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화백과 부인 장수현 ⓒ김종근 작가
김흥수화백과 부인 장수현 ⓒ김종근 작가

‘빽바지 신사, 타고난 정력가, 폭군 화가, 고함쟁이 영감’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김흥수 화가를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흰 바지에 백구두를 즐겨 신고 입어 ‘빽바지 신사’. 9순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정력을 공공연히 자랑해 ‘타고난 정력가’, 웬만한 그림이 아니면 그림은커녕 화가 취급도 안해 ‘폭군 화가’,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누구 안전이라도 할 소리 못할 소리 고함을 질러서 ‘고함쟁이 영감’이라는 단어로 불린다. 

정확한 데생과 충실한 색채, 빈틈없는 구성으로 작품을 남기는 김흥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동경미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다.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누드화를 그리기 위해 동갑내기 처녀의 옷을 벗겨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의 황홀함을 잊지 못했다. 

천부적인 재능 탓인지 평생 그는 누드를 그리는 누드 작가가 됐다. 

아버지는 “환쟁이는 일생 동안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 같은 생활을 한다”며 펄펄 뛰며 반대를 했고 김흥수는 “화가가 되면 예술가로 인정받아 못해도 중학교 선생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미술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악을 쓰고 뛰쳐나와 강가로 달려간 가슴 아픈 추억을 회상했다.

누드.캔버스에 혼합재료.60.5x72.5cm 1980
누드. 캔버스에 혼합재료.60.5x72.5cm 1980

그는 무모하게 죽느니 도쿄에 가서 고학하기로 결심했다. 도쿄의 관립 학교의 입학 조건으로 미술 공부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졸업장 없이 조기졸업이란 명분으로 한국으로 귀국했고, 45년이 지난 몇 년 전 졸업 작품을 내지 못했던 그는 70대의 수염 기른 자화상을 동경 예대에 제출함으로 졸업생이 될 수 있었다.

실제보다 훨씬 젊게 그린 자화상으로 그는 6.25사변 전란 중에는 종군 화가단에 참가하기도 했고 제2회 국전에 연속 특선을 차지했다. 

1954년 서울미대에 출강하며 한국 화가로서는 드물게 남관과 더불어 처음으로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1955년에 배를 타고 한 달이나 걸려 파리에 도착한 것이다.

1956년에서 1961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화단과 살롱·도똔느에 출품하여 호평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문을 보고 편지를 써줄 정도였다. 

그는 화가로서 싸롱·도똔느 정회원이 됐다. 1961년에 귀국한 그는 국전 심사위원, 초대 작가를 역임했고, 그해 제1회 5월 문화예술상 미술 본상을 수상하는 명예도 누렸다.

그러다 1967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무어 미술대 초빙교수로 갔다. 그의 미국에서의 활동은 그의 예술작업에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거기서 그는 하모니즘에 대한 착상을 얻었다. 하모니즘은 한 그림 안에서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는 현대미술의 새 양식이다. 

미의 심판
미의 심판

김흥수 화백은 6.25사변을 겪으면서 형제와 가족이 남북으로 나눠져 총칼을 앞세워 싸워야 하는 충격적인 현실과 체험을 리얼리즘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럽에서 추상화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미술사조의 기법과 형식의 변화를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학교에서 그는 추상과 구상 두 그림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그동안 꿈꿔왔던 한 화면에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착상을 하게 된다.

1977년, 김흥수 화백의 조형주의 즉, 하모니즘이 탄생하게 된다.  

그의 하모니즘 개념은 음양의 철학이며 동양사상이 모태다. 

동양사상의 원류는 음양을 하나의 몸체로 갖는 태극에 있다. 태극은 우주의 본체로서, 천지만물이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에 구성은 구성과 추상의 만남이었다.

누드와 일정한 간격의 색면 연결, 병마개의 규칙적인 배열, 오브제의 시메트리, 단순한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반복 구성은 언제나 아름다운 누드와 함께 그의 화면에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누드는 형태적인 아름다움과 에로티시즘만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모태로서의 상징적 의미체계인 것이다. 

그 외에도 누드 뿐 아니라 여인과 함께 승무나 한국적인 불상, 전통춤, 탈 등 한국의 이미지들도 잊지 않았다. 그의 하모니즘은 구상과 추상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표현형식만으로 이미 김흥수만의 독특한 독창성을 이룩했다. 그의 하모니즘은 외로웠고 가치만큼 조명 받지 못했다.

그는 전 부인에게 그림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줬다. 여복이 많아 결혼도 두 번이나 했던 그에게 또 하나의 천사가 나타났다. 이혼을 전후한 직후 덕성여대 교수로 부임하던 즈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염 Thought 1977
염 Thought 1977

1983년 신학기 학생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여학생이 있었다. 동양적인 얼굴형에 눈빛이 맑은 인상적인 여학생. 그가 훗날 그의 평생의 반려자 바로 수였다. 종강하던 날. 수업 후 낙원아파트의 집으로 학생 모두를 초청한 날 그는 수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다시 한번 껴안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면서 그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승과 제자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43세 나이 차이로 학생과 교수가 만나 장난삼아 말한데로 대책도 없이 신혼여행을 갔다. 그들에겐 “제자의 장래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과 “유명화가 덕에 출세하려고 그러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처럼 스승과 제자로 만나 1992년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화단의 온갖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김흥수는 “예술과 도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런 특별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글을 읽거나 내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도덕만 빼놓고는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수는 “당신은 위대한 화가다. 당신은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나를 만난 거다. 나와 사는 동안 영원한 예술가다”라고 되뇌었다. 그러면서 “선생님과 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그 운명을 막으면 저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집안에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고 했다. 

지금 김흥수 미술관을 맡고 있는 장수현 관장. 그녀가 없었다면 그는 프랑스의 륙상부르그 미술관 전시. 데이비드 살르와의 하모니즘의 원조 논의 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홍익대 대학원에 예술기획을 전공하지만 불행하게도 2012년 50세의 나이로 김흥수 화백(93)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김흥수 미술관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유일하게 애썼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은 그에게 피카소처럼 언제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김 화백의 예술은 여인의 육체의 향기 속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 여성을 깊이 탐색해 알고 그것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그는 “나는 일생 동안 누드를 많이 그렸지만 그것은 단순히 여인의 피부, 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다”며 “한 여성을 통해 들여다본 환희와 절망, 허무와 끝없는 욕망. 그것이 나의 예술에 들어있는 독특한 세계” 라고 고백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 나름대로 정직했고 성실하게 본인의 예술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김 화백에게 1988년, 가슴 아픈 일이 생긴다. 프랑스에서 전시를 준비하던 중 청기와 화방에 맡겼던 초창기 하모니즘의 1970년대 18점이 화재로 불에 타버렸다.

그 일을 생각하면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것 같은 악몽에 시달린다고 할 정도로 경악할 일이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그는 허공을 쳐다보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냈다고 했다.

손에 집문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저의 전 재산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라도 받아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그는 가로막으며 “조 사장, 도로 가져가시오. 이 엄동설한에 이것을 나에게 주면 조 사장은 집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어디에서 살 것이오. 보험금을 받더라도 공장부터 먼저 차리고 자립하는 길을 마련하시오.” 김흥수는 불타버린 그림값 대신에 집문서를 가져온 조 사장을 되돌려 보냈다.

이게 바로 김흥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받은 문화훈장 옥관장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30회 이상의 개인전, 1993년에는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전, 러시아 에르미타쥬박물관의 역사적인 작품전, 프랑스의 세계적인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주목했던 김흥수. 그의 예술을 우리가 지금 바르게 보고 있는지 속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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