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인터넷으로 뭘 검색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늘 그렇듯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흘러간 곳은 지능지수(IQ) 테스트 사이트들.

사람의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은 종류도 다양하고 표준편차도 제 각각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IQ 테스트들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인데, 대개 멘사 샘플 테스트를 본 딴 도형 풀이 방식이다. 언어가 방해되지 않고 멘사라는 이름값까지 있으니 많은 사이트에서 사랑받는 모양이다.

몇 나라의 멘사 샘플 테스트와 잡다한 사이트의 문제를 풀다가 재미난 광경을 목격했다. 어느 한 사이트에서 문제를 다 풀자 정확한 지능지수를 알고 싶다면 돈을 내라는 화면이 뜬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비슷한 문제를 내는 다른 사이트들은 공짜로 결과를 알려주는데 이걸 돈을 받다니. 누가 이런 데에 돈을 쓰겠어.

그런데 실제로 돈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면을 넘기자 돈을 내고 결과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과 IQ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더 눈길을 끄는 건 그들의 측정 결과였다. 돈을 낸 사람들의 지능지수는 대체로 80에서 130사이였다. 다른 무료 사이트들과 달리 고지능자로 일컬어지는 IQ 140 이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IQ가 높은 사람들은 걸려들지 않은 것이다.

IQ는 집단의 평균을 100으로 삼고 측정 결과의 상대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값이다. 따라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중앙의 100에 비해 지능이 높거나 낮은 쪽으로 갈수록 인구가 적게 분포된다. 그래서 IQ 85~115 사이의 사람들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95%의 사람들은 IQ 70에서 130사이다.

이는 돈을 지불한 IQ 80~130 사이의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누구나 자신을 그렇게 여기듯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길거리에서 이런 상술을 마주쳤다면 웬만해선 넘어가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이 머리가 좋다는 걸 확인하고픈 내적 동기를 가졌거나, 자기가 심각하게 멍청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이 필요했다든가 하는 등의 정서적인 욕구 때문에 돈을 지불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이 가장 크게 몰린 중앙에서 욕구의 평균값도 가감없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까 그 IQ 테스트 사이트는 평균적인 욕구의 평범한 사람들이 몰려 있는 70%짜리 큰 시장을 상대로 돈을 버는 게 맞다. 분포가 작아 돈벌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고지능자들을 상대할 이유가 없다.

언뜻 보면 인터넷에 널린 무료 IQ 테스트를 놔두고 지갑을 연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을 안 낸 IQ 140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은 것도 없다. 그들도 해당 사이트의 방문자 수를 올려주어 검색 노출이 쉽도록 해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문제를 풀며 장시간 사이트에 머무는 바람에 사이트의 광고 수익을 올려주거나 투자 유치가 용이해지도록 하는 등 사업자의 이익에 일조했다. 이제 다른 사이트들은 점점 검색에서 뒤로 밀릴 것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믿음직스러운 양질의 IQ 테스트를 찾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자신에게 불리한 행위다. 당장엔 몇 만원의 돈을 아꼈다며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훗날 그것은 제대로 된 테스트를 찾기 위한 시간이든 짜증이든 일종의 비용을 지불하도록 만든다.

누구는 이득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본다. 어떤 지능을 갖고 있든 이게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평균의 모습이다. 유난히 멍청하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모인 평범한 사회는 속이려는 기술과 안 속으려는 방어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돈이 돌고 정치가 이루어지고 주류가 만들어진다.

누구보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자신만큼은 주류 사회의 부조리함과 동떨어진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건 환상에 가깝다. 세상의 모지리들을 피해 숲 속 오두막에서 살겠다고 한들, 잘돼 봐야 비트겐슈타인처럼 철학으로써 사회와 교통하게 되거나, 잘못되면 유나 바머처럼 결국엔 도시에 폭탄테러를 일으키며 주류사회와 간섭하게 된다.

머리가 좋든 나쁘든 대개의 개인은 대중의 평균적인 욕구가 이끄는 자장에 휘말린 삶을 산다. 이른바 똑똑한 사람들의 탁견이란 것도 넓게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평균의 진화에 수렴된다.

가령 내로라 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우리사회의 부동산을 위시한 경제 정책이나 검찰 개혁을 둘러싼 정치적 사안 등에 저마다 자신의 주장이 정답이라며 한마디씩 보태지만, 최종적인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당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욕구다. 누가 더 낫든 아니든 모두는 그 평균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시대는 단지 대중으로 하여금 어떤 의견을 채택하거나 배제하도록 할 뿐이다. 그런 일은 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서나 있어왔다. 노무현 때는 시장 개방에, 이명박 때는 사대강 사업에, 박근혜 때는 국가의 기능에 관해 날 선 주장들이 오갔다. 그때 마다 어떤 주장은 선택되고 어떤 주장은 탈락했다. 그것을 결정 지은 것은 당대를 살던 사람들의 욕구 평균과 그것에 기반한 정치 지형이었다. 주장이 배제된 이들은 정부가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유능한 이들을 박대한다고 여기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것은 주류를 이루는 대중의 시대적 흐름이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며 빚어지는 장면이다.

물론 대중의 판단이 늘 합리적이거나 옳지는 않다. 그러나 놀랍게도, 평범한 사람들의 연속된 선택이 만들어낸 그래프는 크게 출렁이는 곡선을 그리는 와중에도 결국엔 우리사회를 발전시키는 우상향 추세를 그려왔다. 다만 이 불가사의한 과정에서 위악과 위선을 부린 오만의 대가를 치르며 사회는 나아간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중의 평균을 낮춰 보고 자만하던 개인은 언젠가 그에 대한 비용을 지불한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유죄판결이 그런 사례다.

이 전 대통령의 입지전적인 일대기를 보면 그가 평균보다 높은 지능을 가졌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정치 궤적 속에 자산을 꾸준히 불린 과정을 보더라도 누굴 속이면 속였지 당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와 대면한 적 있는 지인으로부터 들은 경험담에서도 그는 인상적일 정도로 비상하게 묘사됐다.

어쩌면 그는 대선 주자 시절 검찰이 겨우 한시간 남짓의 국밥 조사로 혐의를 벗겨줬을 때, 정치역학을 잘 요리하는 자신의 지능에 자부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명박의 혐의를 가볍게 넘긴 게 아니었다. 그 시대의 대중은 그가 뭘 어떻게 하든 그저 자신들의 평균적인 욕구를 실현시켜 줄 거라는 점에 동의했을 뿐이다. 사법적으로나 도의적 측면에서의 평균은 잠시 배제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가 선출 권력을 이용해 더욱 사익을 추구하여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까지 봐줄 이유는 없었다. 이제 그는 과거 오만했던 자신의 능수능란에 대해 대중의 평균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르게 됐다.

이건 지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충돌에서 첨예한 주장으로 대립하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장면이다. 한 시대의 대중이 가진 욕구의 평균을 무시하는 오만에는 대가가 따른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개인의 지능은 각 개인들이 모인 사회의 집합 지능이 만들어낸 세계관 평균을 무너뜨릴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똑똑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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