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전 법무장관 ⓒ청와대

【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 나는 2014년에 쓴 『삼국지인물전』에서 조국 전 법무장관을 조자룡에 비유했다. 문관인 조국을 삼국지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인 조자룡에 비유했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엔 조국이 학교에 있을 때라서 더욱 그런 반응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조국이 물을 만나면 조자룡처럼 활약을 할 것이라 생각했고,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자룡의 군자와 같은 면에 주목하여 조국과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다. 때가 되면 현실정치에 발을 들일 것이며, 만인을 아우르는 리더의 모습을 지니고 대중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됐다. 조국은 문재인 정부의 민정수석으로 발탁된 이후 검찰 개혁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고, 짧으나마 법무부장관 직도 수행했다. 대중에게 사랑받았고, 한 때는 대선후보자 여론조사에서 두 자릿수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른바 ‘조국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조국은 민주진보진영의 차세대 주자로 각광받았다. 이 정도면 조자룡보다 나으면 나앗지 결코 못하지 않다.

‘조국사태’가 일어난 이후 현재까지 조국이 겪고 있는 고초에 대해서는 이 사람에 대한 호오를 떠나 아마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언론과 검찰의 집중 공격을 받은 결과 조국 자신은 관직을 잃고 유배객이 되어 있다. ‘조국사태’가 진행 중일 때는 편 들어 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2021년 4월에 민주당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패한 직후에는 선거패배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 당하면서 편을 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급기야 진영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조국을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여희와 같은 검찰

역사에도 이처럼 탄탄대로를 걷다가 한 번에 내려앉아 많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 춘추시대의 진문공(晉文公, BC 673? ~ 628)이 눈에 띈다. 진문공은 자신의 나라를 떠나 19년 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갖은 고생을 하다가 귀국한 뒤 왕위에 올라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霸者)가 된 사람이다. 이 사람과 조국을 비교해 보려 한다. 조국은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고 갇혀 있으며, 고생을 하고 있는 시간의 길이가 이 사람보다 짧다고 할 수 있지만, 처한 상황과 삶의 궤적은 진문공과 무척 닮아있다.

진문공은 진헌공(晉獻公, ? ~ BC 651?)의 둘째 아들이고 이름은 중이(重耳, 이하 진문공으로 표기)라고 한다.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공자(公子)였기 때문에 유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태자는 맏이인 신생(申生)이었는데, 진헌공은 오랑캐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얻은 여자인 여희(驪姬)를 총애한 나머지 둘 사이에서 태어난 해제(奚齊)를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태자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희는 해제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흉계를 꾸몄다. 우선 진헌공을 설득하여 신생과 진문공, 또 다른 아들 이오(夷吾)에게 오랑캐 지역을 개척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이들이 수도를 떠나자 여희는 본격적으로 신생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신생의 명성이 왕을 능가한다고 하면서 진헌공의 불안감을 자극했고, 신생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니 죽여 달라고 하면서 진헌공의 동정을 얻어냈다. 이후 여희는 신생더러 제사 음식을 준비하라 하고는 거기에 독을 타서 신생이 진헌공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진문공과 이오에게도 같은 혐의가 있다고 참소하자 신생은 달아났다가 결국 목을 매어 자살했고, 진문공과 이오(夷吾)는 국외로 망명했다. 이렇게 진문공의 19년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여희는 윤석열로 대변되는 검찰이라 할 수 있겠다. 살아있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공평하게 수사를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알고 보면 자기네 조직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압박하거나 죽여 왔다. 여희처럼 사람을 궁지로 몰기 위해 기획수사를 하고, 없는 죄를 만들며,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고, 끊임없이 수사 정보를 언론에 흘려 사람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조금 멀게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과 가깝게는 고 노회찬 의원의 사건을 떠올려 보면 검찰이 어떤 조직인 지 알 수 있고, 이들의 만행에 가까운 작태는 이미 온 국민이 알게 된지 오래다. 조국도 어찌 보면 이들의 공세로 인해 잘못될 수 있었지만 겨우 살아남아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다.

■ 고난을 달게 여겨 주기를

진문공은 19년 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몇 군데 나라에서는 국빈에 준하는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약소국이라 진문공의 힘이 되어 줄 수 없었다. 이들 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지지기반이 약한데다 나이도 많고, 왕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는 사람을 반겨주지 않았다. 어떤 때는 먹을 것도 없어서 걸식을 하기도 했다. 춘추시대 역사서인 『국어(國語)』「진어(晉語)」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진문공 일행은 제(齊)나라로 가는 길에 오록(五鹿)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곳의 농부에게 음식을 좀 달라고 하자 농부는 일행에게 흙덩어리를 주었다. 진문공이 화가 나서 채찍을 들어 때리려 하니 신하인 호언(狐偃)이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하늘이 주는 것입니다. 백성이 흙을 주는 것으로 복종하는데 또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하늘의 일에는 반드시 상징이 있으니, 12년 후에 반드시 이 땅을 얻을 것입니다.”

호언의 말처럼 흙은 영토를 상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진문공이 화가 나서 때리려고 한 것으로 보아 농부는 호언의 말처럼 복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먹을 것을 달라는 데 흙이나 먹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복종의 표시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나 호언은 현재의 이런 고통을 하늘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견디라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진문공은 화를 삭이고 흙을 받아 싣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조국사태가 일어난 이후 조국은 검찰과 언론뿐만 아니라 민주진보진영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까지 위선자 취급을 받고, 조롱을 당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민주당이 선거에서 패한 뒤에는 패배의 원인을 조국이라고 하고, 지금껏 조리돌림을 당한 것을 보고서도 ‘생사람을 잡은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왔으며,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도 조국 때문이고, 젊은 세대들이 현 정권에 분노하는 것도 조국 때문이라고 하는 정치인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조국을 옹호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진문공에게 호의를 보였던 나라들의 힘이 약했던 것처럼 비난하는 사람들의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조국 자신도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은 하늘이 주는 것이고, 사람들이 자신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여겨 주기를 바란다. 진문공처럼 많은 이들의 질시와 모멸을 안고 가야하겠다. 조국은 남들이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의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므로 충분히 이겨낼 것이라고 믿는다.

진문공의 고초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일화를 하나 더 보겠다. 역시 『국어(國語)』「진어(晉語)」에 수록되어 있다.

진문공이 위(衛)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를 지나가는데 조나라 공공(共公) 또한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공공은 진문공이 통 갈비뼈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진문공을 객사에 머물게 하면서 가리개를 설치해 놓고는 진문공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어디 그뿐인가. 조국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당하고 있다. 언론은 그간 조국에게 수백만 건의 기사를 쏟아내었다. 조국의 집에 수십 명의 기자가 진을 쳤으며, 지금까지도 조국은 자유롭게 집 밖을 나가기 어렵다. 심지어 딸의 출근길까지 기사 거리가 되었다. 조국에 대한 호오를 떠나 이런 행동은 절대로 옳지 않다. 진문공은 이런 치욕을 참고 견뎠고,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왕위에 올라 조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조나라 공공처럼 무례하고 경박한 언론은 굳이 조국이 나서지 않더라도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대중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 군자의 허물은 일식·월식과 같다

진문공은 서쪽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후원을 얻어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진문공은 왕이 된 이후, 약자를 위한 시혜정책을 폈다. 지지기반이 약했으므로 그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농업사회였으므로 농업을 장려했지만 상업의 육성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스로 검소했고, 모든 이들에게 근검절약을 강조했다고 한다. 진문공은 이처럼 좋은 정치를 했으며 기원전 632년, 성복이라는 곳에서 초나라 군대를 쳐부수고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가 되었다.

조국을 진문공에 빗대었다고 해서 이 사람이 진문공처럼 패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다. 권력을 지니기도 어렵거니와, 그걸 지니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도 불투명한데 무엇 하러 노력하라고 주문하겠나. 진문공이 천신만고 끝에 패권을 차지한 것처럼 이 시기를 잘 넘기고 하루빨리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조국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판결에는 오로지 검찰의 입장만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상급심에서 상당 부분 혐의를 벗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조국 역시 그러하게 될 것이고, 끝내 자유로워 질 것으로 믿고 있다. 재판에서 일부 유죄가 나더라도 정치적 맥락으로는 큰 타격은 없을 것이다. 담담히 향후 재판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다만 나는 조국이 그간 사회적 약자를 대변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분노하고 아쉬워하는 지점을 깊이 알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렵게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나 부모의 심정, 특히 젊은 세대들의 이 사회를 향한 불신과 분노를 온전히 헤아리지 못했다. 게다가 비리가 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으니 이들이 사회의 진보를 이끌 것이라 기대했던 조국에게 느낀 실망감과 배신감은 생각 이상으로 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국도 이 점을 알고 여러 차례 사과했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고려대 문과대학 한문학과 강사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아이를 크게 키운 고전한마디>
<왜곡된 기억> 외 7권

대중의 분노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조국에게 허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이 사람의 삶 전체를 좌우할 만큼 결정적인 잘못은 아니며, 이 사람에 대한 비판은 일리가 있지만 과도한 측면이 더 많다고 보고 있다. 『논어(論語)』「자장(子張)」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공(子貢)이 말했다. “군자의 허물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일식·월식과 같다. 허물을 범하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子貢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이미 많은 사람들은 조국의 허물을 알고 있고, 이 사람 역시 인정했다. 이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허물을 바로잡고, 예전보다 더 약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언젠가 대중은 반드시 마음을 돌려 진문공을 도왔던 진목공이 되어 줄 것이다. 결국 조국은 자유로워 질 것이고 예전처럼 당당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다시 서게 될 것이라 믿는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더 온화하면서도 단단해진 조국을 보면서 환호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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