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br>글 써서 먹고삽니다.<br>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br>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한국시간 2022년 5월 15일(일) 오전 8시는 미국 워싱턴시간으로는 5월 14일(토) 저녁 7시였다. 특별한 외부 일정이 없으면 서울 금천구 독산동 집구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은둔형 작가 나부랭이가 굳이 미국 워싱턴시간을 따져야 했던 이유는 뭘까? 상황은 4월 20일 오전 3시 26분에 받은 페이스북 메시지에서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는 미국에 워싱턴 지역에 사는 아무개입니다. 시민단체 모임에서 강연을 준비 중인데 작가님을 강사로 모시고 싶어서 메시지 드립니다.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으로 연락처를 보낸 시간은 오전 5시 54분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보기 드문 유형의 프리랜서 작가이기에 가능한 시간인데, 응답을 내내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한국시간으로 늦은 오전 시간에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 국제전화카드로 거는 거라, 이상한 번호가 뜨더라도 받아주시면 되겠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미리 언질을 받지 않았다면 해외 보이스 피싱이라고 확신해 수신 거부했을 요란한 발신 번호가 떴다. 얘기를 나눠 보니, 자신은 한국에서 대학생 시절에 학생운동을 했는데 그때 내 책도 읽고 강의도 여러 번 들으며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미국 워싱턴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으며, 틈틈이 교민들과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갖고 있는데 그 모임 참가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부탁한 것이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이자 자본주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 역시 날이 갈수록 빈부격차, 청년실업, 환경파괴 같은 문제들이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윤추구를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제물로 삼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과 결함 때문이라는 견해가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런 때야말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과학적으로 파헤친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의 통찰이 필요하니,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인 내가 관련 내용을 쉽게 강의해 달라는 게다.

한국에서 뿌린 씨앗이 민들레 홀씨처럼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는구나. 가수 나훈아, 조용필 씨처럼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강연하는 건 아니고, 코로나 사태 이후 급속도로 대중화된 줌(ZOOM)을 이용해 실시간 원격 강의로 진행한다고 했다. 아무렴 어떤가. 바다 건너 저 멀리에 사는 사람들이 일부러 내 얘기를 듣겠다고 랜선 너머로 불러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미국 워싱턴시간으로 5월 14일(토) 저녁 7시인 강의에 맞추기 위해, 한국시간으로 5월 15일 새벽에 일어나 인터넷 연결상태 및 카메라와 마이크를 점검하고 시간에 맞춰 줌에 접속했다. 간혹 인터넷 연결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큰 사고 없이 강의와 질의응답까지 원활하게 진행됐다. 반응이 어땠는지 물어보니 뒤풀이 자리에서 마르크스에 대해 열띠게 토론했다며, 마르크스 책을 읽는 독서모임이 따로 결성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미국 젊은이의 절반 이상이 사회주의에 대해서 긍정적이라는 외신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분위기냐고 물어보니, 온몸으로 확연히 체감하고 있단다.

사회주의 대중화의 조짐은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감지된다. 일단 나의 활동 반경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2006년에 첫 책을 쓰고 사회주의 성향의 작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십여 년 전 어떤 전교조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 강의를 들려주고 싶다고 나에게 연락한 일이 있다. 강의 당일 학교에 갔더니 그 선생님이 결재서류를 챙겨서 나와 함께 교장실로 가는 것 아닌가. 사전에 결재를 안 받은 것이다. 아마도 미리 결재를 올리면 허락받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 같았다. 강의 당일에 강사와 함께 가면 교장도 차마 거부할 수 없을 걸로 생각했겠지. 중년의 사내가 교장에게 엄청나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결재서류를 내미는데 어떻게든 도와줄 요량으로 영업용 미소를 띠고 넉살 좋게 한마디 거들었다.

“강의 진짜 재밌어요. 교장 선생님도 한번 같이 들어보세요.”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전국 여러 곳의 고등학교를 방문하며 그때보다 훨씬 급진적인 내용, 그러니까 무려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한다. 전교조 교사만 나를 초청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학 고전 명저를 배운다는 취지로 일반고, 외국어고, 영재학교, 대안학교 등 다양한 학교에서 <자본론>을 강의했다.

막연하게 겉핥기식으로 강의하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빈부격차가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발생한다는 <자본론>의 핵심 내용을 정확하게 숫자로 풀어서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동안 천편일률로 주류 경제학의 내용만 접한 학생들은 진도 9.0 수준의 지적 충격에 빠져들고, 교실 안에는 묘한 침묵과 긴장이 흐르게 된다. 내 말만 듣고서는 믿을 수 없겠다고? 얼마 전 모 영재학교에서 내 <자본론> 강의를 들은 전교 1등 학생이 담당 교사에게 남긴 문자 메시지가 그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특강 정말 재미있게 잘 들었어요. 다른 데에서는 절대로 못 듣는, 사회에 대한 관점 자체를 바꿔주는 강의였어요. 좋은 기회 마련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탑오브탑 반응입니다. 진짜 감사드려요.”

지난 2020년에 청소년 도서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를 출간한 이후로는 고등학교에서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비교하는 강의까지 요청받고 있다.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나소유’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오평등’이 팽팽하게 상호 토론하는 방식으로 서술했다.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서로의 주장을 선명하게 대립시킴으로서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기획한 책이다.

원래 출판사는 사회주의에 대한 청소년 교양서를 써 달라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내 쪽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자고 역제안했다. 물론 나는 얼마든지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내용으로만 책 한 권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주입식 교육의 폐해에 대해 근본적 문제의식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일방의 내용만을 담은 청소년 책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내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억지로 주입할 권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편집자가 내 초고를 읽고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나소유의 의견이 살짝 우세하게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집필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기검열을 했다. 이 책의 내용으로 강의할 때도, 내가 자본주의 편인지 사회주의 편인지 알쏭달쏭하다며 어느 편이냐고 학생들이 물을 정도다.

그렇다면 과연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를 읽은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2022년 7월에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를 주제 도서로 강의했다. 사실 강의라기보다는 질의응답이 이어지는 저자와의 만남 성격이 강했는데, 학생들이 이미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를 완독하고 사전 토론까지 마쳤기 때문이다. 이 고등학교는 소위 공부를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인 학교인데 참가자들이 내용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강당 중앙을 기준으로 한쪽은 자본주의 지지, 다른 쪽은 사회주의 지지로 나뉘어 앉았는데 놀랍게도 사회주의 지지와 자본주의 지지가 거의 동수였으며 솔직히 말해 사회주의 지지가 살짝 더 많았다. 원만한 진행을 위해 양쪽에 강제 배정된 것이냐고 물어봤는데, 책을 읽은 후 자신의 선호도대로 선택한 결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강당 뒤쪽으로는 책을 읽지 않고 단순히 방청만 하는 학생들이 앉았는데,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본주의 지지 쪽에만 앉았다. 책을 읽은 후 학생들의 사고 변화 양상을 가늠할 수 있는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학생들끼리 상호 토론을 진행하는데 사회주의 지지하는 학생의 발언이 논리정연하고 호소력 있어 자본주의 지지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국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직접 자본주의 지지 진영에 가세해 좌측으로 기울어진 분위기를 살짝 중앙으로 옮겨 놓아야 할 정도였다. 요즘 청소년들은 우리 세대와 비교했을 때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이 적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다. 낡은 것(자본주의)은 가고 새것(사회주의)이 오고 있구나.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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