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화백 ⓒ뉴시스
김창열 화백 ⓒ뉴시스

【투데이신문 송선희 기자】 ‘물방울 화가’로 불리는 김창열 화백이 5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인은 물방울과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상징하는 천자문을 캔버스에 담아내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불렸다.

1929년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명필가였던 조부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으며 훗날 ‘회귀’ 연작을 통해 이러한 기억을 작품에 담아냈다.

어린 시절부터 서예와 미술 시간을 좋아했던 그는 중학생 2학년 무렵에는 가족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1946년, 서울로 내려와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근 1년여 동안 서울의 월남민 피난 수용소에서 지내다 이듬해 사설 미술학원인 경성미술연구소에 등록, 이어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이후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경찰전문학교의 속성 과정을 마친 뒤 그는 제주도로 파견돼 근무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은 후에 2016년 제주도에 김창열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여는 계기가 됐다.

그는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작품을 소개했다. 뒤이어 1963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5년부터 4년 동안 미국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Arts Student League)에서 판화를 전공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도움을 받아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이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 파리로 간 뒤 그곳에 정착하면서 유럽, 미국, 일본 등지에서 개인전과 국제전을 가졌다.

물방울 SH 2000-33, 2000, 캔버스에 유채, 53×72.7cm, 물방울 PA85009, 1984, 마포에 유채, 50×72.7cm ⓒ뉴시스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물방울의 의미에 대해 아무런 뜻이 없는 “투명한 물방울”이라며 그저 ‘물방울’ 그 자체라고 설명했다.

사실 그에게 있어 ‘물방울’은 가난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1972년 파리 근교 마구간에서 살았을 당시 화장실이 없어 밖에서 물통을 만들어놓고 세수를 했는데 어느 날 아침,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담다 옆에 뒤집어둔 캔버스에 물방울이 튀었고, 이때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을 보고 캔버스에 담아낸 것이다. 그렇게 1972년 파리 살롱 드 메에 입선한 뒤 본격적으로 ‘물방울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1993), 선재현대미술관(1994), 드라기낭미술관(1997), 사마모토젠조미술관(1998), 쥬드폼므미술관(2004), 중국국가박물관(2005), 부산시립미술관(2009), 국립대만미술관(2012), 광주시립미술관(2014)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 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다.

프랑스 퐁피두센터와 일본 도쿄국립미술관, 미국 보스턴현대미술관, 독일 보훔미술관 및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리움미술관 등 전 세계 주요 미술 기관에는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예술 활동을 진행한 그는 양국의 문화교류 저변 확대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1996년에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은 바 있다. 2013년에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2016년에는 제주시 한경면 저지문화예술지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이 문을 열기도 했다. 그는 서울 평창동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2019년까지 신작을 발표했다.

유족으로는 프랑스 태생 부인 마르틴 김씨와 아들 김시몽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김오안 사진작가, 며느리 김지인, 캐서린 등이 있으며 빈소는 고대안암병원 장레식장 30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11시50분이다. 장지 서울추모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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