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대통령 집무실,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고려시대부터 청와대 터는 길지로 유명
한양 때 도읍으로 삼을 정도로 명당
용산은 군자감 때문에 군대 주둔

용산 국방부 신청사.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한정욱 기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현 청와대가 아닌 용산 국방부 신청사로 결정하면서 이전 의지를 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부 이전에 난색을 표하니 통의동 금융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인 사무실에서 대통령 업무를 보겠다면서 배수진을 치고 있다. 이렇듯 대통령 집무실이 어디로 이전될 것인지에 대해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면서 청와대의 역사와 용산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 청와대는 대통령의 공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집무실과 퇴근 후 기거하는 대통령 관저, 그리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진과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장소를 통칭하는 말이다. 장소적 의미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로서 인왕산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 뒤편에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청와대가 경복궁 후원 자리였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역사적으로 명당으로 꼽혔던 자리이다. 도선비기에 다르면 고려 수도 송악(개성)의 기운이 삼각산 즉 한양에 빼앗긴다고 했다. 고려 숙종 당시 천도론이 나오면서 과연 어느 땅이 수도로 삼을 것인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풍수지리가 김위제가 상소문을 통해 삼각산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 선경(仙境)이다. 그곳에서 시작한 산맥이 3중·4중으로 서로 등져 명당을 수호하고 있으니, 삼각산에 의지해 도읍을 세우면 9년 만에 사해(四海)가 와서 조공할 것이다고 예언했다. 그래서 그 터에 궁궐을 만들고 남경 궁궐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천도는 논의만 이뤄졌을 뿐 흐지부지 끝났다. 고려 우왕 때에도 남경 궁궐로 천도를 하고자 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그만큼 고려시대에서도 현 청와대 터를 명당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청와대 터로 궁궐을 옮기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좌절됐다.

조선시대 한양

그리고 조선이 개국됐다.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게 됐다. 한양으로 정하게 될 때 하륜이 무악(현 신촌 연희동)을 궁궐터로 삼자고 했지만 비좁다는 이유로 한양(현 청와대 터)를 선택했다. 하지만 청와대 터가 다소 좁기 때문에 보다 남쪽은 현 경복궁 터에 궁궐을 짓고 경복궁이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현 청와대 터는 경복궁 후원이 됐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면서 경복궁 후원도 소실됐고, 한동안 방치됐다. 그러다가 고종 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 춘당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면서 경복궁 경무대라고 불렀다. 경무대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이름으로 경복궁 후원의 넓은 터 이름이었고, 넓은 터와 함께 몇몇 전각들이 있었다. 이 넓은 터에서 왕의 참석 하에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권농, 연무 등이 행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라가 빼앗기면서 이 경복궁 후원도 역사 속에 휘말리게 됐다. 전각들은 헐어지고 공원부지가 됐다. 1937년 해당 지역을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 부지로 선정하면서 관저를 세웠다. 그러면서 보천교 본당이던 십일전의 청기와를 가져다 쓰면서 관저 지붕이 푸른색이 됐다.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 치하로 들어갔고, 미군정 사령관인 미합중국 육군 중장 존 하지 장군의 관저로 사용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됐고, 경무대로 부르게 됐다. 하지만 4.19 혁명 이후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감 대문에 경무대에 대한 이름의 거부감이 있었고, 결국 윤보선 대통령은 수많은 이름 중에 청와대라는 이름을 사용하자고 했고, 그때부터 청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청와대로 부른 것은 미국의 백악관처럼 우리나라에서는 푸른 기와집이 있다는 차원에서 청와대로 부르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 들어오면서 증개축이 이뤄졌고, 전두환 시절 청와대 구본관을 리모델링, 노태우 시절 본관과 관저 및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을 신축하면서 오늘날 모습을 갖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취임하자 구 본관을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전부 철거했다. 그리고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하고 광화문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경호 상의 이유로 비용상의 문제로, 국민의 불편 때문에 이뤄내지 못했다. 그런데 윤 당선인의 의지로 인해 이제 용산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상황이 됐다.

용산은 오욕의 땅

하지만 용산이라는 지역이 오욕의 땅이기도 하다. 외국군대가 주둔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용산에 외국군대가 주둔한 이유에 대해 풍수학자들 중 일부는 명당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가 더 컸다. 조선시대는 조운제도를 통해 세금인 쌀을 운반했다.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운반을 하면서 세곡선들이 강화를 거쳐 마포나루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 그 세금인 쌀은 두 개의 창고로 이동을 했다. 하나는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는 역할을 하는 광흥창으로 갔고, 또 다른 하나는 군인들의 녹봉을 지급하는 군자감으로 갔다. 광흥창은 마포에 위치해 있지만 군자감은 용산에 위치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왜)군대가 용산에 주둔한 것도 군인들 녹봉을 지급하는 창고인 군자감이 용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한 것도, 곧바로 일본 군대가 용산을 주둔한 것도 용산에 군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쌀이 필요했고, 쌀 창고인 군자감이 용산에 있었기 때문에 외국 군대가 용산에 주둔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전경. [사진제공=뉴시스]
청와대 전경. [사진제공=뉴시스]

외국군대의 주둔

용산에 주둔한 또 다른 이유는 당시에 배를 통해 한양으로 외국 군대가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즉, 마포나루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고 나가고를 했다. 그러다보니 한양과 마포나루 사이에 있는 용산이 가장 최적의 장소가 됐다. 마포나루에서 숭례문(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에 주둔을 하게 되면 조선백성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용산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대륙 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용산이 택해졌다. 그 이유는 서울역 때문이다. 서울역사가 완성되면서 일본군대는 부산에서 내려서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게 되면 바로 인근인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기지에 안착해 있다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용산에 외국군대가 주둔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 군대가 물러나고 곧바로 미군 군대가 들어왔다. 미국 군대 역시 주둔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군사시설이 갖춰진 용산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군대가 사용한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미군이 용산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주한미군이 철수됐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이 다시 용산에 주둔해야 했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용산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풍수학자 중 일부는 용산이 길한 땅이기 때문에 외국군대가 주둔했다고 하는데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일부는 틀린 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용산 개발 때문에 건설회사들이 풍수학자 일부를 매수해서 용산이 마치 명당자리인 것처럼 호도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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