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도 카네, 요스 드 그뤼터·해럴드 타이스,  2020부산비엔날레 전시전경 ⓒ오정은 비평가
몬도 카네, 요스 드 그뤼터·해럴드 타이스, 2020부산비엔날레 전시전경 ⓒ오정은 비평가

동시대 미술의 전염

“흥미로운 시대를 살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

중국 고대의 어구로 알려져 있던 이 말은 사실, 상대방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현대의 중의적 표현이다. 이 가짜 격언을 주제로 차용한 《2019베니스비엔날레》(2019.05.11-2019.11.24)는 지금 여기, 현전하는 상태의 것들을 새삼 낯설게 지각시키며 미술이 그간 관습적으로 사유해온 거대 역사와 담론을 반추해 보도록 했다.

이는 ‘시대감각’으로 일컬어지는 정동의 소요를 넘어 그것의 작인이 된 반복적이며 공통된 현상의 출몰과 목격, 그 자체의 진위를 의심하는 일로 연결된다.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이 『레티컬 뮤지엄(Radical Museolosy)』(2013)에서 여러 미술사가의 견해를 인용해 드러낸 바처럼, 글로벌한 전체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다층의 시간성, 급기야 비동시적이며 허구적 면모의 새로운 ‘동시대’가 현시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또한 글로벌 예술의 위상과 도덕성의 메타포를 위시한 비엔날레가 처한 자가당착의 모순과 비판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선제적 제스처일 뿐일지도.

그해, 개최 58회를 맞은 《베니스비엔날레》는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출품한 <마리나(Sun&Sea)>에게 국가관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안겨줬다. 상설 국가관이 없어 정규 전시장으로부터 꽤 떨어져 있는 외곽의 해군박물관 건물을 임대한 리투아니아는 수상 소식이 알려진 이후 몰려든 인파로 연일 긴 대기줄을 세워야 했다. 베니스의 어느 좁은 골목길을 따라 빙 둘러진 줄의 일부가 되었다가 마침내의 기다림 끝에 볼 수 있었던 공간 내부는 가짜 모래로 채워진 인공해변으로 꾸며져 있었고, 이를 무대 삼아 한가로운 휴양객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조명이 대신한 햇살을 받으며 오페라풍의 노래를 불렀다. 관람객은 바닥이 뚫린 2층의 난간에 서서 그들 발 아래 펼쳐진 공연을 조감했고,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 같은 인류세 위기를 통찰한 진중한 음악과 가사가 주는 전율에 감동했다.

그리고 얼마 뒤 2020년, 전 세계는 팬데믹(pandemic)이라는 공포와 전환의 시대를 맞았다. 도시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신종 바이러스에 손상되고 마비되어갔다. <마리나>는 베니스 이후의 첫 해외 순회전시로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초청될 예정이었으나 국제교류의 난파로 결국 무산되었다. 전시를 보지 못한 관객은 아쉽게 됐지만, 당시 작품 촬영에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마리나>의 퍼포먼스 영상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몬도 카네(Mondo Cane; 개 같은 세상)>는 벨기에 출신의 듀오 작가 요스 드 그뤼터·해럴드 타이스(Jos de Gruyter & Harald Thys)가 같은 해 《베니스비엔날레》에 선보였던 작업으로, 국가관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깊은 인상을 남긴 키네틱-움직이는 인형-조각이다. 이는 이듬해 부산현대미술관 등지에서 열린 《2020부산비엔날레》(2020.9.5.-11.8.)에서도 선보여졌다.

같은 작가의 동일 작업이 서로 다른 장소와 코로나 전후라는 이종의 시간 배경을 경유해 설치되었고, 그 사이 작품에서 ‘감옥’이라는 설정은 사방에 창살을 가진 ‘케이지’로 변형되었다. 작가에 의하면 ‘케이지’는 권력의 감시 강도가 훨씬 증가된 공간으로 한층 더 잔인한 틀이며, 작가가 부산지역에 직접 방문하는 대신 미술관 전경 사진의 확인으로 결정한 전시 디스플레이 결과였다.1) 

감염 위험체로부터의 격리가 일상화된 미증유의 상황으로 하여금 감흥과 비평의 층위가 배가된 이 창살 안에는 음악가, 수리공, 방직공, 그리고 좀비, 훌리건, 광신자 등의 형상을 본뜬 실물크기 인형이 갇혀있다. 서로 간의 생김새도, 직업도, 살아가는 시대도 다르게 보이는 이들은 하나같이 얼 나가 있는 표정 외에는 명확한 서사나 연대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저마다 어떠한 기계적 음성과 삐걱거리는 움직임의 반복을 통해 이상한 유머와 기괴한 존재감만 혼선적으로 뒤엉켜 낼 뿐이다. 이 언캐니한 마네킹이 흥얼거리는 노래와 오르간 건반의 둔탁한 소리는 병적인 웅얼거림과 착란적인 소음이 되어 비엔날레가 열리는 미술관 로비 공간을 기묘하게 울렸다.

코로나가 초래한 암중모색의 일환으로 국내외 대개의 미술관과 행사가 그랬듯이 《부산비엔날레》 역시도 ‘온라인 전시관’을 운영했다. 웹페이지 접속을 통한 3D전시장에서 <몬도 카네>의 관람은 실제 관람환경에서는 불가능했던 것과 다르게, 케이지 안쪽의 시점에서도 이루어졌다.2) 360도 카메라가 촬영한 지점을 따라 관람자가 마우스 포인터를 이동하는데, 시선이 케이지 안팎을 통과하며 인형을 둘러보게끔 한 것이다. 성인의 평균 키보다 낮은 삼각대 높이와 카메라 렌즈가 낸 굴절 왜곡 때문에 인형은 더욱 크고 과장되어 보인다. 작가가 의도한 권력의 감시 강도는 평면 모니터로 압축된 가상공간 안에서 기존과 다른 수위와 감각으로 전이되고 변이될 수밖에 없다. 정지된 사진이 구현하지 못한 키네틱 조각의 동적 요소는 링크된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대체되었는데, 영상에 소리가 녹음되지 않은 이유로 온라인 관람객은 <몬도 카네>의 괴상한 소음 영역은 끝내 듣지 못한다. 상이한 장소와 매체, 환경으로 좌표값을 옮겨온 각각의 것들을 보고 나니 이제, 다음의 질문이 따라온다. 어떤 것이 원작에 봉인된 진짜(가짜)였을까? 기술은 예술을 어떻게 기록해 ‘전시’라는 이름의 틀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가(옳은가)? ‘동시대’를 수사하는 시간성은 무엇으로 다음의 ‘흥미로운 시대’를 향한 자신의 수명을 연장(복제)해 가고 있는가?

온라인 미술관의 침투

“화이트 큐브는 신체적 방문자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화이트 웹 페이지에서 디지털로 순환될 사진을 위한 무대 세트가 되었다”

예술작품의 전시를 위한 화이트 큐브는 더 이상 모더니즘이 내세운 순결주의의 이상만으로는 동시대의 무의식을 지배하지 못한다. 비디오와 프로젝션 설치, 그리고 연극무대의 어법을 빌린 퍼포먼스가 장치화한 블랙박스도 스마트폰과 인터넷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가상의 시공간 사이에서는 이내 자신을 열어젖히고 회색화되고 만다.

흑과 백이 점유해온 예술의 성역을 탈취한 관객은 벽에 걸린 액자와 좌대 위 조각에 대해 사진의 확대 기능을 빌어 작품과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조작 버튼을 통해 무빙 이미지의 재생속도와 시간, 볼륨을 스스로 조정하는가 하면, 확장된 시점과 무신체의 자유를 이용해 미술관을 드래그해 작품과 그 주변 공간을 터치하고 물색한다. 헤테로토피아의 산만한 무법자가 된 듯한 이 가상의 상태는 게임 세계를 유유자적 활보하는 아바타에 대응하고 있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가 <평행I-IV>(2012-2014)에서 포착한, 격자표시의 허공-매핑이 되지 않은 게임 상의 빈 공간-을 향해 달려가는 1인칭 플레이어의 이미지는 미술관이 오래도록 수호해온 규약을 깨뜨리려는 사람들의 잠재된 의식과 반항의 욕망에 나란히 평행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자체 기획전 《모두의 소장품》(2020.4.16.-6.14)과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관의 수집과 소장 기능에 관한 오랜 이야기에 새로운 가열을 시도했다. 정부의 방역지침으로 미술관이 휴관하던 중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렉처 퍼포먼스를 수행한 작가 김홍석의 <질문들-탐욕의 미술에 대해>를 보자. 엄밀하게는 원작자인 작가의 등장 없이 배우 김신록의 나레이션에 의해 라이브 스트리밍 방식으로 송출된 작업이기 때문에 매체의 구분과 복제의 가능성이 모호한 것이고, 이것이 파생한 의문점은 실로 방대한 질문 개수로 구성된 퍼포먼스 대본과도 여실히 공명하고 있다.

김홍석이 인용한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사례만 하더라도,4) 작품의 전시, 기록, 소장의 방법론을 구하는 작업은 동시대 미술의 빈틈에서 생산되어 미술사의 궤적을 교란해 마침내 자기 생존을 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임의 환경설정과 퀘스트를 수용하는 유저를 통해 게임 세계가 지속적으로 순행할 수 있는 것처럼, 티노 세갈의 ‘연출된 상황’은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동시대 미술의 지지기반이 합의했거나 적어도 합의 가능한 체계 내에서 예술로서의 생명을 인가받아왔다. 그리고 이것은-작가가 사진이나 도록과 같은 기록 행위를 거부했든 아니든- 대개 시각화된 지식으로 박제되어 수집되고, 전시를 통해 관람객의 지성과 정서에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온라인 미술관이라는, 심지어는 각종 SNS와 유튜브를 비롯해 무한급수적으로 성장하고 확장하는 가상매체가 자처하는 ‘전시’는 무엇을 예술로서 승인하고 있는가?

비체 쿠리거(Bice Curiger)는 『초역사적 미술관(The Transhistorical Museum)』(2018) 저술을 통해 미술관의 연대기적 수집과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며 다층적 컨텍스트와 공동체의 미술관 밑그림을 그린 바 있다. 이러한 미술관이 점차 헐겁게 할 역사적 시간 모형은 이를 고찰한 마르타 지에반스카(Marta Dziewanska)가 인용한 프로이드의 표현처럼, ‘자기 안의 낯선 것’, ‘아직은 의미를 얻지 못한 것에서 의미가 출현하는 영역’5)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미술관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허공(null)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 이 곳은 전환 사회의 테크놀로지와 그것이 변화시킬 예술의 패러다임이 곧 이접될 운명으로 놓여있다. 다가오는 운명은 그것이 침투할 성역의 범위를 한정짓지 않는다. 미술관은 디지털 콘텐츠 수집과 웹하드 소장을 위한 무시간적 무대 세트가 되어간다.6) 테리 스미스(Terry Smith)는 오늘날의 미술관이 미술에 관한 정보를 습득하고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는 참여자, 혹은 컨텐츠 공동 프로듀서, 내지는 자신의 필요에 맞춰 의미를 생산해 내는 제작자를 맞이하고 있다고 봤다.7)

그는 주요 미술관들이 소장품 구축과 관리, 기획전, 미술관 교육 서비스 등의 이벤트에 더해 가상의 미술관을 개발하는 선례에 주목한다. 물론 그는 이것이 물리적 미술관에 우선하거나 완벽한 보충의 역할을 한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온라인 미술관이 초역사·초국가적 미술관의 형태를 흡수해 급진적으로 질주하고, 특히 코로나 이후 재난상황을 대체하는 보완책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관람객이 새롭게 ‘연출된’ 상황 질서를 만들고 합의하는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할 것이다.

온라인 미술관의 관람객은 ‘약속된’ 개념미술과 뉴 미디어가 ‘허가한’ 행위예술의 후대로 태어나 미술의 참여 지형을 확장해 다원의 공동체 이상을 이루거나 그것의 유의미와 정당성을 탐욕하고, 생태 교란의 버그를 투척한 뒤 폭파된 스팩타클의 이미지를 캡처해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는 모두를 지칭한다. 이는 연중무휴의 미술관으로서, 과거이고 실시간이며 미래에서 온 알고리즘이 뒤섞인 시공간에 기대어 성장한다. 환영이기를 천명한 가상의 미술관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깨달음 이후 나타나는 신종의 술어에 흔쾌히 감염되어 어제의 몰락과 내일의 부흥에 관해 기술하고, 다가오는 숙주에 전이를 응하게 될 것이다.

초현실 감각의 스트리밍

“서드 라이프는 인간과 기계, 감성과 공학,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서로 융합해서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라이프스타일이 도래하는 세계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다. 물리적인 현실과 허구의 가상현실이 어울려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줄 제3의 현실, 즉 서드 라이프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8)

이동연은 ‘서드 라이프(Third Life)’라는 말로 동시대를 필사한다. 서드 라이프는 현실에서 물리적 삶을 사는 퍼스트 라이프(First Life), 가상현실에서 허구적 체험을 하는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와 구분되는, 현실과 가상이 서로 연계하고 결합된 하이퍼 초감각의 사회를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언택트 사회의 요구와 맞물려 미술관이 오픈소스 플랫폼을 접목해 ‘전시’ 기능을 유지·확장한 사례로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미술관이 촉구한 근래의 변화는 대부분 원안인 실재의 대안이거나 임시방편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태생적 한계를 포괄하지만, 생존의 방편이자 일상에 침윤될 공동의 감각 탐구라는 점에서 그 사례는 비중을 두고 살펴볼 만하다.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소장품》의 또 다른 연계프로그램에 참여한 젊은 작가 그룹, 배드 뉴 데이즈(Bad New Days)는 본래 퍼포먼스 장르로 계획한 <바늘 끝의 천사들>을 미술관 휴관 여건에 따라 영상 장르로 바꿔 실시간 송출해야 했다. 이 때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진행된 화면의 경과시간은 퍼스트 라이프의 시간대를 사는 시청자의 시간하고는 다른, 미리 촬영한 영상의 상영 지속시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은 동시간적 참여라는 착각을 경험하는데, 영상 창에 덧 띄워진 온라인 채팅창은 이 교란을 배가시킨다. 비슷한 시기 있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2020아시아 기획전: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2020.5.22.-8.23)의 연계 퍼포먼스로 이강승과 모어의 협업작 <모어(毛漁)>도 그와 같은 감각을 전유했다. 이 역시 미술관 휴관 중에 자체 유튜브 채널을 통한 라이브 스트리밍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인 드래그 공연이기도 한 이 영상은 한 대의 카메라가 드랙퀸 모어의 퍼포먼스를 쫓으며 총 45분 내내 편집 없이 지속됐다. 영상은 퍼포머가 스탭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물을 마시는 등의 인터미션 장면은 물론, 그가 걸어서 이동하는 텅 빈 미술관의 전시실과 복도, 휴게실 같은 시설도 여과 없이 비췄다.

퍼포머의 동선을 따라 밀착 촬영한 카메라 화면이 송출될 때, 관람자의 육체는 액화되는 대신 화면 속 가상인물과의 감각적 동일시는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브이로그를 연상시키는 아마추어적 카메라 무빙과 마치 독무대의 배경이 된 미술관으로 하여금, 공적 영역인 미술관은 관람자의 의식 속에서 사유화된다. 이 영상 이미지는 욕망 수행의 대리 주체이면서, 성 소수자와 국가기관이라는 대항 구도의 틈에 존재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새어나오는 드랙퀸 특유의 과장된 유머와 인위적 미감은 감추어지지 않는다. 아니, ‘또 다른 가족’으로 비유된, 역사 속 음소거된 대상을 전면에 세운 전시의 기획 의도에 걸맞게, 오히려 그것을 만파에 드러내려 하는 편에 가깝다.

인적 없는 시립미술관의 전시실 입구와 복도, 작품 운반용 엘리베이터를 스쳐 이동하는 퍼포머의 모습에 더해 공동체의 가능태를 묻는 문장을 교차 편집한 <바늘 끝의 천사들>에서도 이러한 유머와 기괴함이 존재했다. 이 영상의 후반부에는 조악한 날개와 광배, 노란 가발로 천사 코스프레를 한 작가가 기중기의 버튼을 조작해 미술관 상부를 향해 오르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공동체의 수사를 자기 존립의 근거로 지탱해온 미술관에 관한 장르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나름의 신박한 태도를 보이면서, 온라인 전시가 촉발한 상황의 오류와 애먼 감흥을 짐짓 여과 없이 현실로 송신해보였다.

이동연이 기획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가 개발한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가든 서울: 서드라이프의 정원>의 AR전시 플랫폼은 미술관을 벗어나 도시 공간 전역을 향한다.9) 이는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매해 개최돼 온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아르스 일렉트로니카》10)에 참여할 예정이었다가, 팬데믹 여파로 인해 기획 방식이 변경됨에 따라 로컬의 물리적·지리적 제약이 없도록 번안된 과정에서 나온 작업이다.

이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체험하는 융합기술로, 과거 유행했던 포켓몬 고 게임과 같은 증강현실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 사용자가 휴대폰 카메라로 도시 공간을 비추면 화면 속에서 풀포기가 하나 둘씩 자라나고, 도시가 점차 정원이 되는 식이다. 차원이 중첩되는 동안 유저인 관람객은 ‘도시의 정원사’라는 상징적 역할을 부여받아 도시화에 대비되는 행위 예술을 수행하게 된다. 현실(First Life)과 가상(Second Life)이 결합된 제3의 삶으로서 다가오는 시대의 모습을 통찰함은 물론, 확장된 미술관으로서의 도시 역할과 새로운 장소특정성 논의, 그리고 예술의 다발적 수행성에 관한 지평을 확대할 단초로 보인다.

옮겨 말하기의 정치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어휘 차원의 변화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중략) 완벽한 번역에 이르기는 어렵고, 그래서 앞서 ‘옮겨 말하기(Chinese Whispers)’ 말놀이를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는, 또한 그림과 소리, 말과 이미지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11)

《2020부산비엔날레》를 감독한 야콥 파브리시우스(Jacob Fabricius)는 자신이 맡은 행사에 제목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를 착안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세기 러시아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는 친구이자 건축가이며 화가였던 빅토르 하르트만(Viktor Hartmann)이 세상을 먼저 떠난 뒤, 그가 남긴 그림 10점을 10개 피아노곡과 5개의 간주곡으로 구성된 모음곡으로 표현했다. 파브리시우스 감독은 문필가에게 10편의 단편소설과 5편의 시 집필을 의뢰해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시각예술가에게 전달하고 이와 연관되는 작품을 새로 창작하거나 출품해 줄 것을 주문했다. 매체가 다른 예술이 서로 중계되고 해석되는 동안 그는 부산이라는 도시가 품은 여러 폭의 서사가 증폭되고 합주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코로나 감염 위기에 따른 비엔날레 관람의 제한이나 전시 상황의 변수 같은 레이어가 여기에 더 겹쳐질 것이라고는 미리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근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통제된 인원으로 관람객을 받을 수 있었던 《2020부산비엔날레》는 그 전까지는 온라인 매체에 의지해 전시를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한 해 동안 ‘큐레이터의 전시투어’, ‘온라인 오픈투어’, ‘AI 가상 전시 투어’ 등의 이름을 단 각종의 콘텐츠가 전시를 대체해 온라인에 재현됐던 것처럼, 야콥 파브리시우스 감독도 ‘명탐정 야콥의 전시장 투어’라는 이름의 영상을 만들어 이를 공중에 전파한 바 있다.

《2020부산비엔날레》가 부산현대미술관은 물론 영도의 옛 선박자재 창고와 부산 원도심 일대 전역을 전시공간으로 차용함에 따라, ‘명탐정 야콥의 전시장 투어’는 미술관 뿐 아니라 도심 전역을 광범위하게 오가는 야콥 감독의 모습과, 그런 그의 시선과 동선을 쫓는 한 대의 카메라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명탐정 야콥’은 전시해설사의 역할을 넘어 관람객의 관람 경험을 대행하는 아바타로서 작품과 전시공간의 정보를 매개해 현실에 전달하는 자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음악과 문학, 미술을 투과한 ‘번역’은 실재와 가상 사이에서 자행된 전시문법 수행에도 해당되고 있다. 비엔날레 서문에 기록한 그의 비유처럼, 이 ‘옮겨 말하기(Chinese Whispers)’에 대한 완벽의 기대를 낮추고 얼마간의 간극을 수용한다면 이는 그 나름으로 흥미로운 변이이자 연결의 시간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a가 a’, 또는 b나 A로 옮겨 말해지는 과정은 “모든 독서는 오독이고 모든 번역은 오역이다”12)라는 말처럼 통상적이며 심지어 선험적인 일로 보인다. 흔한 놀이 이름으로 알려진 ‘옮겨 말하기’도 원래는, 중국어에 대한 유럽인의 선입견과 경멸이 낳은 인종차별적 표현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확장된 시공간을 향해 전파력 강한 바이러스처럼 뻗쳐나가는 이 오독과 오역이 매체의 한계나 편의상의 의역을 위장한 권력의 무비판적 발신 경로가 될 우려는 없을까. 이 조심스런 의구심은 자국어로 초연된 <마리나>가 《베니스비엔날레》를 위해 영어로 공연되고 입상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일화, <몬도 카네>의 키네틱 움직임과 소리가 삭제된 ‘온라인 미술관’, 3D이미지의 형식과 스트리밍 플랫폼을 전유한 코로나 시대 미술관과 전시의 일률적 동태 속에서도 자각된다.

이것이 ‘흥미로운 동시대’의 현현이라면, 지금 여기 공동의 실체라 감각하기에는 이상한 위화감이, 초감각의 사회로 긍정하기에는 기괴한 기시감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1)작가는 베니스에서의 전시 이후 브뤼셀의 보자르 미술관으로 전시 장소를 옮길 때 케이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말한다. 보자르는 아르데코 풍의 랜드마크로 인형마다 개별적이고 공격적인 케이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부산의 전시공간을 사진으로 봤을 때 이 건물의 투박함이 케이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살려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인터뷰했다.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2020, 202쪽에서 인용.
2)2020부산비엔날레 온라인 전시 https://bb2020.viewingroom.kr/mocabusan_1F
3)클레어 비숍, 「포스트디지털 미술관에서 춤과 퍼포먼스, 소셜 미디어」,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 미술과 민주주의』, 국립현대미술관, 2020, 96쪽.
4)티노 세갈은 자신이 출연하지 않은 퍼포먼스를 미술관에 판매했고 ‘아무것도 아님’을 구매하는 미술관의 행위로 작품이 완성되고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 
김홍석, 「‘질문들-탐욕의 미술에 대해' 대본」, 『SeMA Agenda 2020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서울시립미술관, 2020, 66쪽.
5)마르타 지에반스카, 「상상발휘: 지속적인 실험으로서의 역사 연구」, 『초국가적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2019, 97쪽.
6)앞에 인용한 클레어 비숍 문장을 변용. 
7)테리 스미스, 「수집, 왜 지금이 중요하며,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근현대 미술관의 과제」,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하는가』, 국립현대미술관, 2019, 158쪽.
8)이동연, 「서드 라이프, 테크놀로지, 예술의 미래」, 『문화과학』(92), 문화과학사, 2017, 155쪽.
9)<아르스 일렉트로니카 가든 서울: 서드라이프의 정원> www.artcollider.kr 
10)《아르스 일렉트로니카 2020: 케플러의 정원》(2020.9.9.-9.13)
11)야콥 파브리시우스, 「서문-도시 부산을 번역하다」, 『2020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사)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미디어버스, 2020, 12, 18쪽.
12)해럴드 블룸(Harold Bloom), “Every interpretation is a misinterpretation, and reading is a misreading.”

※ 본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0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 공모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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