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실감 있게 살자. 좀!”
시끌벅적한 교실 안. 제이미를 향한 헷지 선생님의 말 한마디는 어느새 메아리가 되어 내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과연 현실감 있게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걸까. 그런데 이 어려운 질문에 제이미가 놀랍도록 통쾌한 대답을 보여준다. 열쇠는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다.
2020년 최고의 기대작이자 웨스트엔드 히트작으로 손꼽혔던 뮤지컬 ‘제이미((원제 : Everybody’s Talking About Jamie)’가 초연으로 확실한 존재감을 알렸다.
지난 7월 4일에 시작해 오는 9월 11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될 뮤지컬 ‘제이미’는 2011년 영국 BBC에서 방영된 열일곱 살 고등학생 제이미 캠벨의 실제 이야기가 담긴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2017년 영국 셰필드의 한 극장에서 먼저 공연됐다가 뜨거운 인기와 입소문 덕분에 같은 해 11월 웨스트엔드에 입성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영국 이외의 국가에서 공연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이번 한국 초연에 자연스럽게 ‘아시아 최초 공연’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붙었다. 레플리카 방식으로 제작된 ‘제이미’가 원작의 매력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색다른 신선함을 지닌 데에는 오리지널 창작진과 심설인 연출, 김문정 음악감독, 이현정 안무감독 등의 노력이 뒷받침됐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무대 스타일과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스트리트 댄스, 그리고 흥겨운 리듬이 돋보이는 팝 음악은 뮤지컬 ‘제이미’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완성하기 충분하다.
뮤지컬 ‘제이미’는 드래그 퀸이 되고 싶은 주인공 제이미의 성장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아냈다. 어려서부터 여자 옷을 즐겨 입고, 자신이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좀 다르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소년은 이를 숨기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택한다. 같은 반 친구조차 아무렇지 않게 가슴 아픈 말들로 상처를 주지만, 늘 밝게 대응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제이미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차가운 시선, 과거의 상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벽돌로 빼곡히 쌓인 담을 넘어서길 주저하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그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가족과 무슬림 친구 프리티 덕분에 ‘진짜 꿈’을 확인한 제이미는 세상의 편견과 맞서겠다며 엄마 마가렛이 제안한 대로 졸업 파티 때 드레스를 입고 가기로 마음먹는다. 파티 준비를 계기로 알게 된 전설적인 드래그 퀸, 휴고 아저씨와의 우정도 제이미가 진정한 스타로 발돋움할 원동력이 된다.
작품은 묵직한 감동 역시 놓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홀로 제이미를 키우며 늘 아들의 도전을 격려해 온 마가렛의 진심은 뭉클하면서도 깊숙하게 전해진다. 비록 제이미는 엄마의 눈물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관객들은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울음을 삼키게 된다. 실제로 2막이 진행되는 동안 객석 곳곳에서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무대를 향한 모든 이들의 마음은 아마도 똑 같았으리라. 사랑하는 제이미가 있었기에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던 마가렛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울림을 주었다.
이번 초연 무대의 타이틀 롤을 맡은 ‘제1대 제이미’ 조권, 신주협, MJ, 렌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색다른 제이미를 표현한다. 그중에서도 조권의 제이미는 특유의 긍정 에너지를 아낌없이 방출하며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한다. 남다른 끼와 넘치는 재능을 무대 위로 마음껏 펼치는 모습에 배우가 느낀 행복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몰입감은 배가된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굽 높은 구두를 신고도 가볍게 무대를 누비면서, 놀라운 가창력으로 시선을 압도한 조권은 ‘제이미’가 가진 이미지를 자신의 캐릭터로 탄탄히 구축했다. 아마도 앞으로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권제이미’를 자연스레 같이 떠올리게 되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여기에 제이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마가렛 역 최정원이 따뜻한 모성애로 감성을 자극하며 ‘요즘 세대’ 엄마로서의 멋진 면모를 선보였고, 재치 있는 입담과 든든한 후원으로 내내 웃음을 유발하는 휴고 역 최호중이 함께해 완벽한 하모니를 완성했다.
독특하고 감각적인 넘버도 인상적이다. 절도 있는 박자와 세련된 리듬이 잘 어우러진 ‘Work of Art’, 하룻밤 사이 스타가 된 제이미 이야기를 담은 ‘Everybody’s Talking About Jamie’는 앙상블의 춤과 어우러져 더욱 멋스럽다. 휴고의 과거사가 담긴 ‘The Legend of Loco Chanelle’도 재미있다. 이 밖에 생일날 빨간 하이힐을 선물 받고 행복해하면서도 정작 신고 나서길 망설이는 제이미에게 프리티가 용기를 북돋아 주며 함께 부른 ‘Spotlight’과 마가렛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He’s My Boy’ 등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토록 풍성한 ‘제이미’지만 쉽고 빠른 전개에 비해 결말이 다소 약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이미의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꽉 닫힌 마무리를 피해 간 덕분에 훨씬 현실감이 살아났고, 작품을 본 관객들이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며 응원하게 만드는 효과를 유도한 느낌이다.
돌이켜보면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 대부분은 세상의 편견과 냉정한 현실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맞서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나는 완전 소중하다’ 외치며 차근차근 성장해가는 제이미의 모습에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삶의 중심이 자기에게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제는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작은 실천이 먼저다. 목적 없는 차별과 혐오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 타인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제이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때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기대가 된다. 뮤지컬 ‘제이미’가 그 변화의 선두에 함께 하길, 그래서 이 세상의 많은 제이미들이 당당히 설 수 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