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OLDs)> 기억해야 할 세 번째 소식, ‘제주 4·3사건’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
계엄령 선포와 ‘초토화작전’으로 3만여 명 희생자 발생
“세상이 시끄러우니 가지 말라”던 父와 엽서 끊긴 子
연좌제로 포기한 꿈과 이어가는 행불인유족협의회
75주기에도 이념 갈등 여전, ‘서북청년단’의 훼방도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중략)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도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中 

올드스(OLDs)는 투데이신문이 ‘오래된’이라는 뜻의 ‘Old’와 ‘소식’이라는 뜻의 ‘News’라는 뜻을 담아 만든 코너명입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속보 경쟁에서 벗어나 ‘그때’와 ‘지금’을 짚어봅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지금은 한 모퉁이로 자리는 옮겼지만 마음 한 가운데 남아야만 하는 오래된 뉴스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투데이신문 정인지 기자】 아, 떼죽음 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 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현기영, <순이 삼촌>중에서

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돼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에 달하는 2만5000명에서 3만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리던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오후 2시께 기념행사가 끝난 후 가두시위(街頭示威·길거리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대열은 감찰청이 있는 북신자로를 거쳐 동문통으로 이어졌다.

오후 2시 45분께 관덕정 광장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였다. 시위행렬은 이미 광장을 벗어난 시점이었다. 임영관 경위가 경찰서로 가기 위해 방향을 튼 순간 6세가량의 어린이가 튀어나온 것이다. 경위가 그대로 지나가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저 놈 잡아라!”고 항의했다.

이때 관덕정 앞에는 육지에서 내려온 응원경찰들이 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당시 응원경찰은 시·도경찰청장 또는 지방해양경찰관서의 장이 돌발사태를 진압하거나 공공질서가 교란됐거나 교란될 우려가 현저한 지역을 경비할 때 그 소관 경찰력으로 이를 감당하기 곤란하다고 인정되면 응원을 받기 위해 다른 시·도경찰청장 또는 지방해양경찰서의 장에게 요구하는 파견 경찰관을 의미한다.

군중이 몰려오자 경찰은 총격을 가했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5명은 모두 등 뒤에서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1947년 4월 5일자 독립신보 2면 9단&nbsp;‘피탄자는 군중’ 기사. [자료 제공=국립중앙도서관]
1947년 4월 5일자 독립신보 2면 9단 ‘피탄자는 군중’ 기사. [자료 제공=국립중앙도서관]

“관직에 있는 나로서 무어라고 비판을 가할 수는 없으나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박경훈 초대 제주도지사

경찰은 사건 발생 당일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2일부터는 3·1 행사 위원회(위원회) 간부와 학생들을 검속했다. 이들이 구타와 고문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도 전역에 파다했다. 

이러한 ‘격앙된 민심’을 읽은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제주 내 좌익 세력을 이끌며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도 힘을 보태면서 점차 경찰을 향한 광범위한 비판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에는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 회사, 학교를 포함 도내 166개 기관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 일부도 동참했다.

파업 참여자들의 주장은 ▲3·1 발포 사건에 대한 사과 ▲발포자·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조병옥 경무부장은 담화문을 발표해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해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 지칭했다.

희생자 앞에서 절규하는 민간인과 뒤 편의 미군. [사진 제공=제주4·3평화재단]
희생자 앞에서 절규하는 민간인과 뒤 편의 미군. [사진 제공=제주4·3평화재단]

미군정은 1947년 3월 15일부터 이듬해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을 검속하고 고위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로 교체했다. 파업에 동참한 경찰관 66명이 파면됐음은 물론이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미군정에 놓인 제주 사람들은 고립된 섬 속에서 세계 냉전 구도가 빚어낸 이념의 한가운데 놓였다.

남북 이념 갈등, 남쪽 끝 한라로 몰아

1948년 1월 남한의 단독선거안(5·10 단선)이 명백해지자 이를 두고 남한 내 찬성과 반대 대열이 선명히 나눠졌다. 하나는 단독정부를 반대한 김구·김규식 노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이승만 노선이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남로당 주도의 무장대 350명은 4월 3일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서북청년단(서청) 숙소 등 우익단체의 거점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하루 동안 ▲경찰 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사망 2명, 생포 1명 등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어 무장대의 5·10 단선 반대로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가 무효 처리 됐다. 선거 거부는 미군정에 있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강경 진압의 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I don’t care about the cause, my mission is to suppress only.

(원인에는 관심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 뿐)”  

-군경토벌대 최고 지휘관 브라운 대령, 1948. 6. 8.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도민들의 모습. [사진 제공=제주4·3평화재단]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도민들의 모습. [사진 제공=제주4·3평화재단]

본격적인 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중산간지대로 피신했다. 6월 중순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6000여 명에 달했다.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한라산을 축으로 하는 제주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할 때 이는 거의 모든 지역을 의미했다. 이어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가히 ‘초토화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송요찬 연대장의 포고문에 명기된 적성(敵性)지대. 군은 이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 시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해 총살'할 것이라 발표했다. [사진 제공=제주4·3평화재단]
송요찬 연대장의 포고문에 명기된 적성(敵性)지대. 군은 이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위반 시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해 총살'할 것이라 발표했다. [사진 제공=제주4·3평화재단]

이 작전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전개됐다. 희생자 수는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정된다. ‘초토화작전’ 이전까지의 사망자 수가 1000여 명 미만임을 고려하면 작전이 전개된 5개월 동안 집중적이고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음이 자명해진다. 

토벌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疏開·공습이나 화재 등에 대비하기 위해 한곳에 집중돼 있는 주민이나 물자, 시설물 등을 분산시키는 명령)시키고 중산간마을을 불태웠다.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재판 절차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했다. 

증언에 나선 고창선 씨의 모습.&nbsp;ⓒ투데이신문
증언에 나선 고창선 씨의 모습. ⓒ투데이신문

중산간지대 아니어도...해안마을 고창선씨 이야기

“중산간에서 다 피난 왔잖아요. 피난 와서 며칠 안 된 때예요. 한 15일이나 됐는데, '소개'내고요”

애월읍 하귀리에서 나고 자란 고창선씨는 당시 13살이었다. 인터뷰 전 기자가 살펴본 서류에서 그의 형 고창만씨는 당시 ‘목재’ 운반에 동원됐다고 적혀있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땔감’이라며 정정했다. 

근처에 주둔한 부대(토벌대)서 ‘밥을 해 먹으려면 땔감 해 줄 인력이 필요하다’며 사람을 데려갔다고. 고씨는 “젊은 사람은 무조건 데려간 거예요. 물어보지도 않고”라며 “군대 도와주러 갔지 누가 그걸 덫으로 이용할 줄 알았냐”며 입을 뗐다. 

“우리는 피난 대상이 아니에요. 해안마을이니까. 그런데 웬 마을이 다 내려와 버리니까”

중산간마을에서 피난 온 사람들(피난민)은 임시 거처를 짓거나 해안마을 사람들의 집에 신세를 졌다. 그런 상황에서 ‘땔감 인력’을 구하자 얹혀 있던 중산간마을 사람들이 제일 빨리 몸을 일으켰다고 전했다. 

고씨는 “그 사람들(피난민)은 집주인이 중노동을 하러 갈 판이니 주인 대신 가지”라며 “주인이 가지 말라고 해도 손님 입장에서 내가 가게 되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그의 아버지 또한 “세상이 시끄러우니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형 고창만씨가 되레 가겠노라고 대답했단다. 고씨는 “그때가 보리 갈 땐데 파종하는 것보다는 거기 가는 게 좀 편할 것 같았는지 형님이 우겨서 나가시더라”고 회상했다.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했거든. 아침밥 먹으면서. 아들 대신 내가 갔다 오겠다고”

그는 “형님이 그 말만 들었어도 화는 면하는 건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돌려본들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형님이 잡혀가고 나서는 또 한 번 태풍이 불었다. 그는 “(토벌대가) 자수하라고 했다. 근데 아무도 자수하지 않으니까 마을에 할당을 했다”라며 “어느 마을은 몇 명, 어느 마을은 몇 명. 대략 하루에 30명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그만큼의 인원이 자수하지 않으면 ‘초토화’시키겠다고도 했다. 그렇게 그의 마을에서 “열여섯난 사람 열서이(열셋)”가 ‘자수’했다. 

“3·1 독립만세운동에 안 가본 사람 누가 있어요. ‘다 갔으니까 갔다 왔다고 하는 거 뭐 문제가 되겠냐’해서 갔다 왔다고 한 것뿐이지”

열둘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12월에는 학위국민학교로 다 모이라는 말이 있었다”며 분부대로 모이니 ‘눈 감으라’ 명하곤 젊은 사람은 다 총살되고 안 나온 사람들은  ‘죄가 있으니까 안 나왔다’ 여겨 그 집 뜰에서 직접 총살됐다고 전했다. 

‘초토화작전’이 일단락된 1949년 4월 28일, 15년의 형기를 받고 대구형무소로 끌려간 그의 형 고창만씨에게서 엽서가 도착했다.

대구형무소에서 온 엽서 사본.&nbsp;[자료 제공=고창선 씨]
대구형무소에서 온 엽서 사본. [자료 제공=고창선 씨]

현행 문법에 맞춰 풀어 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님 전상서

어언간 세월은 흘러서 엄동설한도 지나고 온화한 난춘의 계절에 그동안 늙으신 조부님이며 부모님 기력이 항상 건강하시옵고 어린 동생들이며 모두 안녕하십니까.

불효막심한 이 자식도 신체 건강하여 자기 잘못을 밤낮으로 반성하며 상관의 명령을 잘 복종하며 수양에 노력하는 중이오니 안심하옵소서. (중략)다만 부탁할 것은 여기에 와서 영양 부족으로 신체가 매우 불편하오니, 금전 이천오백환만 부디 보내 주시옵소서. 신체 보존에 쓰일 약을 차입하여 사용할 것이니 불효 자식으로서 죄송합니다만 부탁합니다.(후략)

 

고씨는 “형무소 밖 사람들도 죽 먹기 조차 어려웠는데 그 안에서야 오죽 했겠냐”며 엽서에 언급된 약은 본인이 국민학교 때 우체국 애월 지국서 보냈다고 덧붙였다. 이어 “약을 받았다는 내용을 포함해 엽서가 두어 번 더 왔다”며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전했다. 

그의 형 고창만씨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행방불명됐다. 하지만 가족들은 누렇게 바랜 엽서를 간직하며 지내왔다. 그는 “우리 부모님네는 (형님이) 북한으로 가든 육지서 숨어있든 살아있는 줄만 알았다”며 “그러다 6·25가 끝난 몇 년 후에 같은 형무소에서 (다른 죄로 잡혀)있다 출소한 사람들이 ‘(형님은) 살았으리라고 볼 수 없다.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해 다신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실제로 1960년 6월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단(조사단)에 제출된 대구형무소 자료에 의하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제주 출신 100명 이상이 학살됐다. 고창만씨의 경우 학살터는 대구 가창골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은 댐 건설로 수몰됐다. 45m 수심의 물만이 얄궂게 흐를 뿐이다.

고씨는 “대구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유족들은 단념하고 있다”며 “이젠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다”고 읊조렸다. 그는 “해봐야 못 찾을 게 뻔한데 뭐 하러 하겠냐”며 유해 발굴을 위한 DNA 채혈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4·3행방불명희생자협회 양성홍 회장. ⓒ투데이신문
제주4·3평화공원에서 4·3행방불명희생자협회 양성홍 회장. ⓒ투데이신문

“연좌제 묶여 육사 꿈 포기”...양성홍씨 이야기

양성홍씨는 제주시 연동 섯동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희생자 양천종씨와 양두량씨가 각각 할아버지, 아버지다. 할아버지는 광주형무소에서, 아버지는 대전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를 둘러보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모르고 살았어” 

그는 “(아버지는) 일본군으로 끌려갔다가 해방돼 들어와 1947년도에 경찰 시험을 봐 합격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큰외삼촌이 3·1절 기념식 관련 주동자로 구속되는 것을 본 아버지는 “이런 세상에 내가 어떻게 경찰을 하겠냐”는 탄식을 했다고 전했다. 

그의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은 각각 정뜨르 비행장 학살과 한라산 금족령 학살로 희생됐다.

기자와 함께 제주4·3평화공원을 둘러보던 그는 형무소에서 온 엽서 내용을 새긴 비석을 보자 문득 “아버지한테 편지 같은 게 왔는데 그때는 연좌제 때문에 혹시나 해서 어머니가 정리하셨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 얘기 들어보니까 아버지가 어떤 책을 사서 보내라니 책을 사 보내주고 옷 2벌을 했는데 한 벌은 (아버지께) 전달됐고 나머지 하나는 형무소 교도관에 뺏겼다”며 “(안에서) 하도 못 먹으니 꿀을 보냈는데 그 또한 전해지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1999년에 대전형무소에 있던 300명의 수형인이 학살됐다는 신문 기사를 통해 아버지의 부고를 접했다. 그리고는 기사를 스크랩해 수형인들의 유족을 일일이 찾아가 그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육사)의 꿈을 연좌제로 인해 포기한 그에게 위원회 활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나는 연좌제 피해를 엄청 본 사람이다. 꼼짝달싹 못 하니까 우리 애들까지도 피해가 갈까 봐 연좌제 폐지 이후에도 쉬이 활동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2000년도에 아버지가 학살된 곳으로 추정되는 대전에 찾아갔다. 

“골령골이라는 데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농사일을 하는데 호미에 유해들이 그냥 올라오고 있더라고. 그걸 보니까 진짜 눈물이 팡팡 쏟아지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 뼈인지도 모르거든. 흙이 시신인지도 모르지. 제주 사람들은, 그 자녀들은 전부 나 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2003년 4·3 유족회 대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시작한 그는 2022년부터 행방불명인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유족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행방불명희생자인 아버지의 표석을 매만지는 양성홍 씨의 모습. 옷깃에는 제주 4·3을 상징하는 동백꽃 배지가 달려 있다. ⓒ투데이신문
행방불명희생자인 아버지의 표석을 매만지는 양성홍 씨의 모습. 옷깃에는 제주 4·3을 상징하는 동백꽃 배지가 달려 있다. ⓒ투데이신문

아직도 이어지는 피해, 삶의 족쇄가 돼버려

제주4·3은 3만여 명의 사망자와 가옥 4만여 채의 소실, 중산간의 폐허화 등을 가져왔다. 피해는 단순히 이에 그치지 않고 족쇄로 이어졌다.

연좌제가 유가족들을 얽어맸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사건 과정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는 유가족들의 사회 활동을 제약할 권리를 얻은 양 굴었다. 공무원 임용시험이나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 국·공·사기업의 취직 또는 승진, 국내외 여행 및 출입국 과정은 물론이고 걸핏하면 신원조회를 하거나 일상생활까지 감시하는 데 이르렀다. 불현듯 문을 두드려 “지나가다 들렀어. 요즘은 정신 차리고 사나 해서”하는 식이었다. 연좌제는 2007년 들어 폐지됐다. 

“밤에는 무장대한테 시달리고 낮에는 경찰한테 시달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거의 (해결의) 마무리 단계 아닌가요?”

4·3의 이야기를 들으러 제주공항에서 탄 택시에서 제주도민 택시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상규명 운동의 결과인 진상조사보고서와 ‘4·3 특별법’ 발의, 대통령의 사과 등은 분명한 해결의 징표다. 하지만 당시 수형됐던 이들의 ‘빨간 줄’은 여전히 상당수 남아있으며, 좌우 이념 간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대한민국을 종횡으로 가르고 있다. 제주 4·3 제75주기에는 자칭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가 나타나 훼방을 놓기도 했다. 

핏빛 눈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오늘도 제주에는 붉은 동백이 떨어진다.

행방불명인 표석 앞에 놓인 동백꽃의 모습. ⓒ투데이신문
행방불명인 표석 앞에 놓인 동백꽃의 모습. ⓒ투데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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