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br>글 써서 먹고삽니다.<br>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br>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선거에서 자신이 속한 계급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 혹은 정당에 투표하는 행위를 계급투표라고 한다. 예컨대 자본가라면 법인세 깎아주고 비정규직 고용을 대폭 확대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겠다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 노동자 서민이라면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걸고 노동자가 일터에서 존중받고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하겠다는 정당에 지지하는 것이 계급투표일 테다.

온전한 계급투표가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자본가, 고위 관료, 전문직 종사자의 수보다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의 수가 훨씬 많지 않은가. 각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정확하게 투표한다면,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집권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국회의원, 기초단체장, 지방의원의 면면을 보면 계급배반투표에 가깝다. 대부분의 선거에서 보수 양당의 후보들이 번갈아 선출되는데,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자본가와 고위 관료, 전문직 종사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며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려 노력하는 진보정당은 선거 때마다 초라한 득표에 번번이 좌절한다.

계급배반투표의 원인은 무엇일까? 영호남 지역감정,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언론 환경, 자본주의 옹호 일변도인 제도권 교육, 정치세력과 정당에 대한 정보와 이해도 부족, 보수적인 종교계가 신도에게 미치는 영향, 낙선이 예상되는 후보에 대한 지지를 꺼리는 사표심리 등 인간과 사회가 복잡한 만큼이나 다양한 견해와 분석이 존재한다. 굳이 본질과 비본질을 나누겠다고 엄격한 잣대를 대지 않는다면, 언급된 요인들이 모두 일정 수준으로 현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나저나 최근에는 기득권 보수 양당 체제에 내로남불 팬덤정치까지 더해지면서 정치판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정당과 정치인의 행보에 대한 파렴치한 이중잣대가 난무하며, 합리성과 상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수준으로 정치문화가 전락했다. 이 요지경 상황을 눈앞에 두고 문득 ‘자존감’이라는 키워드가 머리를 스쳤다. 아마도 팬덤이라는 용어 때문인 것 같다.

심리학자들은 극심한 팬덤 현상의 원인을 당사자의 자존감 부족과 연결해 해석하기도 한다. 아이돌, 스포츠팀, 연예인, 정치인 등에 대한 강렬한 팬덤에는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심리가 존재한다. 아이돌, 스포츠팀, 연예인, 정치인의 성공을 통해 대리만족과 대리성취감을 얻고 낮은 자존감을 보상받는 것이다. 물론 모든 팬덤이 다 이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과도한 팬덤의 배후에는 이러한 심리가 상당히 작용함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알다시피 자존감은 내가 남보다 우월해서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다. 남과 비교함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감정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의 행보 하나하나에 일상이 뒤틀릴 정도로 그렇게 죽니 사니 매달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이 자신들과 비슷한 구석도 없고 친분도 없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지도 않는 법조인, 전문직, 교수, 기업인에게 투표를 행사하고 그들의 팬이 되어 보수 양당 정치에 휘둘리는 것은, 자신이 저들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부족한 자존감에 대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대상과 자신을 심리적으로 동일시한다. 그들의 성공은 자신의 성공이며 그들에 대한 공격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 합리적 판단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러한 계급배반적 팬덤정치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서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결과로 돌아온다.

글을 쓰다가 문득 유명한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베르톨트 브레히트

일곱 개의 문을 가진 테베는 누가 지었을까?
책들에는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왕들이 돌덩이를 날랐을까?
그리고 여러 번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 바빌론을 누가 그렇게 여러 번 세웠을까? 건축노동자들은
황금빛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만리장성을 다 쌓은 날 저녁,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을까? 위대한 로마는
개선문으로 가득 차 있다. 카이사르들은
누구를 무찌르고 개선했을까? 수많이 노래된 비잔틴에는
시민을 위한 궁전들밖에 없었을까? 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조차도
바다가 덮친 날 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자신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혼자서 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무찔렀다.
그는 취사병 하나쯤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리프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했을 때
울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
승리한 자는 없을까?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십 년마다 큰 인물이 나온다.
그 비용은 누가 댔을까?

이렇게 많은 보고들,
이렇게 많은 의문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재화나 서비스 대부분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역량을 가진 이들이 한 줌도 안 되는 소수 기득권층에게 휘둘릴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스스로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나와 확연히 다른 계급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추앙하며 대표자로 선출하다가 매번 뒤통수 맞고 살 이유는 없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피지배계급의 자존감이 낮은 쪽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노예가 주인에게, 평민이 귀족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는 심리의 기저에는 내가 저들보다 열등하다는 허위의식, 즉 '낮은 자존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저들의 폭력과 억압으로 자세를 낮추고 있지만, 나는 원래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존재라는 자각(자존감)이 있다면 자발적인 복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배계급은 신화나 종교, 교육 등의 장치를 통해 피지배계급에게 '낮은 자존감'을 심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자신들은 조상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둥, 신의 자손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내면서 말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상황이 다 자존감이 낮은 네 탓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언론과 교육을 통해 자행되는 자본주의식 가스라이팅에 노출되는데, 노동자가 정상적인 자존감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난망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 대중이 끝끝내 낮은 자존감 상태에만 머문다면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결국 계급투표와 사회진보의 가능성은 착취당하고 수탈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자신은 이렇게 취급당할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단결과 연대를 공고히 해 나갈 때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 대중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고 아끼지 못하는데 어찌 타인에게 존중받을 수 있겠는가! 그 어느 때보다도 노동자의 철학(세계관)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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