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몇 차례 언급했지만, 곽재우는 충(忠)과 효(孝), 절의(節義)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간주하는 도교의 양생술과 도술을 익히고, 이를 임진왜란에서 활용한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곽재우에게 그 이외의 다양한 모습도 보인다.우선 불교와의 관계이다. 곽재우는 전공(戰功)을 세운 의병장이었지만, 성리학에서 이단(異端)으로 간주했던 도교의 술법을 익혔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는 것은 수차례 밝힌 바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곽재우와 마찬가지로 승군(僧軍)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소개했듯이 곽재우는 의병 활동으로써 충(忠)을 지키고, 조정의 옳지 않은 일에 관직은 물론 목숨까지 걸고 직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의(義)를 지켰다. 이런 모습은 흔히 알려진 유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곽재우에게서는 말년에 은거하며 도교(道敎)의 신선이 되려는 모습도 나타났다. 특히 곽재우의 의병 활동 기간에 용모가 비슷한 사람에게 같은 옷을 입혀서 적중을 혼란에 빠뜨린 일종의 ‘분신술’을 쓴 것이나, 임진왜란 종전 후 그가 벽곡(辟穀), 즉 곡기를 끊으면서, 도인(導引)·토납(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칼럼에서 조선을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가 조정과 대립하는 모순된 모습을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곽재우는 의병장으로서의 전공(戰功)과 그의 강직한 성격을 인정 받아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제수 받았다. 조정에 가서도 곽재우는 자신의 소신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관직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또한 소신을 주장해서 귀양을 가거나,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조정의 중신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 탄핵 과정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한다.곽재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했는지도 모른다.1)위의 글에서 드러나듯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하고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의병장들은 대부분 당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어린 시절 필자는 MBC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방영됐던 대하드라마 시리즈인 “조선왕조실록”을 매우 즐겨봤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에서는 여러 시리즈에 걸쳐서 ‘설중매’, ‘한중록’, ‘뿌리깊은 나무’ 등의 제목으로 조선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다뤘는데, 그 가운데 ‘임진왜란’은 판옥선과 거북선 미니어처를 특별 제작하는 등 엄청난 스케일 때문에 필자의 기억에 남았다. ‘임진왜란’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아무래도 충무공 이순신의 활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임진왜란 3대 대첩, 왜군 내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