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경찰에 신고 안했냐”…성추행 피해 증언 나선 아동에 ‘피해자다움’ 따진 법원
“왜 경찰에 신고 안했냐”…성추행 피해 증언 나선 아동에 ‘피해자다움’ 따진 법원
  • 김태규 기자
  • 승인 2019.10.29 17: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해자 L 교감, 1심서 무죄…檢 항소로 2심 진행 중
4년 만에 증언 나선 피해아동 “죽을 힘 다해 큰 용기내”
재판부, 피해아동에 “피해 후 매일 등교 했느냐” 질문
피해아동 母 “성인지 감수성 결여된 질문” 비판
충남 천안 C 초등학교 L 교감 성추행 사건 피해아동 순수(가명) 양이 지난 11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엄벌탄원서. 사진제공 = 순수 양 어머니 손모씨
충남 천안 C 초등학교 L 교감 성추행 사건 피해아동 순수(가명) 양이 지난 11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엄벌탄원서. 사진제공 = 순수 양 어머니 손모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지난해 세간의 비난을 받았던 천안 C 초등학교 교감 성추행 사건의 피해 아동이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를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가 피해아동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질문을 하는 등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됐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1일 대전 서구 대전고등법원에서 비공개 진행된 천안 C 초등학교 L 교감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세미만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 항소심 3차 공판에서 피해 아동인 순수(가명) 양이 직접 법정에 출석해 자신의 피해를 증언했다.

미성년자인 성범죄 피해자가 법정에서 직접 증언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피해 아동에 대한 2차 가해와 트라우마 등을 염려해 검찰 조사 단계의 진술을 촬영하고 이를 피해자 증언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부에서 순수 양의 법정 증언을 요구했을 때, 순수양의 어머니 손모씨는 ‘법정 증언은 검찰 조사 녹화로 대체할 수 있지 않느냐’며 거절하려 했다. 순수 양에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성범죄 피해를 겪은 뒤 4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고 있는 순수 양은 용기를 내 증언에 나섰다.

대전 서구 대전고등법원 ⓒ투데이신문
대전 서구 대전고등법원 ⓒ투데이신문

피해아동 母 “2차 피해 염려돼 말렸으나 본인 의지 강해”

손씨는 “순수에게 법정 증언에 대해서 얘기했더니 ‘4년 만에 판사님이 내 얘기를 듣겠다고 불러주셨다. 꼭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겠다’며 나오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순수 양은 자신의 피해사실을 직접 말하고 사실을 알리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뿐만 아니라 순수 양은 이날 증언에 앞서 재판부에 L 교감의 엄벌을 요청하는 자필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순수 양은 탄원서에서 “전혀 본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성추행을 당한 수치스러운 일에 대해 다시 말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창피하고 끔찍하다”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큰 용기를 내서 진실을 밝히려고 나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늘 저를 불러주셔서 진실을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며 “절 성추행한 L 교감을 꼭 감옥에 보내 평생 반성하고, 다신 제 온 몸을 강제로 성추행하지 못하게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손씨에 따르면 비공개로 진행된 재판에서 순수 양은 법정이 아닌 별도의 증언실에서 중계장치를 통해 증언했다. 피고인인 L 교감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재판부, 피해아동에 ‘성인지 감수성’ 결여된 질문

L 교감은 C 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하던 지난 2015년 10월부터 12월까지 따돌림 등 학교폭력 피해를 호소하던 당시 5학년 순수 양을 상담해주겠다며 불러내 수차례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순수 양은 당시 자신이 당한 피해를 알림장, 일기장, 메모지 등에 기록하고 이와 함께 ‘수치심이 들고 무섭다’, ‘내가 엄마께 (피해사실을) 알리고 경찰서에 신고하면 교감선생님이 날 죽일지도 모른다’는 등 두려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손씨는 당시 L 교감의 범행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2016년 6~7월경 학교폭력 재심위원회를 열기 위한 증거를 찾던 중 변호사 등의 조언에 따라 순수 양의 소지품을 살펴보던 중 순수 양이 남긴 기록을 보고 L 교감의 범행을 알게 됐다.

L 교감의 범행이 반복되자 순수 양은 자신이 당한 피해를 녹음으로 남기기도 했다. 순수 양의 메모에는 ‘내가 혹시 죽으면 이 녹음기가 증거가 돼 무섭고 징그러운 ’뱀‘ 교감선생님(순수 양은 자신을 만지는 L 교감이 뱀처럼 징그럽고 끔찍했다며 뱀 교감이라고 표현했다)이 감옥에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5월 15일 1심 선고공판에서는 L 교감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피해자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과장하거나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판결 이후 1심 재판부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과 증거를 무시하는 등 시민의 법 상식과 부합하지 않는 판결이라며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항소심도 이 같은 비판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손씨에 따르면 순수 양의 증인신문에서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질문을 했다.

손씨는 “재판부가 ‘왜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겨울방학이 시작하기 전까지 피해를 당했는데 개학하고 학교를 갈 생각이 났느냐’는 등 ‘피해자다움’을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고 비판했다. 자신의 피해를 기억해내 증언하는 것도 힘든 순수 양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檢, 피해자 측 진정에 뒤늦은 증거 제출

재판부의 질문 외에 검사 측의 증거 제출에도 문제가 있었다. 순수 양이 법정에서 증언을 하던 날, 항소심 재판부는 검사 측에 참고자료로 제출된 조모 경사의 녹음파일을 증거로 제출하라고 말했다. 참고자료일 경우 재판부가 녹음파일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증거자료로 내달라는 것이다.

재판부가 요구한 녹음파일에는 L 교감이 조 경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의 범행을 인정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L 교감의 범행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형사소송에서 당사자는 검사와 피고인이 되기 때문에 판사는 당사자가 낸 증거를 증거조사 절차를 거쳐 증거 채택을 해야만 판사가 이를 볼 수 있다. 홍 변호사는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증거의 성격이 있는 참고자료를 제출할 경우 판사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며 “증거조사를 거친 적법한 증거만 판사가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상의 증거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아무 증거나 참고자료로 마구 올려서 피고인 또는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손씨에 따르면 그간 재판부는 이에 대해 수차례 권고했으나 증거 제출은 지연됐다. 손씨는 “검사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피해자 측의 증거들을 제출하지 않아 피해자가 불이익과 차별을 받는다면 너무나도 억울하고 기막힌 일”이라며 검찰에 증거 제출 진정을 냈다.

홍 변호사에 따르면 검찰은 오는 30일 열리는 결심공판을 이틀 앞둔 지난 28일 조 경사가 참고자료로 제출한 녹취파일이 담긴 USB를 증거로 제출한 상태다. 결심공판만을 남긴 항소심에서 ‘피해자다움’을 요구했다는 비판을 받은 2심 재판부가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1심 판결과 비교해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한 판결을 내릴지 관심이 몰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