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 해석 사이 위험한 줄타기 우려...편향성 시비에 논쟁 오히려 가중
(쟁점1) 3·15 부정선거 직접 관련성 없다? 위헌적 행보·부정선거 책임 소재 여전
(쟁점2)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고도성장 공로? 이농현상 속 정책효과 희석 논란
(쟁점3) 제주 4·3사건, 순전히 남로당 책임? ‘대량피해 국가폭력’ 최종책임자

<건국전쟁> 포스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건국전쟁> 포스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투데이신문 박고은 기자】  ‘건국 대통령, 국부, 배신자, 런승만, 독재자...’ 

놀랍게도 이 엇갈린 평가는 모두 한 사람,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승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집권 무렵 일명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재평가 논의가 부각되는 등 오랜 기간 논란이 계속돼 왔다.

특히 최근 영화 <건국전쟁>이 상영되면서 그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논쟁이 재점화되는 모습이다.  이 영화는 5일 기준 누적 관람객 100만명을 돌파할 만큼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때 아닌 이념 논쟁으로 또 한번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영화 <건국전쟁>이 학술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업적을 재평가한다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채택하면서 이른바 사실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앞서 ‘길 위의 김대중’, ‘그대가 조국’, ‘문재인입니다’ 등의 진보 진영 인사를 다룬 영화가 상당수 개봉했기에,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이 말한 ‘균형’이라는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 감독이 영화에서 이승만의 공과(功過)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려 한 상당한 부분은 진실과 해석에서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지적에 직면하고 있다.

대표적 문제로 제기되는 점은 영화가 이승만의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되는 4·19혁명 정신과 책임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대목이다. 4·19혁명을 촉발한 이승만의 책임과 과오를 축소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공정성을 잃었다는 논란은 내달 총선을 앞두고 이념 논쟁에 불을 지펴 보수를 결집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까지 이어진다. 

역사적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위험한 줄다리기가 펼쳐지고 있는 영화 <건국전쟁>의 쟁점은 무엇인지 각종 사료와 논문, 보도 등을 통해 살펴보고 반면교사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출처=이승만연구원]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출처=이승만연구원]

<쟁점1> 이승만은 선거조작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3·15 부정선거 당시 이승만의 상대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전 사망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즉,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이 이미 확실한 구도였는데 왜 선거조작 원흉으로 강조되느냐며 억울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상대적으로 라이벌 장면에 비해 인기가 없었으므로, 이기붕 당선을 위해서만 부정선거를 한 것이지 이승만은 이와 연관성이 없다고 영화는 설명한다. 

또한 이승만이 고령이었고 부정선거와 관련됐다는 명확한 문서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직접 연관성을 부인한다.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하겠다는 헌법적 가치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부정선거 책임을 이기붕과 자유당에 돌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자유당은 발췌개헌(1952년), 사사오입개헌(1954년), 보안법개정파동(1958년) 등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의 집권 연장의 본체 역할을 했다. 경북대 김진흠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가 쓴 ‘1956~1957년 자유당 내각책임제 개헌 시도의 정치적 의미’ 논문은 자유당을 이승만의 ‘사당(私黨)’으로 평가한다.

영화에서 나왔듯 실제로도 선거 직전 이승만 상대 후보였던 조병옥이 사망해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해진 것은 사실이다. 선거의 초점은 대통령직의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 선거로 넘어갔다. 즉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 사이에서 전개되는 양상이 됐지만, 자유당은 ‘당초 짜놓았던’ 부정선거 계획을 실행한다.

실제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나와있는 1960년 4월 29일 서울지방검찰청 ‘범죄인지서’에는 3·15부정선거의 핵심인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 대해 범죄사실을 인지했다고 보고돼 있다.

해당 보고서는 ‘1960년 3월 15일에 실시한 대통령 및 부통령선거에 있어서 자유당 입후보자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1959년 3월 21일 내무부 장관 취임 시부터 1960년 3월경까지 약 100회에 걸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매회 최고 5000~6000명, 최하 5~60명의 공무원들에 대해 자유당 입후보자인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라고 지시했다’고 적시한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최인규 당시 내무부 장관은 이를 위해 당시 내무부 차관 이성우, 치안국장 이강학 등과 상호 공모해 3·15정부통령선거를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으로서 수행할 것을 기도했다. 수시로 전국 각 경찰서장, 군수, 시장 등에 비밀지령을 내려 3·15정부통령선거에 자유당 입후보자의 당선을 위해 소위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9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투표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를 하게 함으로써 선거의 자유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최 장관은 이승만이 선거 1년 전 임명한 자다. 때문에 영화처럼 부정선거는 이승만과 직접 연관성이 없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승만의 간접적 지시 내지 묵시적 추인 이슈가 남기 때문. 왜 그럴까? 이승만은 선거 직전인 1960년 2월 “1956년 선거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압박성 담화문을 냈다. 이는 일종의 지시성 메시지로 자유당과 내무부 등에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내무부와 내무부 장관에 대한 직접적 지휘가 증명되지 않았더라도, 이 영화의 시각처럼 이승만을 부정선거 직접 책임론에서 해방시키기 어렵다.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사진출처=뉴시스]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사진출처=뉴시스]

<쟁점2> 이승만식 농지개혁이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토대?

영화에서는 이 전 대통령의 농지개혁이 자영농을 늘렸고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토대가 됐다고 주장한다.

농지개혁은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으로 지주들의 자산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려는 목적으로 실행됐다. 당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여러 나라를 기준으로 살필 때 친농민적인 정책이라고 해석할 여지는 분명 컸다. 

그래서 농지개혁의 긍정적 부분이 분명 있고, 이런 점에 주목한 평가도 학계 내외에서 분명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지난 2023년 타계한 고(故) 한동대 유영익 석좌교수는 생전(2006년)에 펴낸 저서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에서 농지개혁이 우리 경제에서 가진 의미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고인은 “이승만의 독려 하에 완결된 농지개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해석했다. 특히 “지주의 손을 떠난 지가증권이 신흥기업가들에 의해 귀속재산 불하에 사용됨으로써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한 기업인 행사에서 “농지개혁이 만석꾼의 나라였던 한국을 여러분의 선배 같은 기업인들의 나라로 바꾼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던 것도 이런 유 교수 학설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지주들의 자산을 산업 자본화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는 지적이 대두된다. 영화에서는 자영농의 비율을 늘렸다지만, 정말 농지개혁 이후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됐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결국 이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미완의 정책이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흉년 여부에 상관없이 법정 상환량을 정하고, 한국전쟁 시기에도 농민들은 현물로 농지 대가를 상환했다. 농민들은 임시 토지수득세를 내야 하는 등 최초 설정된 농지가격보다 훨씬 높은 대가를 요구받았다. 지주들의 경우 터무니없는 보상금 규모를 통보받았고 그나마도 보상중단으로 큰 손실을 봤다. 이 때문에 농민과 지주를 동반 몰락시킨 정책이라는 비판이 학계에서 일고 있다. 

실제로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의 ‘한국 농지개혁 재검토 완료 시점 추진동력 성격’ 특별 연구에서는 “농민과 지주 모두 정부로부터 과도한 착취를 당했고 동반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전시 농지개혁의 실상”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어중간한 농지개혁 상황에서 결정타가 등장했다. 1954년부터 미국의 원조 물자로 곡물값이 폭락하면서 빈농 생활을 면할 수 없게 돼 적자 영농과 이로 인한 농가 부채 증가는 농민들이 농지를 매각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이에 따라 농민의 재소작화 현상이 나타났고, 이농이 본격화됐다.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을 정치철학적 의미를 두고 시작했더라도, 결국 중간에 정치적 카드로 저울질했다는 악용 증거도 있다. 이는 농지개혁 정당성의 빛이 바래게 하는 실책이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이 전 대통령은 농지개혁이 1년간 연기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달 19일자 미국 중앙정보국(CIA) 비망록에는 농지개혁 연기 배경 해석이 신랄하게 제시된다. CIA는 이는 개혁을 지연 혹은 폐기하는 것으로, ‘지주 계급’의 압력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했다. 전쟁 중 이승만 정부가 지주 계급을 정치적 반대파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분석이 뒤따르는 대목이다.

결국 농지개혁은 중단없이 진행됐으나, 그 효과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은 물론 이런 정치 논리가 이면에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주시 4.3 평화기념관에 4.3 사건 당시 피해자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사진출처=뉴시스]
제주시 4.3 평화기념관에 4.3 사건 당시 피해자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사진출처=뉴시스]

<쟁점3> 제주 4·3사건은 남로당이 5·10선거를 막기 위해 벌인 것?

영화는 제주 4·3사건은 좌익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5·10선거를 막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전초 단계인 국회 구성 즉 5·10선거의 중요성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여순 사건부터 제주 4·3 등 다양한 남로당의 행동이 있었다는 논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 역사넷’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특히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 바로 4·3이다.

하지만 영화 <건국전쟁>처럼, 남로당이 5.10 총선거를 막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단순히 이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요약할 수 있을까? 당시 미국에서도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을 4.3 사건의 ‘도화선’으로 보고 있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1949년 4월 1일 시점에서 제주도 사태를 종합 분석한 주한미군사령부의 정보보고서 자료를 통해 이를 입증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서는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제주읍에서 일단의 좌익 3·1절 행사 참가자들을 공격해 몇 사람을 죽이기 전까지는 제주 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해 일으킨 소요들은 제주도를 점령하고 있는 미군에 의해 비교적 느슨하게 억제돼 있었다. 공격을 받은 섬 주민들은 경찰에 대해 즉각적인 보복을 했고, 1년여에 걸친 유혈폭력이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안 일어나도 됐을 일이 경찰의 실수로 촉발된 면이 크다고 풀이할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의 주장처럼, 순전히 남로당의 준동으로 악용됐다고 보는 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제주를 소위 ‘빨갱이 섬’으로 규정,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오게 된 계기였던 1947년 3월 10일 총파업 당시 좌익뿐 아니라 우익도 동참하고 있다는 정보 자료도 나온다.

미 24군단이 3월 20일자에 작성한 주간정보요약서엔 “제주읍의 총파업은 지난 3월 1일 벌어진 불법시위와 폭동으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을 입은 데 대한 항의로 ‘좌·우익 함께 참가(both left and right)’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주간정보요약서는 제주도민의 좌익성향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고 있다. “좌·우익에 관계없이 대다수 주민이 자신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믿을 때,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번 파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강경 진압으로 여론이 나빠지고, 이를 틈 타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등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미 군정의 뒤를 이은 이승만 정부는 제주 지역의 정치적 요구를 이해하기보다는 정권 정통성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강경 진압 일변도로 치달았다. 

제주 4·3평화재단의 지난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이 사건 희생자 수는 1만4532명이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총 인명피해를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던 2만5000명에서 3만명 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념 전쟁보다는 한 섬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국가 폭력적 성격이 커서일까? 제주는 매년 희생자를 기리고 유족을 위로하는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현기영 소설가의 ‘순이 삼춘’과 같이 문학으로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등 다양한 추모 예술 작품을 낳고 있다.

3·1운동 첫날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모습이다. [자료출처=국가기록원]
3·1운동 첫날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모습이다. [자료출처=국가기록원]

<쟁점4> 3·1운동 발발에 이승만이 막대한 역할을 했다?

영화에선 3·1운동 발발 배경에는 이승만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3.1 운동의 직접적 배경으로는 그로부터 약 한 달 전 나온 2.8 독립선언서를 꼽는 게 정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2·8 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재일본도쿄조선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낭독한 사건이다. 하지만 2.8 독립선언에 이승만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영화는 영향력 행사 가능성을 추정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이 YMCA에 활동했다는 점에서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직접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이른바 밀서를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했고, 이것이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몇 군데 서적에서 발견된다. 

이 밀사설 내지 밀서설은 고려대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자서전(仁村 金性洙-사상과 일화)에 언급된다. 아울러 밀서를 직접 봤다는 주장을 하는 또다른 책으로는 독립운동가 임영신이 생전에 쓴 ‘나의 40년 투쟁사’가 있다.

하지만 임영신의 저서는 그가 중앙대 설립 등 여러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이승만 정부에서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인사였다는 점에서 객관성이 일부 의심된다는 한계를 가진다. 김성수 저서 외에는 사실상 근거가 박약한 셈이다.  

이승만의 태도를 보면, 3·1운동을 미리 기획했는지, 또 즉각적 독립을 강조한 3·1운동 정신에 그가 꼭 들어맞는 시각을 가진 인사였는지 회의적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1919년 3월 17일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가 이승만은 미국 당국에 ‘위임통치 청원’을 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윌슨 대통령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부터 한국을 국제연맹이 완전한 자치정부로서 적합하다고 결정할 때까지 위임통치하면서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모색하는 조처를 해주도록 요청받았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의 사본이 헨리 정(정한경)과 함께 주미 한국인 단체의 공식 대표인 이승만에 의해 오늘 현지에서 발표됐다”고 썼다.

이 위임통치 청원의 내용은 즉각적 독립을 갈구한 3·1운동 선언문 및 그 정신과 거리가 있다. 

아울러 이승만은 3·1운동 소식을 몰랐고 뒤늦게 알았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일찍부터 “이 전 대통령이 3·1독립운동을 지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근거가 전혀 없다”고 강조해 왔다.

김 소장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9일 뒤인 3월 10일에 가서야 서재필을 통해 3·1운동 소식을 알게 됐다고 지적한다. 3·1운동이 미주 한인사회에 처음 알려진 건 중국 상해에 있던 현순 목사가 미주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전보를 친게 직접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김 소장은 “그해 3월 13일자 신한민보에 기사가 나면서 미주사회에서 3·1운동 소식을 널리 접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이승만 자신이 남긴 문서들이 많이 있는데, 그 문서들에도 3·1운동에 대해서 자신이 기획, 지시했다는 자료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물론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서재필과 4월 14일부터 16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시내 리틀극장에서 자유한인대회를 여는 등 국제적 외교전을 통해 이 운동을 널리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과 국제연맹에 요구하기도 했다.

즉, 그가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을 널리 알렸고, 외교노선으로 광복에 일정 부분 기여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과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거나, 직접적 설계자라는 식의 주장은 분리해 볼 필요가 ‘아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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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건국전쟁>을 보는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다.

역사란 과거에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인식 관점에 따라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 사실을 평가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특정 세력 혹은 이념집단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왜곡을 일삼는 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E. H. 카도 이러한 문제를 이미 경계해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사실과 문서’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때문에 역사적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은 역사가 개인의 견해일 뿐이지 ‘역사의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꼬집는다.

그러므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사실을 선택하거나,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반복적으로 입증되는 사실을 외면한다면 결국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승만에 관한 논쟁거리들을 놓고, 근거 자료나 해석에 있어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만으로 ‘역사’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음이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 측면도 있다. 영화 <건국전쟁>으로 불붙은 역사 논쟁은 한 인물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해 줬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영화의 긍정적 영향이다.

지난해 9월 이 전 대통령 기념관에 거액을 기부한 배우 이영애는 “(이 전 대통령의) 과오를 감싸자는 것이 아니라, 과오는 과오대로 역사에 남기되 공을 살펴보며 화합하자는 의미였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사회가 이번 영화를 통해 당장 거둘 수 있는 수확이 바로 이런 대목이 아닐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대화의 창구가 돼 더 이상의 이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번 논쟁을 바라볼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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