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시동생까지…돌봄노동의 굴레
“엄마 역할은 자녀 잘 살게 하는 것”
“내가 힘들어도 자식 잘 되면 그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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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정형화된 모성애는 아주 오래 전부터 형성돼 전해져왔다. 그것이 마치 정답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통념적인 모성애와는 다른 어머니상(像)이 점차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정에 붙어 가사노동만을 하는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일을 하는 엄마들이 많아진 것이다.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시부모, 시댁 식구들을 돌보는 일까지 모두 엄마가 감당하던 어머니상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 돌봄노동,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던 지금의 할머니 세대는 변화하고 있는 어머니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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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 공부위해 노동시장 뛰어들어

서울 공덕동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강옥순(가명)씨는 1940년대 후반에 인천에서 태어나 1970년대 초반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강씨의 자녀들은 결혼해 자녀들을 키우고 있다. 강씨는 자녀들이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을 ‘기적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어렵게 살면서 자녀들을 뒷바라지 했는데, 그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배운 것도 없이 애들 공부시킨다고 돈만 열심히 벌었지. 그래도 그 덕에 좋은 곳에 취업해서 가정 꾸리고 잘 살고 있어. 그때는 애들 대학 어떻게 보내나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다행이지. 기적 같은 일이에요.”

강씨는 초등학교(국민학교) 졸업 후 집이 서울로 이사하게 되면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가게를 운영한 강씨의 아버지는 아들인 막냇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언니와 강씨에게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강요를 한 건 아니지만, 우리 집이 자식들 모두 공부시킬 만큼 넉넉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언니랑 나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가서 일을 했지. 그때는 아들만 공부시키는 집이 많았어. 딸들이야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이고, 아들이 잘 되면 집안이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가족들의 희생으로 공부를 한 동생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 1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게를 운영하기 어려워졌고, 동생은 휴학한 뒤 취업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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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시작된 가사·돌봄노동

강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후 중매로 결혼을 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남편은 결혼과 함께 시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를 이어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상황이었으며, 시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돼 가게를 운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아버님이 동네에서 작은 양품점을 운영하셨는데, 건강이 안 좋아지시면서 가게를 남편한테 넘겨주셨지. 천식이랑 고혈압이 있으셨어. 그래서 결혼하면서부터는 아버님 병간호 하고, 시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없이 보냈지.”

강씨는 결혼 후 온종일 가사노동에 매달려야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집 안에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빨래, 설거지, 청소, 식사준비 등은 물론이고 당시 중·고등학생이던 시동생 2명의 뒷바라지는 물론 시아버지 병간호로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편찮으시고, 남편은 가게에서 일하고, 시동생들은 아직 학생이니까 나 밖에 집안일 할 사람이 더 있나. 또 그때는 여자니까 당연히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결혼한 이듬해인 1971년 아들을, 그로부터 3년 후인 1974년 딸을 낳은 강씨는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특별히 육아를 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병간호에 시동생 도시락 챙겨주고 빨래하고 하다보면 애들 볼 시간이 없어. 애들은 밥 먹일 때, 기저귀 갈아줄 때, 아니면 재울 때 정도나 보는 거지. 다행히 시동생들이 애를 귀여워해서 잘 돌봐줬어.”

시동생들이 공부를 마친 뒤 취직·결혼해 분가하고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집안일 부담이 조금 줄었다고 한다.

“시동생들 분가하고 나서는 그래도 신경 쓸게 좀 줄었지. 애들도 어느 정도 커서 엄마를 도와주고 하니까. 아버님 건강이 악화되면서는 병간호에 집중하다가 큰애 중학교 들어갈 때쯤 아버님이 돌아가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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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표였던 ‘자녀 교육’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강씨는 남편의 가게 일을 도우면서 자녀 교육에 집중했다고 한다. 본인이 많이 배우지 못한 탓에 자녀들은 반드시 대학 공부까지 시키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하도 공부하라고 해서 애들은 좀 짜증이 났을 거야. 그래도 많이 배워야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강요를 좀 했지. 내가 배움이 짧았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애들은 대학을 졸업시키려고 했지. 애들 등록금 마련한다고 고생 많이 했어.”

강씨는 자녀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가게 일을 도우면서도 식당에서 일을 돕거나, 방문판매 일을 하기도 했다. 자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강씨는 스스로 자녀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고 했다. 자녀 취학 전에는 집안일 때문에, 취학 후에는 돈을 버느라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에 땅이나 무슨 재산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았거든. 그래서 대학 등록금 마련한다고 애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열심히 모았어. 그래도 큰애가 대학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아가지고 둘째 등록금을 또 모아둘 수가 있었지.”

강씨 부부는 아들이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 가게를 접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은 버스 운전을, 강씨는 음식점 등에서 일을 시작했다.

“가게가 잘 안 돼서 애들 졸업할 때쯤 접었어. 그리고 남편은 버스운전을 하고 나는 음식점에서 일을 했지. 다행히 애들이 취업을 잘 했어. 큰애는 졸업하면서 은행에 취직하고 작은 애는 출판사에 들어갔지. 둘 다 취업이 잘 돼서 ‘공부시키길 잘 했다’ 싶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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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에게 일 하라고 권유…전업주부 딸 안쓰러워

1997년 결혼한 강씨의 아들은 그해 아들을 낳고 2년 뒤인 1999년 딸을 낳았다. 아들과 가까운 동네에 사는 강씨는 일을 하는 며느리를 대신해 손주들을 돌보기도 했다.

“며느리가 영어를 잘 하거든. 학습지 강사를 했어. 애들 집 찾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거 있잖아. 지금은 학원 하고.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라 애들 가르치러 갈 시간 되면 내가 가서 손주들 밥 챙겨주고 씻기고 했지.”

강씨는 며느리에게 전업주부보다는 일을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우리 딸을 생각하니까 집안일만 하는 것보다는 자기 일을 계속 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자기가 정한 목표가 있었을 텐데, 결혼하면서 그걸 다 버려두는 게 안쓰럽기도 했고. 또 학습지 교사는 그래도 애들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게 아니니까. 내가 도와줄 테니 일을 계속 해보라고 했지.”

하지만 며느리와 달리 1999년 결혼한 강씨의 딸은 전업주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졸업을 하면서 출판사에 취업을 했지만, 결혼 후 출산을 하면서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우리 딸이 2001년에 딸 쌍둥이를 낳았어. 한꺼번에 둘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 내가 가까이 살면 좀 도와주겠는데, 사위 직장 때문에 수원으로 이사를 가서 자주 못 갔어.”

강씨는 딸이 전업주부로 산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며느리는 자기 일을 계속 하는데 우리 딸은 그렇지 않으니까 좀 안타깝기도 해. 지 나름대로 목표가 있었을 텐데. 물론 며느리도 일 하면서 애들 키우느라 고생했지만, 그래도 자기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는 게 좋아 보여. 우리 딸은 애들 다 커서 대학 가고 하니까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걸 찾더라고. 카페를 하나 내려고 알아보는 것 같던데.”

강씨는 손주들을 돌보면서 자녀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내가 우리 애들한테 해 주지 못한 걸 손주들한테 해 주려고 노력을 했지. 나는 우리 애들 어릴 때 못 놀아줬으니까. 동네 놀이터에 데리고 가서 놀아주고, 유원지 같은 데도 데리고 가고 그랬어. 우리 애들 어릴 때는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 한 거 같아서 항상 마음에 빚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손주들한테는 더 열심히 했던 거 같아.”

강씨는 스스로를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아버지 봉양과 시동생 뒷바라지, 집안일에 치여 자녀들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애들 어릴 때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게 항상 마음에 걸려. 애들이야 나한테는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고, 잘 키워줬다고 하지만 부모 마음은 항상 못 해준 게 더 생각나고 미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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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없이 살아 온 인생…남은 목표는 손주들 잘 되는 것

강씨는 자녀들이 어릴 때 자신이 집안일을 도맡아 한 것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아버님 병수발을 아들들이 아닌 내가 다 했잖아. 또 집안일도 내가 다 해야 했고. 집안에 여자가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시동생이야 학생이니까 어려서 그렇다고 쳐도, 남편은 왜 하나도 돕지 않았나 싶어. 남편이 조금만 신겨써 줬어도 애들이랑 더 친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남편은 집에 들어와서 애들이랑 잠깐 놀아주고 아이들한테 ‘좋은 아빠’로 인식되고, 나는 집안일에 치여서 애들 혼내고 공부만 시키는 엄마가 되고. 물론 애들이 커가면서 엄마 상황을 이해해주고, 친밀하게 여기지만, 더 어릴 때 그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동시에 강씨는 자신이 자녀들을 잘 키워냈다고 여기는 듯했다.

“애들 공부를 시킨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지. 딸은 전업주부로 살지만, 그래도 좋은 데 취업했었고 그 덕에 남편 잘 만나서 잘 살고 있으니까. 아들은 은행 그만 두고 자기 사업 하는데, 잘 되는 거 같더라고. 공부를 시켜서 잘들 살고 있으니 그거 하나만큼은 정말 잘한 거라고 생각해.”

강씨는 꿈을 갖고 살지 못했다. 청소년기에는 동생 공부 시키는 것, 성인이 돼서는 자녀 공부시키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다. 그리고 자녀가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손주들이 잘 되는 것을 목표로 살고 있었다.

“손주들 대학 입학할 때 등록금을 보태줬어. 앞으로도 등록금에 보태라고 연금 나오는 거 다 모아두고 있어. 손주들 취업 잘 되고 결혼 잘 하는 게 내 남은 목표야.”

그는 엄마의 역할을 ‘자녀가 잘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자녀들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면서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평가하는 듯 했다.

“모든 부모들은 자녀가 잘 되길 바라잖아. 우리 애들은 엄청 부자는 아니더라도, 모자라지 않게 잘 생활하고 있으니까 이만하면 잘 키웠다고 생각해야지.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인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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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일 하려면 아빠가 잘 도와야지”

강씨의 가정은 그의 희생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남편은 가게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자신의 몫’을 다 했다고 여기지만,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등 강씨의 몫은 끝나지 않고 반복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남편이랑 같이 집안일도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때는 남자가 집안일 하는 건 상상도 못했으니까. 애들 아빠에 비해서 내가 너무 희생한 게 아닌가 싶어.(웃음) 그래도 애들이 잘 커줬으니 그걸로 다 보상받은 기분이야. 엄마가 다 그렇지 뭐. 내가 힘들었어도 자식이 잘 되면 그만이니까.”

강씨는 한국사회가 ‘표준’으로 생각하는 모성의 이미지와 닮아있었다. 자녀와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꿈은 포기한 채 모든 노력을 쏟는 것이다.

그러나 강씨가 말한 것처럼 점차 세대가 변화해 가사노동을 함께 하고, 엄마들도 자신의 꿈과 목표를 향해 일을 이어갈 수 있는 사회에서 이 같은 모성애는 더 이상 표준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집안일이나 애 키우는 걸 다 하다보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알 수가 없어. 나도 그저 자식들만 보고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자식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나면 내 목표가 사라지는 거야. 이제는 엄마들도 자기 꿈을 갖고 사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됐잖아. 엄마가 자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아빠가 집안일이든 애 키우는 일이든 잘 도와줘야 하고. 우리 세대 때 생각으로는 이제 살 수가 없지. 세상이 변했으니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강씨의 삶에서 드러나듯 한국사회는 엄마에게 희생을 강요해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엄마는 ‘꿈이 없는’ 존재가 됐다.

엄마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시대는 사라져야 하고, 점차 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엄마 한 사람의 헌신과 희생으로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엄마에게 너무 가혹하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꿈을 갖고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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