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웃을 일이 없다가 최근 간만에 웃은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놀랍고 당황해서 나온 헛웃음이다.

첫번째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다. 그는 발언의 이유로 “법무장관은 정치인이고, 정무직 공무원이다. 총장이 장관의 부하라면 정치적 중립과 거리가 멀다”라고 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윤 총장의 발언은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헌법의 구현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헌법을 제정하는 건 주권자인 국민이므로, 각 정당은 자신들이 헌법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는 적임자라는 걸 국민에게 호소하며 경쟁한다. 즉 민주주의 정치는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최선이 무엇이냐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선거는 그 과정의 일부다. 우리 국민은 선거를 통해 누가 어떻게 나라를 운영할지에 관한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고 주권을 위임한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가 국정을 펼치는 건 헌법정신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그 산하 공무원들의 소명은 주권을 가진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선거로 취임하거나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된 정무직 공무원도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테면 국민의 뜻을 받드는 마름, 부하에 다름 아니다.

검찰총장도 예외일 수 없다. 비유하자면 검찰총장은 국민의 부하의 부하의 부하쯤 된다. 검찰총장이 법무장관의 부하여야 하는 것은 법무장관이 국민의 부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하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건 주권 위임의 계통 사슬을 끊어버리는 행위다. 이러면 검찰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주권 주체가 된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란 헌법정신을 벼리라는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라는 이야기이지, 같은 의무를 지닌 정무직 공무원을 무작정 배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통령과 같은 정무직 공무원의 정파적 신념은 국민의 방향 표시등과 같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정파성의 전개가 헌법에 어긋날 때 뿐이다.

따라서 윤 총장이 할 수 있는 항명의 말은 ‘장관의 지시가 헌법에 어긋난다’ 정도를 넘어설 수 없다. 이를 넘어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하면 정치인의 정파적 신념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결정과 맺어진 관계를 무력화하는 위헌적 발언이다. 우리 헌법체계와 제도에 대한 해석의 정당성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여길 때에나 가능한 말이다.

이러한 인식은 같은 자리에서 나온 ‘대검찰청 조직은 검찰총장을 보좌하기 위한 참모조직’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검찰청법 어디에도 그런 조항은 없다. 이 법 제12조에서 검찰총장은 대검찰청의 사무를 총괄하고 검찰청 공무원을 지휘 감독한다고만 규정한다.

대검찰청의 조직과 시설은 국민의 헌법 실현 요구를 받들기 위해 존재한다. 검찰총장은 그러한 국민의 요구를 검찰청이 원활히 수행하도록 임명한 관리자다. 그의 발언을 회사에 빗대자면 개발팀은 회사가 아닌 개발팀장을 보좌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개그를 한 걸까.

정부 조직법상 특정 공무원 한 명만을 보좌하기 위해 조직의 실질과 시설이 존재하는 경우는 하나뿐이다. 집무실, 관저, 대통령 비서실, 국가 안보실, 대통령 경호처를 주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청와대로 1’에 모아 놓은 청와대다. 윤 총장의 말대로라면 검찰총장을 검통령이라고 불러야 한다.

실소를 짓게 만든 건 검찰 총장만이 아니다. 정경심 교수 공판에서 나온 검사측 구형 의견 전문을 보도한 기사를 읽었을 때도 비슷했다.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검찰수사와 관련된 정 교수의 재판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장들이 많다. 재판부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사건의 실체는 내 판단 밖의 영역이다. 실체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이다. 그 시각으로부터 각자 주장의 정당성에 관한 논리를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검찰의 구형 의견서는 기대와 사뭇 달랐다. 의견서의 절반 가량이 수사과정에서 검찰에게 쏟아진 비난을 변론하는 내용이었다. 왜 이 사건을 국정농단과 유사한 사례로 보는지 그 시각의 근거를 조목조목 밝혀야 하는 문장은 간소한 대신, 자신들의 수사와 기소가 불의하지 않다는 주장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태도가 문장 내내 이어졌다.

이미 공판 과정에서 혐의 입증을 위한 많은 노력을 했을 테니 몇 장에 불과한 서류라도 질량은 묵직할 수 있는데, 국정농단에 비유하며 포문을 연 이야기가 엘리트의 해이를 비판하는 용두사미를 넘지 못하는 건 어리둥절했다. 검찰이 주장하는 사건의 심각성과 그렇게 인식하는 시각의 논리적 고리가 꽤 약했다. 검찰의 기소 목적은 국정농단 혐의의 입증인가 아니면 엘리트의 범죄혐의에 대한 비판인가. 헛웃음이 터졌다. 법리상의 의미규정을 이렇게 임의로 갖다 붙여도 되나.

특히 논란 초기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압도적으로 해소할 수 없음에도 시민사회의 진실규명 요구에 직무상 수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주장이 행간에 박혀 있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시키니까 할 뿐이라는 변명이 왜 잘못됐는지를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지적한 한나 아렌트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마치 역사의 심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법정에 섰을 때 퇴로를 마련하려는 문서 같았다.

희한한 장면은 더 있다. 며칠 전 추미애 법무장관은 검찰이 판사를 사찰했다는 의혹을 발표하면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정지를 요청했다. 검찰이 주요 재판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판사의 성향이나 소속 모임 등의 개인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일각의 주장처럼 추 장관의 지휘가 과도한지 여부를 떠나 이에 대응하는 검찰의 말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해당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성상욱 검사는 반박글에서 ‘공소유지를 위해 수집되는 정보도 수사정보의 일환’이라며 직무범위를 벗어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검찰청 홈페이지에서 수사란 ‘형벌법규를 위반한 범인을 발견·확보하고 증거를 수집·보전하며 범죄의 혐의 유무를 명백히 하여 공소의 제기 및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수사기관의 일체의 활동’이라고 설명한다. 이 문장에서 공소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수사의 범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문장대로라면 검찰은 공소유지를 위해 ‘범인’과 ‘증거’와 ‘혐의’에 대해서 수사를 한다. 따라서 수사에 필요한 수사정보는 이 세 가지에만 국한된다. 검찰 스스로 밝힌 수사의 규정이 명료하므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사건과 무관한 판사의 정보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건 낱말 하나하나가 법적 효력에 복무하는 법조문을 임의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일반 국민의 국어상식과 법상식에도 맞지 않다. 실제로 성검사가 내세운 법적 근거인 대검찰청 사무분장 규정과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어디에도 판사의 정보가 수사정보에 포함된다는 내용은 없다. 검찰청법에도 없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나쁜 의도가 없었다며 해당보고서를 공개한 윤 총장 측이나 반박글을 올린 성 검사 모두 사찰의 의미를 왜곡한다는 점이다. 물론 범죄가 성립되려면 범행의 목적이 중요하겠지만, 사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권력의 동원 가능성 여부다.

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개인 간의 조사는 사찰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찰은 권력을 가진 조직이나 기관이 비대칭적으로 권력차를 보이는 개인을 조사하는 걸 일컫는다. 조직력과 권력을 갖춘 집단은 비록 상대를 해할 목적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하였더라도 언제든 그 정보를 일방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힘이 있기에 금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청처럼 수사와 기소의 권한이라는 막강한 현실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며 이를 위한 조직력을 갖춘 기관이 규정에 없는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건 위험하다. 심지어 해당 보고서는 조직도를 따라 검찰총장과 다른 부서에게도 공유됨으로써 조직적 행위가 됐다.

그 보고서는 엄밀히 말해 검사의 실무를 보조하는 용도의 부수적인 실무정보이지, 법조문 그대로의 수사와는 관련이 없는 정보다. 검사가 실무 차원에서 판사의 판결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싶어 하는 건 법조인이 아니더라도 이해는 간다. 차라리 검찰이 업무 현실을 이유로 법제도의 맹점을 보완하는 새 제도를 구상해 위법의 우려가 있는 환경을 개선하려 했다면 검찰개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지금까지 그대로 뒀단 말인가.

물론 이 모든 사례들이 실제로 부당하거나 위법한지는 나중에 결과를 보아야 하므로 단정할 순 없다. 법에 대한 검사들의 신념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다만 각기 다른 이 사례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검찰은 사과를 하지 않는다.

문대통령은 작년 조 전 장관 인사를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국민께 송구하다며 사과했다. 추 법무장관은 국감장과 이번 발표에서 지휘감독의 책임을 들어 국민에게 사과했다. 조 전 장관은 논란 초기 위법한 행위는 아니라는 말을 했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자 서둘러 국민에게 사과했다. 훗날 윤 총장에게 위법한 점이 확인되면 대통령은 임면권자로서 다시금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정기적으로 여론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들 정무직 공무원들의 사과가 위선이며 미흡하더라도, 어쨌든 그들은 사안이 불거지면 사과를 한다. 헌법을 따르라는 국민의 지시를 받는 부하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검찰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과를 하지 않는다.

내 눈에 검찰은 법리를 자기 편한대로 자유자재로 임의해석하고 휘두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거나 최소한 그런 의혹을 야기한 책임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는 집단이 검찰이다.

이렇게 완전무결하게 옳아서 도무지 사과할 게 없는 존재가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헛웃음이 나온다. 혹시 개그를 하는 걸까. 내 부하가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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