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정치, 학문, 사상 자유 탄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기자회견’ ⓒ뉴시스
지난 2017년 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정치, 학문, 사상 자유 탄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기자회견’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홍콩에서는 지난 2019년 범죄인을 중국 본토로 강제 송환 가능하도록 하는 ‘범죄인 인도법’(이하 송환법)에 이어, 지난해에는 이보다 업그레이드된 보안법이 추진됐다. 홍콩 내에서 발생하는 분열·전복·테러리즘 등 활동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는 취지의 보안법은 사실상 홍콩 시민들에 대해 통제를 강화한다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홍콩 정부와 중국의 이 같은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며, 저항하는 홍콩 시민들을 지지하고 연대했다. 각국의 주요 정상들이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인 지지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홍콩 시민들은 민주화운동 역사가 있는 한국의 연대를 호소하기도 했지만 우리 정부는 말을 아꼈다. 국가 간 관계의 타격을 우려해서라는 해석이 가장 많았지만, 우리나라 역시 국가보안법이 현존하기 때문에 홍콩 정부를 비판할 입장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보안법은 뜨거운 논쟁거리다. 최근 김일성 주석의 항일 회고록으로 알려진 ‘세기와 더불어’를 펴낸 출판사 관계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하며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진보진영은 올해 초부터 본격적인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시작했고, 정치권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이 발의되는 등 움직임이 활발하다. 국민청원에까지 오르며 국민 차원의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어, 일각에서는 지금이 국가보안법의 질기고 긴 역사를 끊어낼 적기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국가보안법의 73년史

국가보안법의 전신은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이다.

1925년 5월 12일, 일본제국은 치안유지법을 시행했다. 천황제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취지인 이 법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을 처벌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1941년에는 7조 밖에 없었던 조항을 65조로 만들어 독립운동에 대한 처벌을 더욱 강화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치안유지법은 폐지 수순을 밟았지만 몇 년 후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공포·시행됐다. 해방 이후 극에 달한 좌파와 우파 간 갈등이 배경이 된 이 법은 여순사건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고자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소속 좌파세력의 군인들이 군민들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항거한 게 여순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 같은 일이 발생하자 정부는 남한의 좌파세력을 없애고자 급하게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배경 탓에 제정 초기부터 정치적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컸다.

실제 법 시행 첫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인한 입건·구속된 사례는 11만8621명에 달한다. 당시 971만여명이던 20세 이상 남한 인구의 15%에 달하는 수치다.

애당초 국가보안법은 비상시기를 위한 조치로 한시적 성격을 가졌었지만 이후 수차례 개정을 거치며 독재정권의 도구로 이용됐다. 이후 독재정권이 붕괴되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민주정권이 들어선지 수십년이 흘렀음에도 국가보안법은 사라지지 않고 현존하고 있다.

ⓒ국민동의청원 캡처
ⓒ국민동의청원 캡처

폐지를 외치는 이유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애당초 정치적 반대세력 탄압한다는 취지부터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안착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는 여론이다.

특히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문제로 주목받는 조항은 제7조다. 이 조항에 따르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혹은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그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12년 1월, 당시 모 인디밴드 프로듀서로 활동한 박정근씨는 트위터에서 선정적인 게시글을 리트윗해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박씨는 북한의 계정인 ‘우리민족끼리’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게시글 수십여개를 리트윗했고, 이를 북측에 대한 찬양·고무로 해석한 것이다. 박씨는 비판의 의도였다고 밝혔고, 실제 그의 트위터에서는 북한 정권을 조롱하는 취지의 글들이 확인됐다.

하지만 결국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혐의가 인정돼 트위터 리트윗으로 구속된 세계 최초 사례가 됐다.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가 인정되며 혐의를 벗었다.

최근에는 김일성의 회고록을 발간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를 기록한 책으로, 1992년 김일성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 북한에서 대외 선전을 목적으로 출간했다.

이를 지난 4월 국내 출판사 ‘민족사랑방’에서 그대로 옮겨 출판했다. 민족사랑방 대표 김승균씨는 출판 배경에 대해 이미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돼 출판된 책이고, 한국은 출판 허가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고, 경찰에서는 현재 출판 경위와 과정 등을 살피고 출판사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는 등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논란에 대해 시민사회에서는 시대착오적 출판탄압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뿐만 아니라 보수정당에서 마저도 ‘높아진 국민의식 믿고 표현의 자유 적극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밖에도 남·북의 젊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북한 사회를 미화했다고, 지역 문화행사에서 북한 관련 시를 낭송한 것은 북 체제를 찬양하는 행위라고 고발장이 접수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모 정당 행사에서 특정 민중가요를 부른 인물들이 유죄를 확정받기도 했다.

최근 국내에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올해 3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주평등사회를위한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민교협),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등 100개 단체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을 출범했다.

국민행동은 “대한민국 정부에게 국제사회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고 인권침해의 대표적 악법인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며 ”국가보안법 폐지는 미룰 수 없는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한 선차적 과제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하게 만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인권 후진국의 불명예를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역사적 과제다”라며 “문재인 정부와 21대 국회는 당리당략을 떠나서 시대가 요구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번영을 시대를 열기 위하여 국가보안법 폐지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10일 열린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국회 10만 국민동의청원 돌입 기자회견 ⓒ뉴시스
지난달 10일 열린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국회 10만 국민동의청원 돌입 기자회견 ⓒ뉴시스

文정부선 종지부 찍을까

안팎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는 꾸준히 권고돼 왔다. 유엔(UN)은 한국이 회원국이 된 이듬해 1992년부터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유엔의 인권규약에 위배되는 등 국제 인권규범과도 충돌하고 있다고 수차례 지적한 바 있다. 2004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문’을 낸 바 있다.

역대 정부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는 꾸준히 논의돼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전만 하더라도 국가보안법 전면폐지를 주장해왔으나, 집권 후에는 존치론 입장을 펼쳐왔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한 국가보안법 피해자이기도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정을 약속했으나 임기 내 이행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폐지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혀왔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도 당론으로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시도했지만 야당의 반대와 당내 이견 등에 부딪히며 실패로 끝났다.

문재인 대통령도 참여정부 시절 민정수석을 지내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이루지 못한데 아쉬움을 드러내며,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국가보안법 7조부터 없애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집권 4년 차, 문 대통령 또한 아직까지 국가보안법 폐지를 가시화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시민사회와 범야권 등 정치권에서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만큼 임기 내 폐지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옛 통합진보당 세력이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열흘 만에 10만명의 동의를 얻으며 법제사법위원회로 회부돼 국회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당에서는 지난달 20일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을 대표로 류호정·배진교·심상정·이은주·장혜영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함께했다.

강 의원은 “이미 없어졌어야 할 법인데 아직도 남아있어 민주주의가 진전될 때마다 발목을 잡았고, 이 나라에 심각한 불평등과 기후위기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가장 발목을 잡는 악법 중에 악법”이라며 “이제는 21대 국회에서, 그리고 촛불로 만들어진 문재인 정부에서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진보당에서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한편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진보당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은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라며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부패한 정권에 저항했다고 낙인찍히고 심지어는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가야 하는 야만의 시대를 여전히 마주하고 있다. 어떤 이유든 그 누구도 차별과 배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존엄과 평등의 가치를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드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로 인한 혼란, 국민 정서 불안 등을 우려한다. 하지만 이미 형법 처벌규정과 중복되는 내용이 있고, 관련법 규정만으로도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는 게 인권위와 국제사회의 의견이다.

그 어느 때보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거운 지금, 탄생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73년간 끊임없이 인권침해, 탄압, 악법 논란을 야기해온 국가보안법의 질기고 긴 역사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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