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예술창작터의 《시간동사모음》(2020.7.21-9.05)에서 본 이경민의 작품 <Unfinished Heavy Stroll>은 그림에 연결된 핸들 장치를 돌려 풍경을 재생시키는 것이었다. 롤 종이로 말린 끝없는 풍경의 이미지가 감상자가 움직이는 손목의 속도에 맞춰 영사기의 그것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작가가 보고 지나쳤을 나무와 나뭇잎의 크로키 같은 실루엣, 건물의 까만 외관 드로잉이 그랬다. 2020서울사진축제 《보고싶어서》(2020.7.14-8.16,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목격한 풍경은 그보다는 고정된 상으로 액자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고정남의 <겨울방학_여행에서 만난 풍경>은 파도치는 찰나의 바다를 사진으로 동결해 보이고 있었고, 물보라에서 이염된 듯한 흰 서리가 해안 가옥의 지붕 위에 내려앉아 말간 구름에 고요히 대응하는 모습이었다.

작가가 십여 년 전 방문한 일본의 시골 경치가 그랬다면, 여행자의 시선이 택한 것보다 더 일상적으로 보이는 정취도 있었다. 열린 창 사이를 드나드는 커튼의 흩날림이라든지 용도를 기다리며 담벼락에 기대어진 건축 자재와 같은 이미지를 촬영한 전시영의 <쿼터 151-174>가 그랬다. 《보고싶어서》의 리뷰를 쓴 비평가 양효실이 매체의 특성-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들어 다른 세대의 출현과 당혹감을 부정하지 않았던 이 풍경은, 평범과 비범의 경계선을 넘어 자신을 미술관의 숭고한 기록 일부로 벌쭉 내보이고 있었다.

돌 깨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미미하게 들려오던 김재연의 개인전 《가루산》(2020.6.10-6.21, 온수공간)에 걸린 풍경은 도시개발로 곧 파헤쳐질 운명의-그러나 그런 예고가 오늘날 새삼스럽지만은 않은- 산이었다. 작가의 오랜 거주지에 한결같은 일부가 되어왔던 산에 대한 동정일까, 아니면 외경일까 모를 감정이 투영된 풍경으로. 이는 사진이지만 사진의 보정과 인화 방식에 작가의 기분과 주관이 다분히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인지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연상된 것이 범진용의 <풍경>이다. 이는 작가의 심중 불안이 투영된 사실적 풍경화로, 수풀이 뒤엉켜 미궁의 정글처럼 표상된 것이었다. 개간과 도시개발 사업의 풍파가 지나간 인천 어디에 실재하는 장소의 묘사였고, 죽은 듯 산 듯 기묘한 풍광이 깊은 먹먹함으로 다가오던 것이다. 거기에 잠재된 생명력, 아니면 그 반대급부에서 오는 것일까 싶은 힘이 캔버스의 물성과 물감의 마티에르조차 자연의 일부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룹전 《여기까진 괜찮아》(2020.11.27-12.27, 솅겐갤러리)의 전시 전경이 되었다.

이렇게 미술이 되는 풍경이 있는가 하면, 풍경 그 자체가 된 미술도 있다.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업으로 2019년 재개장한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은 ‘지하예술정원’의 컨셉에 맞춰 공간 전역을 예술로 번안했다. 채광을 받는 천장 유리 돔에서부터 지하4층 개찰구와 라이트아트가 있는 지하 5층 승강장까지, 일반 건물로 치면 12층 깊이에 달하는 암굴을 따라 시민은 에스컬레이터의 오르내림과 도보를 통해 여러 매체예술과 식생의 식물정원을 감상하고 체험한다. 지하철 역사에 자라는 식물은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으로 조선 때 이름 붙여진 녹사평(綠莎坪)의 지명 유래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다.

한편, 서울시의 또 다른 공공미술 사업인 중랑구 용마폭포공원도 언급할 만 하다. 1970년대 이 곳은 아스팔트 콘크리트 재료를 수집하기 위한 채석장으로, 다이너마이트의 소음과 분진으로 채워진 공해의 풍경이었다. 이후 1990년대 공원으로 변모해 수직 바위벽을 이용한 50m 길이 인공폭포와 용마산 등산로를 갖춘 주민친화공간으로 바뀌었다가, 서울시 공공미술 공모를 통해 선정된 정지현 작가의 <타원본부>가 2019년 설치되면서 다시 한 번 모습의 변화를 맞게 됐다. <타원본부>는 30m 직경의 타원형 노출 콘크리트가 폭포수가 떨어지는 수면 위에 납작하게 설치된 형태로,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거닐 수 있고, 그 중심은 옴폭하게 기울어 폭포수의 물이 차오른다. 채석장 입구에 동굴같이 패인 부분을 유년시절 친구들과 놀이의 기지 ‘본부’로 삼았던 어느 구민의 추억이 가미됐다.

<타원본부>를 설계한 작가의 최신 작업을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 토끼 방향 오브젝트》(2020.11.23.-11.22. 덕수궁 야외마당 등)에서 볼 수 있었다. 평소 닫혀있었던 석어당, 함녕전 등 덕수궁 전각과 행각 문을 열어 그 안에 근현대미술을 설치한 독특한 디스플레이로 이목을 끌었던 전시다. 마모된 돌의 질감으로 표현된 정지현의 조각 <일상의 해태>는 낮은 좌대 위에 해태가 다리도 꼬고 나른하게 누워 덕수궁 연못 옆 화단 바닥에 놓여있던 작업이다. 덕수궁 중화전 석조 계단에 있으며 신성하고 역사적인 상징이자 기념물인 것을 오늘날 공공영역의 조각으로 바꿔 제시한 것인데, 하나의 궁 안에서 해태의 외관을 공유하는 다른 석상 사이에는 어떤 이형의 단차가 지각된다. 이는 단지 제조연월의 수치적인 유격에서 기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지현은 서울역 광장에 세워진 독립투사 강우규 동상의 폭탄 쥔 오른손을 복제해 그의 개인전이 열리던 전시장에 놓아둔 적도 있었다(《다목적 헨리 (Multipurpose Henry)》(2019.3.9-5.5, 아뜰리에 에르메스).

그러고 보면 그가 미술관과 공공공간을 넘나들며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대립시키는 양측의 다른 그것은 아마도 풍경이다. 아니,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상과 비일상 사이 고착되지 않은 상태 같은 것. 풍경 하나는 그 때와 거기로부터 이식된 현재를,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에 유폐되어있는 감각의 흔적을 더듬는다. 바라볼 뿐 만질 수는 없는 기억과 향수가 있다면 역사의 회로를 돌려 구체적 참여와 환기를 촉구하는 측도 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고 유행처럼 도시와 미술에 빈번하게 출현하는 중이다. 이 글은 그에 관한 이야기다.

청계광장 <스프링(Spring)>(2006),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2014), 서울로7017 <슈즈트리>(2017)가 우리 일상의 풍경으로 들어오던 때에, 정부와 여론이 빚었던 갈등 양상을 소환해보자.

간명하게 말해 이들 논란은 다음의 키워드로 갈음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공예술과 대중문화, 기념조형물과 동시대 공공미술, 공공미술이 상상하는 도시’. 이들은 서울시가 ‘도시 전체가 미술관이 된다’는 선언으로 2016년부터 추진해온 ‘서울은 미술관’의 연례 교류회의 <서울은미술관 공공미술 컨퍼런스> 주제어로부터 일부 발췌한 문구이기도 하다. 주지하듯, 이들은 공공미술이나 도시문화를 다루는 계파에서는 낯설지 않은 용례로 사용된 개념이다.

문제는 정작 그 개념의 실체에 관해서는 낯설다는 것인데, 이는 ‘공공미술의 공공성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슈즈트리’의 예에서 보듯이 예술성과 대중성의 충돌 사이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는 디자인 평론가 최범의 견해처럼,1) 반복된 공론을 통해야만 그 태생적 서먹함이 해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조형물과 건축물 각각이 청계천 복원사업의 공과 도시계획 및 도시재생사업의 명을 기념하기 위한 정부 주도 열망 기표로 기능했던 것과는 별개로, 사전 이해와 합의의 공론이 뒤따르지 않았던 과실은 빈번히 지적된 사안이었다. 그 여론을 거듭하거나 회생시키는 일은 도시의 성장과 신생 이슈의 분출 속도에 비례해 망각의 길을 걷게 됐지만, 랜드마크의 대문자 주형에 묻혀 아스라이 과거의 것이 된, 기념되지 못하고 누락된 풍경은 이름 없는 지박령으로 남아 여전히 시공을 맴돈다.

그것을 환시하는 일은 오직 이 도시에 남겨진 자들의 몫일 것이다. 《보고싶어서》의 참여작가 스톤킴은 정릉동 주택 골목에 자신의 고향 풍경을 이입하고, 또 다시 사라질 장소의 굽이굽이-기와지붕에서부터 보도블록과 콘크리트 지면까지-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그가 전시한 <두부 사러 가던 길>에는 변화한 도시에 남겨진 자가 무뎌진 날숨을 들이키며 일상에서 직면하는 만곡의 죽음 그림자가 있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의 역사를 공간으로 간직하지 못한 도시, 그래서 과거로의 여행이 불가능한 도시는 ‘죽음의 도시’다”2)

예술, 건축, 도시, 디자인 콜렉티브를 자처하는 리슨투더시티의 멤버 박은선은 서울을 포함한 아시아 대부분의 신흥 신도시가 지역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본의 이익만 취하고 있다는 증후로 DDP의 사례를 든 바 있다.3) 박은선은 ‘장소에 책임을 지려는 건축가들은 분명 아니’4)라는 데 자하 하디드(Zaha Hadid, ※DDP건축의 설계자)와 그녀의 스승 렘 콜하스(Rem Koolhaas)를 들어 비판했다. 반면 렘 콜하스는 특징이 사라지고 비어있는 도시를 ‘비정체성의 도시(Generic City)’로 표명하며 옹호한다. 그에 의하면 이는 정체성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도시, 역사가 없는 도시, 만약 오래되면 알아서 자기파괴를 하고 재생하는 도시다.5) 이러한 도시는 건축가에게 기회의 근거지다. 그러나 콜하스도 이후에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도시 곳곳에 존재하는 ‘쓰레기 공간’에 대해 혼란스러운 편집증적 서술을 완료한다. 그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2013)에서 드러낸 현실인식을 발췌해보기로 한다.

“근대화가 건설한 생산물은 근대 건축이 아니라 정크스페이스다. (...) 정크스페이스는 완벽함을 창조하는 척하지 않는다. 단지 흥미를 유발시킬 뿐이다. 그것의 기하학적 형상은 상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중략) 정크스페이스는 포스트실존주의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불분명하게 하고,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지워버린다.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6)

기하학적 형상의 도시 축조는 그를 서식지로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일상적인 모습을 바꿔 놓는다. 사람들은 매일 도시로 출근하지만 자신의 이동 경로를 장소화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신체는 감각기관이 아니라 여기에서 저기로 부단히 옮겨가야하는 이동기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풍경은 GPS로 대체된다.

원동민이 그의 최근 작업에서 도시의 확장성을 은유하는 데 사용한 시어핀스키 도형은 변의 길이가 무한대로 늘어나고 그 넓이는 0에 수렴하는 규칙성을 지닌 기하학적 차원 분열 도형이다. 그는 박형렬, 박동준 작가와 함께 한 3인전 《White Noise Gesture》(2020.11.17-11.30, 와이아트 갤러리)에서 시어핀스키 사각형의 선반 구조물을 벽면에 부착하고 뚫린 사각의 빈 공간에 그가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서 주워 온 부산물을 기념물처럼 올려두었다. 그것은 대개 쇠똥이나 금속 부스러기, 목장갑 같은 것으로 을지로 장소에 벤 노동 정취를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발견된 오브제들이다. 그는 이에 더해 그들 잔여물의 상태를 낱낱이 기록하는 <상태조사서>를 병행한다. 실제 문화재 보존상태를 조사하는 보고서 양식을 사용해 진짜와 가짜가 결합된 다큐멘터리적 풍경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박형렬은 간척사업으로 분쇄된 돌의 파편을 주워 이제는 더 이상 원류가 없는 자연물에 남은 역학적 형상을 <Impulse #1-15>로 보여준다. 사실 그것은 예술가에 의한 물성의 의미 전유에 가깝다. 흔적과 일부분을 전용할 뿐, 물성의 뼈대가 되는 기원과 중요 출처 정보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전시실로 옮겨온 자연물의 정보라면 ‘126°39'37.3"E의 토양’처럼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수치뿐이다.

작가는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거쳐 그의 작업에 개인적인 수행성을 쌓아왔다. 지난 풍경의 혼령을 붙들어 애써 복원과 재현을 자처하고 노스탤지어의 감각을 희구하는 것이 생존한 이의 숙명이라는 데 동의라도 하듯이. 박동준은 <보통의 지도>에서 전시공간을 3D 스캔하고 노멀맵(Normal Map)기술을 통해 화이트큐브의 이면을 시각화했다. 그래픽 출력된 모더니즘의 이상적 공간은 상당히 컬러풀하고 일그러진 형태로 나타나 눈으로 지각되는 장소의 내피를 암시시킨다. 그는 전작 <을지디멘션>에서 세운청계상가를 촬영해 VR로 재현하고,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통해 공동이 기억하는 풍경에서 개인적 경험의 체화를 이끌어낸 바 있다. 근대 건축의 상징, 도시 주변부 산업의 근거지로 여전히 활약하고 있지만 도시개발의 위압에 따라 매양 선고되는 명예퇴직의 압박을 몸소 받아온 공간. 그로부터 촉발되는 장소감에서 개인적 의미를 자극하는 건 다음의 답을 구하는 일에 맞대응하고 있다. “내가 보는 풍경의 실재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는 동시대 미술이 도시와 관계해 얻으려는 출구전략에서 들려오는 ASMR과 같다.

<홍제유연> 전시장 전경 ⓒ오정은 비평가 
<홍제유연> 전시장 전경 ⓒ오정은 비평가 

지난 해 ‘서울은 미술관’ 공공미술 프로젝트 <홍제유연>의 개막은 50년간 냉동상태였던 도시의 장기가 해동되는 사건이었다. 1970년 축조된 주상복합건물 유진상가가 유사시 대전차 기지와 군사 방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100여 개의 콘크리트 기둥으로 조성한 너비 30m, 길이 250m의 지하공간은 실제로 그 기간 동안 감춰지거나 방치되는 등 일반에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다. 때문에 가보지 않은 미지의 터널이자 지하벙커인 <홍제유연>은 냉전 종말 후 다크 투어리즘을 촉발했던 ‘해체된 풍경(dismantled landscape)’7)에 비근하면서, 푸코(Michel Foucault)의 헤테로토피아가 실현될 가능성의 종착지이며, 수직 아래 묻혔던 무의식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탐험하기를 촉구하는 도시 밖의 도시다. 탐험가의 걸음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상상한 만보객의 그것과는 달리, 보다 적극적인 가담행위로서의 시간여행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풍경을 약호화된 그림처럼 관망하거나 일상을 숭고로 변모시키는 예술의 아우라에 의존하는 것 이상의, ‘없는 것’에 관한 탐색과 모험을 필요로 한다.

<홍제유연>에는 미디어아트와 사운드아트, 홀로그램 영상이 가미됐다. 여기에 유진상가가 복개한 홍제천의 물이 여전히 흘러드는 것은 인상적인 광경이다. 콘크리트로 덮인 지면 아래 끊어진 줄 알았던 도시 혈류가 존재감을 자처하는 일이므로. 이는 최근 전 세계에 이는 생태 담론의 확산과 함께 지하예술정원을 꿈꾼 <녹사평역 프로젝트>와 더불어 저층세계 경관에 관한 상상력에 불을 짚인다. 그런데 위성 감시도 피해간 이 지하 미술관은 광량 부족으로 그림자조차 잘 드리워지지 않는다. 단순히 빛을 매개로 한 작품 상영을 위해 블랙박스로 꾸며진 공간이라 믿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의 전기가 차단된 아파트 저층을 떠올렸을 것이다. 암흑의 장소는 사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표가 전복된 공간에서는 공공을 초빙하는 광장의 강박마저 다른 차원의 것으로 풍화시킨다. ‘있는 것’의 재현이 아닌 ‘없는 것’의 존재론적 탐구, 미약하고 불완전하며 흐린 것의 도식화되지 않은 기억을 위해 더듬어 찾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어둠에 매복되어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박찬경 개인전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 – 모임 Gathering》(2019.10.26- 2020.2.2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소개되었던 것으로, 흑백 반전으로 찍어 명암의 위치가 바뀐 <늦게 온 보살>은 그간 영상이미지가 담아오던 뻐근한 생명성을 무화시킨다. 재난이 앗아간 일상의 풍토와 지금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방사능의 오염을 조사하고 다니는 여성의 줄거리는 죽음을 연상하며 탐험하는 자의 신화적 속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산 속, 사람들이 모여 함께 관을 드는 영상 말미 장면은 박찬경이 오랜 시간 그의 작업과 기획 주제를 통해 표명해온 시대 진혼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 바닥에 깔린 시멘트 판에 물결무늬를 도장으로 파낸 조각 <해인>은 불교철학을 빌어 동시대를 반추한 흔적이다. 자기 그림자가 투영될 물이 있어야 할 곳에 시멘트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는 이율배반의 모순 같은 상황을 미술관 속 미술관과 그 내부 광장에 내보였다. 근대화의 역사에서 작가가 발본해온 무명의 존재들, 허구를 실재로 지각시키는 섬뜩한 교훈의 발성 같은 것도.

우리는 어떤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효험에 이끌려 동시대 예술에 위선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대화가 추방해온 그림자를 회생시키기 위한 예술의 사로잡힘, 지나가고 버려진 것들에 대한 습관적 수집과 미적 탐색이 우리를 죄의식으로부터 탈주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렘 콜하스가 정크스페이스를 채우는 정크시그니처(JunkSignature)로 정의한 복원과 재배치(rearrange), 재조립(reassemble), 재디자인(redesign), 혁신(renovate)... 접두사 re-로 시작하는 것들의 수식 주체가 현대미술관, 창작 스튜디오,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만연히 대체되고 있는 현상을 온당한 것으로 판독하기에는 예술지상주의자조차 민망한 감정이 따를 것 같다. 하지만 도시문화의 왜소한 독백을 외면해가며, 풍경은 과거의 몸을 폐허로 소비하고 새로운 팔 다리를 이식해 붙이는 식의 생명 연장술 받기에 안온해져 있다. 어떤 때는 신축과 개발이, 또 어떤 때에는 보존과 복원이 성과가 되는 빌딩숲에서 실로 불편한 진실은 미술을 통한 노스탤지어의 목가적 감상이 판독을 유보하는 화해의 제스처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서영이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2020.5.12.- 2020.7.12.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보여준 사물이 조각이 되는 찰나의 순간, 정중동의 감각과 시적 언어의 파열 같은 것에 매료되고, 그 것을 청취하는 예민함이 새삼 갈급해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매일 혼종의 시공간을 사는 도시민의 풍경은 ‘도시재생뉴딜’과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동네미술’과 같은 국책사업으로 다시금의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현재진행형의 이 두 사업 간 공통점은 ‘일자리 창출’이다. 우리가 풍경의 파괴와 화해하는 커다란 이유는 이전에도 대개 그것이었다. 경제적 가치 창출 같은 것 말이다. 기계문명과 인공지능으로 노동의 종말이 선고된 시대에서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난이도 낮은 현장은 풍경을 소비하고 생산을 금세 독려하는 정크시그니처의 속성에 가까웠다. 때문에 반복되는 이형의 풍경 집산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건설현장은 항구적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사실로서, 또 다른 층위의 의식을 가져온다. 민중미술의 사실주의적 어법을 따르던 박은태가 건설현장 노동자를 우연히 캔버스에 재현하면서 시작한 <철골>연작도 그랬다. 그는 덜 지은 콘크리트 건물과 튀어나온 철골이 수직 수평으로 교차된 그리드의 세계에 구체화된 존재로서 건설 노동자의 역동을 담아냈다. 그가 대형 화면에 묘사한 풍경 및 관찰기록은 철골을 잘라 용접하고 드릴로 구멍을 뚫고 비계를 옮기며 전기배선을 연결하는 생생한 노동의 순간이며, 우리가 예찬하거나 가책하거나 했던, 그러나 막상 직면하지는 않았을 도시의 수술과정이다.

그의 개인전 《천근의 삶》(2020.11.4- 2020.11.25, 인디프레스)에 글을 쓴 문화연구자 심광현은 ‘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거대한 구조압력과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에 응축되어 있는 다양한 제스처들 사이에서 변증법적 긴장관계(와 역전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일’8)의 필요를 역설했다. 나는 이를 다시, 일상에 깃든 다층의 풍경을 감지하고 동시대에 생동하는 관계의 긴장을 재분배하는 일의 필요로 바꿔 말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에게 무뎌진 장소의 음성을 듣기 위해 풍경을 탐색한다. 이 글은 그에 관해 준비하는 이야기다.


1)최범, “[최범의 문화탐색] 공공미술의 공공성은 어디에”, 중앙일보, 2020.11.5.
2)이영범, 『도시의 죽음을 기억하라』, 미메시스, 2009, 19쪽.
3)박은선, 「DDP, 도시 비정체성과 비공공성의 표상」, 『문화과학』 79, 문화과학사, 2014, 233~252쪽.
4)위의 글, 245쪽. 
5)Rem Koolhaas, 「The Generic City」, 『S,M,S,XL』, New York: Monacelli Press, 1995, 1248-1264쪽.
6)렘 콜하스‧프레드릭 제임슨, 임경규 역, 『정크스페이스 | 미래도시』, 문학과지성사, 2020, 9‧14‧31쪽
7)Frank Watson, Cold War Site in England(London: Hush House Publishers, 2004)의 표현으로 스티븐 그레이엄, 유나영 엮, 『수직사회』, 책세상, 2019, 525쪽에서 재인용.
8)심광현, 「회화적-노동 속 숨은 그림 찾기: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변증법적 반전을 위하여」, 2020.

※ 본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0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 공모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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