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연 작가 ⓒ김종근 칼럼니스트

1920년 인상파 화가였던 지오반니 자코메티는 아들을 데리고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를 방문했다. 거기서 열아홉 살의 아들은 조각가가 될 것을 다짐했다.

그가 바로 피카소가 생애 마지막에 보고 싶어 했던 조각가 알베르트 자코메티였다.

예술가의 탄생이란 이런 것이다.

정경연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재학 시절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 197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시절 어린 딸이 타국에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게 애처로웠는지 어머니는 “장갑을 끼고 작업하라“며 목장갑 한 상자를 보내왔다.

정경연은 후에 “면장갑을 받았을 때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밀려오면서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 기도하는 사람들의 손, 추운 겨울 새벽에 손수레를 끄는 환경미화원의 손 그리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많은 손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고 고백했다.

이는 마치 인간의 고된 삶과 노동을 보여준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같은 것이었다.

작가는 장갑 상자에서 따스한 감동과 영감을 얻었다.

어울림 2016-23, 91x73cm, Cotton gloves and acrylic on canvas, 2016

정경연에게 ‘장갑’은 서양화의 캔버스와 동양화의 화선지와 같이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이었다.

그의 작업들은 의식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동시에, 공예·디자인·순수예술 등 특정 장르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작가에게 장갑은 ‘세상을 보는 시점’이며 ‘창작의 원천’이었다.

면장갑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자 작품의 뿌리라고 명명하는 이유다.

어울림 혼합기법, 43x63.5cm, 2006

작품 제작은 기본적으로 한 개의 면장갑을 4~5개 영역으로 나눠 각각 염색 또는 채색해 여러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후 이루어진다.

작가는 이런 모든 작업의 과정을 마음을 다듬고 비우는 수행처럼 생각했다.

그는 “작업은 나의 화두이자 도반”이며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참뜻을 따르듯 작업한다“고 말했다.

이는 미술 비평가 윤진섭이 작가의 화려한 채색 작업에서 만다라로 통칭되는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는 평가를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무제 한지, 130x225cm, 1992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갑이 사색적인 오브제며 상징적 의미와 가치가 심오하다는 점이다.

장갑 안으로 손이 들어가면 사람들은 모두 평등한 대상이 되는 것처럼 장갑은 모든 것을 감싸고 평등하게 만든다.

1990년대 초반 모노톤 작업에서 종교와 세대 간의 화합을 기원한 설치와 비디오 작업부터 다양한 색채와 재료로 일상적 소품을 입체화한 근작(近作, 최근의 작품)까지 작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작품에 투사했다.

작가는 종종 창작은 수행의 일환이며 <반야심경>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집요함과 흔들리지 않는 작가정신이 있었기에 그는 2020년 최근작을 통해 세상이 하나가 되는 ‘일상적인 오브제의 조형화’에 성공했다.

장갑이란 한 가지 소재로 섬유·회화·조각·판화·비디오·설치 등 현대미술의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탁월한 독창성과 예술철학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Untitled-Installation, 420X400cm, Dyed on Cotton Materials, 1993

수십 년간 무제 혹은 무한으로 세상에 던져진 장갑들이 모두 모여 캔버스가 되기도 하고, 작품 속 하나의 탁월한 오브제로 부활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지니고 태어났다.

밀고 밀리면서 이루어지는 세상의 거대한 질서로 유지되는 조화가 정경연 작품 속에서 정갈하게 자리하고 교차한다.

작가의 손은 유학 시절 가졌던 세계관을 표현해내는 분신이며, 장갑은 그것을 감싸는 도구이자 집이다.

보수적인 섬유 예술계에서 작가의 작품을 갖고 ‘섬유공예 진위‘ 논란이 있었지만, 이미 1960년대 뉴욕에서 쿠사마 야요이나 클래스 올덴버그가 보여준 부드러운 조각 ‘soft sculpture‘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르로 떠오르면서 정경연 작가는 한국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무제, 장갑에 혼합기법, 설치, 2014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어쩌면 정경연은 어머니가 선물한 장갑으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조각은 오브제가 아니고 물음을 던지는 것이며, 대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정경연은 40년의 세월 동안 장갑으로 훌륭하게 응답했다.

어느 장갑에든 사람들의 땀과 삶의 애환과 온기가 녹아있다.

일을 마친 사람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감싸주며 장갑 속에 스며든 희로애락을 현대적인 조형미로 풀어낸 작가가 바로 정경연이다.

지난 6월 정경연 작가의 장갑 설치 작품 ‘코로나19 극복! 희망 장갑 널기‘ 프로젝트는 작가의 인류애를 보여준 퍼포먼스로 기억될 것이다.

“나이를 먹다 보니 남의 삶이 결국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삶이 어울려 사회를 이루고 죽으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회오리처럼 한 점으로 수렴하는 블랙홀 같다”던 그의 말속에서 우리가 그를 한국의 아바카노비츠, 조안나 바스콘셀로스로 불리는 결정적인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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