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가 끝난 후 천근만근이 된 몸은 자연스레 4캔 만원이라는 냉기 가득한 매대 앞에서 오늘은 또 무얼 고를지 고민하게 만들고, 샤워를 하고서 뜯은 맥주 한 모금엔 하루의 피로가 다 녹아든다. 후덥지근한 날씨나 땀을 흘린 뒤 혹은 운동이나 샤워 후에 간절해지는 것, 그리고 영화나 스포츠 중계를 볼 때도 빠질 수 없는 것, 바로 시원한 맥주 한잔일 것이다. 특히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얼음잔에 담긴 맥주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목이 탄다고 할 만큼 맥주는 ‘시원함’과 ‘청량감’을 대변하며, 무심코 화면 속에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장면을 마주칠 땐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1949년 봄, 작업이 끝나기 전날 아침 10시
지붕 보수 작업을 했던 죄수들은 모두 한 줄로 나란히 앉았고, 
쇼생크 교도소 역사상 최고로 고약했던 간수가 제공한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우린 마치 자유인처럼 앉아 햇빛을 받으며 마셨다. 
꼭 우리들 집 지붕을 고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린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 中


스티븐 킹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쇼생크 탈출(1994)>은 부인과 내연남을 살해한 죄목으로 법정에 선 앤디(팀 로빈스)의 이야기로 시작돼 많은 이들로부터 꼭 한 번쯤은 봐야 할 인생작으로 호평 받는 작품이다. 특히나 옥상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는 씬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도 손꼽힌다. 누명을 쓰고 ‘쇼생크 교도소’에 들어온 앤디는 복역 중이던 어느 날 은행가였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도소 간수의 유산 상속을 도와주려 나선다. 그 대신 앤디가 요구한 대가는 다름 아닌 ‘동료들에게 시원한 맥주 3병씩 나눠줄 것.’ 그렇게 간수와 수감자 사이의 은밀한 거래가 성사된다. 그로 인해 지붕 보수 작업을 하던 동료들은 햇살이 내리쬐는 옥상에서 앤디가 선물한 값진 맥주를 마시며 잠깐이나마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고, 벽에 기대앉은 앤디 역시 그런 동료들을 말없이 바라보며 잠시나마 평범했던 자신으로 돌아간 느낌에 젖어 든다. 이렇게 ‘시원한 맥주 세 병’은 앤디와 동료들 사이의 결속을 다져주는 영화 속 중요 매개체로 등장한다.

이 외에도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서는 콜린 퍼스가 런던의 한 펍에서 깍듯한 매너로 “이 멋진 기네스를 마저 들이켜야겠어"라며 흑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등장하고, 맥주 양조장을 배경으로 한 <드링킹 버디즈>에서는 ‘남사친’과 ‘여사친’이라는 미명하에 오는 감정 변화를 맥주에 빗대며 끊임없이 맥주잔을 부딪친다. 또 <분노의 질주> 시리즈 속에서 빈 디젤은 유감스럽게도 이젠 다른 의미가 먼저 떠오르는 ‘코로나’ 맥주와 늘 함께하는데 이처럼 맥주는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꽤 자연스러운 일로서 다른 주종에 비해 가장 무난하고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술이기도 한 셈이다. 

맥주는 이름 그대로 보리 맥아로 만든 술을 뜻하는데, 맥주 종류에 따라 호밀, 옥수수 등이 일정 비율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몰팅(물에 불린 보리를 건조하고 발아시키는 과정)한 보리로 만든 스카치위스키도 사실상 맥주를 증류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맥주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발효 방식에 따라 ‘풍미는 가볍지만 톡 쏘는 목넘김으로 청량하고도 깔끔한 맛을 자랑하는 라거(Lager)’와 그보다 ‘조금 더 깊고 진하면서 과일이나 꽃향기 등 홉의 풍미가 균형을 이루는 에일(Ale)’로 나뉘는데 여기서 IPA(인디안페일에일)이나 포터/스타우트(다크에일), 바이젠(밀맥주) 등이 홉의 첨가나 로스팅 공법에 따라 하위분류되기도 한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대표적인 맥주 강국이라면 펍 문화가 발달한 영국과 세계적인 맥주 축제인 독일 옥토버페스트 등으로 맥주의 전통을 주장하는 유럽 혹은 다양한 수제맥주들로 개성을 내세우는 미국을 흔히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또한 전국 팔도 어느 식당이건 메뉴판엔 기본적으로 소주와 맥주가 한 쌍처럼 나란히 큰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같이 야구장의 꽃은 맥주라고 외치며, 또 맥주엔 으레 치킨과 땅콩부터 떠올리는 한국인의 삶도 사실 맥주와는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가 아닐까. 

하지만 과거 한국 맥주 맛에 혹평을 한 외신 보도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한 맥주는 정말 맛없다’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그것만큼은 반박을 포기할 정도로 오랜 기간 우리나라 맥주는 마치 물 탄 것 마냥 밍밍해 그저 ‘소맥용’으로만 치부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주류회사들은 맥아와 홉의 비율을 높인 맥주들을 앞다퉈 출시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소규모 맥주 제조업에 대한 규제까지 대폭 풀림에 따라 국내에서도 독특하고도 새로운 수제맥주를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더불어 해외여행이 활발해진 데다 다양한 해외 맥주들의 수입으로 인해 맥주에 대한 일반인들의 미각도 자연스레 높아지면서 이젠 스스로를 ‘맥주덕후’라 칭하는 맥주 마니아들도 곳곳에서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 김지우 칼럼니스트-프리랜서 방송인
▲ 김지우 칼럼니스트
-프리랜서 방송인

미국양조협회(America Brewers Association)에 따르면 미국에는 5000개의 가량의 양조장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미국인은 10마일, 즉 16km 이내에 최소 한 개 이상의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위치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운영되고 있는 소규모 맥주 양조장은 2020년 현재 약 150여 개뿐이지만 이는 전년 대비 30%나 늘어난 수치로, 이제는 독특하고 개성있는 패키지나 양조 지역 이름을 딴 수제맥주를 전문 탭 하우스가 아닌 가까운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국내 수제맥주 산업도 어느 정도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페스티벌 잔디밭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도,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의 감성도, 편의점 앞 노상에서 마시는 ‘편맥’이나 ‘길맥’의 맛도 올해만큼은 편하게 만끽할 수 없었다. 또 해외를 방문할 때마다 지역 양조장에서 생산된 여러 로컬 맥주들을 마셔보며 그 나라에 대한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펍크롤’도 한동안은 꿈꿀 수 없게 된 상황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던 자유는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고, 늘 쟁취해 왔던 권리의 소중함은 모든 것이 멈춰버린 이제서야 여실히 느끼고 있다. 하지만 자유를 갈망하던 <쇼생크 탈출>의 앤디가 결국 달콤한 빗물을 마시게 된 것처럼, 우리도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미래의 삶은 더 큰 위로와 해방감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목 타는 갈증 뒤에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이 가장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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