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몇 차례 언급했지만, 곽재우는 충(忠)과 효(孝), 절의(節義)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간주하는 도교의 양생술과 도술을 익히고, 이를 임진왜란에서 활용한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곽재우에게 그 이외의 다양한 모습도 보인다.

우선 불교와의 관계이다. 곽재우는 전공(戰功)을 세운 의병장이었지만, 성리학에서 이단(異端)으로 간주했던 도교의 술법을 익혔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는 것은 수차례 밝힌 바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곽재우와 마찬가지로 승군(僧軍)을 일으켜서 임진왜란에서 전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 등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단순히 이러한 공통점 외에도 곽재우는 수차례 사찰에 들어가 생활한 적이 있다. 15세 무렵 보리사에 들어가 유학 서적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읽었고,1) 또한 광해군 대에 있었던 국정의 난맥상에 대해 극언으로 상소했으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원익에게 하직하고 해인사로 물러났다.2) 성리학자가 사찰에 들어가는 경우는 율곡 이이를 비롯해 많은 성리학자에게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광해군 대에 해인사에 들어가는 모습은 이미 의병장으로 명망을 쌓았고, 당대의 유력 유신(儒臣)과 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운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인사로 들어간 것은 그의 고향과 가깝고, 사찰을 편안한 공간으로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해인사에 들어가서도 광해군 대의 국정 난맥상에 대한 직언을 아끼지 않는 절의를 지키는 행위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여자와 관련된 모습이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곽재우는 처와 첩을 모두 뒀다. 그러나 곽재우가 23세 때 의주목사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서 함께 살 때, 다른 벼슬아치의 자제들이 기녀들과 접촉하는 모습과는 달리, 곽재우는 그런 일이 일절 없었다고 한다.3) 즉, 곽재우는 처첩은 두었지만, 기녀는 멀리한 것이다. 곽재우가 의주에 살 때 기녀를 멀리한 것이 그의 아버지인 의주목사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평가하는 연구4)도 있다. 그러나 곽재우가 훗날 도술을 익힐 때 방중술은 익히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곽재우가 여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것일 가능성도 높다.

또한 성리학의 덕목이 부딪힐 때 그가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에 따라서도 의외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전에 곽재우의 첩이 위독할 때, 그 첩이 곽재우를 보고 싶어 했지만, 시묘(侍墓)를 이유로 곽재우가 그것을 뿌리쳤다는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겠다고 나섰다가 포기한 뒤, 고향인 현풍으로 돌아가 3대 선영의 봉분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토적보국(討賊報國)’으로 가묘(家廟)에 고하고 가재(家財)를 털어서 의병을 일으켰다.5) 곽재우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충(忠)의 가치를 선산을 지키는 효(孝)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왕에게 직언을 할 때는 충군(忠君)보다는 절의(節義)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도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결국 곽재우는 성리학자의 모습을 가정에 남겼다는 것이 그의 유훈(遺訓)에서 확인된다는 점이 의외의 모습이다. 곽재우의 유훈은 「거가잡훈(居家雜訓)」이라는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거가잡훈」은 곽재우가 평소에 남겼던 말들 가운데 자손들이 기록해 둔 것을 따로 모아두었다가 문집에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상 혼례, 상례, 제례, 예괴(禮壞) 복고(復古)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6) 여기에서 곽재우는 혼례의 사치 풍조를 경계했다. 그래서 겉치레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치와 낭비를 해서 가산을 탕진하고, 이로 인해 가정의 도리인 제사를 올리고 처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을 당부했다. 상례에서는 상복을 입는 사람의 도리를 지적했다. 직계인 상주와 방계에 상관없이 상례가 발생하면 모두가 도울 것을 지적했고, 장사(葬事)를 치르기 전에 관에 옻칠을 하지 말고, 송진을 나중에 사용할 것을 당부했다.7) 제례의 경우 제수는 모든 자손이 서로 도와서 마련해야 되고, 제사 지내기 전에 한 곳에 모여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제사는 먼 조상이라고 소홀히 지내지 말아야 되고, 시제(時祭)에서 4대 조상을 한꺼번에 지내기 위해 제청(祭廳)이 넓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합설(合設)해도 무방하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예괴(禮壞) 복고(復古), 즉, 예가 무너졌을 때 주(周)의 문공(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 소박한 옛 방식을 되찾는 것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가정의례에 대한 곽재우의 유훈은 설이 다가오는,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의례에 관한 다양한 변화와 논쟁에도 소박함과 진심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1) 이동환, 「곽망우당의 도학적 정신구조와 그 현실주의적 성향」, 『복현한문학』 제9집, 복현한문학회, 1993, 16쪽.
2) 이동환, 「곽망우당의 도학적 정신구조와 그 현실주의적 성향」, 『복현한문학』 제9집, 복현한문학회, 1993, 18쪽.
3) 이동환, 「곽망우당의 도학적 정신구조와 그 현실주의적 성향」, 『복현한문학』 제9집, 복현한문학회, 1993, 17쪽.
4) 이동환, 「곽망우당의 도학적 정신구조와 그 현실주의적 성향」, 『복현한문학』 제9집, 복현한문학회, 1993, 20쪽.
5) 이동환, 「곽망우당의 도학적 정신구조와 그 현실주의적 성향」, 『복현한문학』 제9집, 복현한문학회, 1993, 17쪽.
6) 김시황, 「망우선생 「거가잡훈(居家雜訓)」 연구」, 『동방한문학』, 제9권, 동방한문학회, 1993, 39-40쪽.
7) 김시황, 「망우선생 「거가잡훈(居家雜訓)」 연구」, 『동방한문학』, 제9권, 동방한문학회, 1993, 40-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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