라서, 어찌 보면 상시적으로 자기 직업의 소명의식이 외면당하는 것은 의사들이다. 복잡하게 얽힌 모든 층위를 단순히 이기적이라는 한 바구니에 담는 건 옳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 의료 파업이 일어난 첫번째 원인은 정부에 있다. 공공의대 확충과 정원확대라는 정책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보건복지부의 행위는 다분히 전략적인 접근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고개가 갸웃해진다. 

세간에선 의사들이 시민의 건강을 볼모 삼아 파업한다며 비난하지만, 내 눈엔 보건복지부가 먼저 의료공백 우려 앞에 오도가도 못하는 의사들의 처지를 인질 삼은 것처럼 보인다. 엄중한 시기에 이해당사자와의 충분한 사전 정지작업 없이 급작스럽게 사안을 전개시킨 보건복지부와 박능후 장관은 언젠간 이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의 2차 유행이 걱정되는 시기에 파업과 같은 공세로만 치닫는 의료계에게 마냥 긍정적인 시선을 줄 순 없다. 지금 전공의/전임의 파업을 보면 우리 모두 아는 솔로몬 왕의 일화가 떠오른다.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신이 엄마라고 호소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다. 누가 진짜 엄마인가를 두고 다투는 와중에 솔로몬 왕이 그렇다면 사이 좋게 아기를 반으로 나눠 가지라 한다. 그러자 한 여인은 그게 좋겠다고 하고 다른 여인은 아기를 죽이느니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라고 한다. 당연히 아기를 빼앗기더라도 생명을 지키려는 모정을 보여준 이가 진짜 엄마다.

지금 벌어지는 의사들의 파업은 마치 아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사람의 그것과 같다. 엄마에겐 아이가 그러하듯이, 의사에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은 생명을 살린다는 직업적 본질일 것이다. 정부가 무한대로 잘못했고 자신들이 무한대로 억울하더라도 자기 직업의 본질이 찢어져 사그라드는 걸 막고자 한다면, 어떠한 하대를 당하거나 비굴한 마음이 들더라도 차라리 감내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맞다. 

이를 숭고함이나 희생으로 포장할 필요도 없다. 엄마가 아이를 살리는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려 자기가 죽을 것 같은 마음의 고통 때문이다. 마치 절박한 환자와 가족들이 의사들 앞에서 그리하는 것처럼. 정부 권력 앞에 의사집단은 약자이지만 지금 이를 전환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당당한 감내다.

그러나 의료계는 정부가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자신들의 아이라고 할 수 있는 업의 본질이 죽든 살든 본인들의 주장을 충족시켜 달라고만 하고 있다. 그들의 파업엔 대기업 노조의 파업을 귀족노조의 떼쓰기라며 비아냥거리던 언론이 유독 침묵해주는 ‘선생님들의 특권’마저 함께한다.

특히 모든 논쟁적 사안에 앞서 과연 의료계는 지난 세월 동안 우리사회의 도농간/빈부간 의료서비스 격차 해소를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 왔는지 묻고 싶다. 그럴 의지가 강건했고 실행에 성공했더라도 과연 지금과 같은 상황이 왔을까. 모든 것을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벌어지는 시장논리의 구조적 문제로만 변론한다면, 그들이 사랑하는 본질이 의술을 행하는 업인지, 아니면 의사라는 직업인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의사 선생님들, 지금 거기서 그러고 있는 게 정녕 옳습니까?’

이 질문에서 의사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절박함에 떠밀린 언어인지, 아니면 존경과 응원을 담은 언어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 자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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