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br>-&lt;착한 자본의 탄생&gt; 저자<br>-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ESG네트워크 김경식 대표
-<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前 현대제철 홍보팀장·기획실장(전무)

2008년 5월 30일 금요일 아침 현대차 홍보실장 K 부사장이 차 한잔하자고 연락이 왔다. 당시 현대제철 홍보팀은 양재동 현대차 사옥 서관 14층에, 현대차 홍보실은 2층에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부사장은 두툼한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김 부장, 참 미안하네. 일은 김 부장이 다 했는데 칭찬은 내가 받았어”라며 정몽구 회장의 말씀을 전해줬다. “현대제철이 기획한 오늘 아침 OO신문을 보시고 회장님께서 ‘그래, 홍보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시면서 아주 기뻐하셨네. 그리고 내가 직접 가서 회장님의 감사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네. 또 비서실장(K 전무)을 불러서 내가 제대로 했는지 확인 후 보고하라고까지 하셨네.” 평소 회장님께서 언론에 대한 이해가 깊고 통이 크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격려를 해주실 줄은 몰랐다.

이 일이 있기 10여 일 전, OO 신문 산업부 U 부장으로부터 현대제철 단독으로 8면 특집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8면 중 2개 면은 현대차 그룹의 광고를 게재하고 6개 면은 통으로 기사를 게재하자는 제안이었다. 일관제철소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므로 뉴스거리는 많았지만 어떤 기사를 어떤 제목으로 뽑느냐가 중요했다. 당시 상황은 선진국들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영향으로 금융·실물 시장이 타격을 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중국이 세계 원자재 시장을 잠식한다는 포비아가 있었다. 또한 경쟁사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다가올 일관제철 경쟁 시대에 대비해 자사의 상대적 우위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자재 확보도 잘하고 있다, 금융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투자를 계속한다, 지역사회와 함께한다는 내용으로 6개 통면 기사를 채울 수 있었다.

문제는 1면 기사였다. 정몽구 회장의 철강 사랑을 잘 녹여야 했다. 스트레이트 기사가 아니라 감동의 스토리가 필요했다. 스토리를 담당한 A 기자와 회장의 철강에 대한 비전, 집념, 애정, 노력을 공유했다. 좀 길지만 전문을 소개한다.

[지난 3월 말 충남 당진의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공사 현장을 찾은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은 건설 현황을 꼼꼼히 점검하고 직원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당초 공장 방문 일정은 이날 오후까지. 정 회장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스케줄을 변경했다. 공사 현장의 안전대책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공장에서 아예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 것. 현장의 직원들은 공장 내 기술연구소에 임시 숙소를 마련했지만 정 회장은 다음 날 새벽까지 현장 곳곳을 둘러보느라 거의 눈을 붙이지 않았다. 정 회장이 ‘무박 2일’ 일정으로 국내 사업장을 점검한 것은 최근 수년간 없던 일이다.

당진공장을 찾은 것은 올 들어서만 벌써 10차례나 된다. 한 달에 두세 번꼴이다.1) 누구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정 회장의 스타일을 감안하더라도 잦은 발걸음이다. 정 회장의 잦은 당진행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그룹을 일궈내겠다는 집념으로부터 비롯됐다. ‘쇳물에서 자동차까지’로 요약되는 그룹의 수직계열화는 정 회장의 오랜 숙원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고품질의 철강제품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말을 임직원들에게 틈날 때마다 강조한다.

올초 당진 공장을 찾은 정 회장은 500여명의 임직원을 한자리에 불러 자신의 지론을 직원들에게 설파했다. “좋은 차는 좋은 품질에서 시작됩니다. 또 자동차 품질은 강판이 결정합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이 현대·기아차그룹의 미래를 열어가는 버팀목입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자회사인 현대하이스코를 통해 자동차 강판을 주로 공급받는다. 그러나 현대하이스코는 자동차 강판의 원재료인 열연강판(핫코일)을 해외에서 조달해야 한다. 항상 국내외 업체에 손을 벌려야 한다. 현대제철도 아직은 고철을 녹여 철강제품을 만드는 ‘전기로(電氣爐)’업체에 머물러 있어 핫코일 공급에 한계가 있다. 외부 의존도가 높다 보니 마음에 맞는 자동차 강판을 구하기 힘들다.

“쇳물을 직접 뽑아낼 수만 있다면….”

현대·기아차그룹의 오랜 숙원을 해소할 수 있는 해법이 바로 당진 일관제철소다. 일관제철소가 완공되면 현대·기아차만을 위한 ‘맞춤형 자동차 강판’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정 회장의 당진 일관제철소에 대한 관심은 원재료 확보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호주의 BHP빌리턴과 브라질의 발레 등 광산업체와 장기 공급 계약을 맺을 때마다 자리를 함께했다.

당진 일관제철소에 대한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당진 지역경제도 꿈틀거리고 있다. 5조8400억원2)이 투자되는 건설 과정에서 7만8000개의 일자리와 13조원의 생산 유발 효과가 기대된다. 유입 인구가 늘어난 데 힘입어 시(市) 승격은 시간문제다. 정 회장은 조만간 또 당진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어김없이 꼼꼼한 지시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현대제철 임직원들은 회장이 현장을 찾아 이런저런 지적을 할 때마다 ‘에너지’를 받는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매출 규모만 놓고 보면 현대제철의 그룹 내 순위가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에 이어 4위지만 위상은 그보다 훨씬 높다”며 “회장께서 관심을 가질수록 직원들의 사기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A 기자]

2009년 9월 2일 당진제철소 첫 원료 입하식 행사. 이날 정몽구 회장의 표정은 제철소 건설 시작 후 가장 평안한 모습으로 알려졌다. [사진제공=ESG네트워크]<br>
2009년 9월 2일 당진제철소 첫 원료 입하식 행사. 이날 정몽구 회장의 표정은 제철소 건설 시작 후 가장 평안한 모습으로 알려졌다. [사진제공=ESG네트워크]

이 사건(?)은 언론계에 엄청난 화제가 됐다. 다른 언론사의 유사한 특집 제안이 쇄도했다. 회장이 언론의 중요성을 알고 실제로 통 크게 격려한다는 것은 그룹과 현대제철에 대한 언론사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줬고, 홍보팀에게도 큰 힘이 됐다.

그룹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일부 계열사가 회장님의 마음을 얻고자 이런 특집을 시도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최근의 현장 방문 사진도 없었고 무엇보다 가슴 뭉클한 스토리가 없었다. 당시 정몽구 회장은 일관제철소의 성공적인 건설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다. 초기 토목공사 때는 혼자 야간에 갤로퍼를 몰고 불시 현장 점검을 하다가 펄에 차가 빠진 적도 있었다. 200만평 벌판이 온통 공사판으로 널려서 완성된 길이 없었다.

정몽구 회장의 현장 방문은 제철소가 완공된 이후에도 잦았다. 한번은 거의 동시에 ‘회장님 건강이 어떠시냐’는 기자들의 취재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러한 취재 건은 홍보팀에서 알 수도 없고 설사 아는 게 있어도 말할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소문이 자자해지고 정말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다. 이럴 때쯤이면 회장님은 당진제철소에 가서 오전 내내 현장을 점검하고 직원들을 격려한다. 자연히 소문은 사라진다.


1) 이후 2010년까지 정몽구 회장의 현장 방문은 주 4~5회로 늘어났고, 토·일요일은 상주를 했다.

2) 이 당시는 일관제철소 투자를 고로 2기 연산 700만톤으로 시작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고로 3기 연산 1200만톤, 총 투자금액 12조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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