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시인의 시집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문학동네
신용목 시인의 시집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문학동네

시는 때로 현실과 전혀 다른 시공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신용목 시인의 시집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문학동네 2021) 속 세계는 물과 어둠에 고요히 잠겨 있다. 시인은 물속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사물들을 바라보며 거기에 투영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둠 속에 잠긴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오는 자신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렇게 잃어버린 나, 나를 벗어나 홀연히 떠돌던 나가 다시금 되돌아와 나를 두드리는 시간들과 시인은 마주하고 있다.

존재의 근원이기도 한 물에 잠긴 세계는 존재에 대한 감각을 현실과는 달리한다. 고수부지에서 피크닉을 하며 “우리는 어느 순간의 물속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는 거”라며 “머리 위로 새우깡 봉지가 둥둥 떠내려가는” 것과 “마음의 푸른 시체가 떠내려”(「우리가」)가는 것을 감각하듯이 말이다. “음악을 물에 담그면 물고기 같”을 거라고, “이 방이 물에 잠겨 있다면 가스불은 산호초 같”(「속초」)을 거라고 감각하듯이 말이다. 물속에 잠긴 모든 것들은 느리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존재의 영속을 드러내고 세계의 시원을 수면 위로 건져올린다.

현실에서 물에 잠긴 세계와 가장 가까운 때는 비가 내릴 때일 것이다. 비는 세계 전체를 적시고 묵은 태를 벗겨낸다.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비존재를 가로지르는 비는 물에 닿더라도 물과 섞이지 않고 비로 머물러 있다. 물속에서도 온전히 감각되는 비라면 “하나의 빗방울과 다른 빗방울의 차이를 구별”(「시간은 취한 듯 느리고」)할 수 있다. “물이 하늘을 날아보려고 구름이라는 이름을 얻는”가 하면 “바다에 잠기고픈 구름이 비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한다(「슈게이징」). 물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더라도 그것은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현실을 외로이 부유하고 있다.

물에 잠긴 세계만큼 어둠에 잠긴 세계 또한 존재의 민낯에 근접한다. 어둠은 상자에 미처 담을 수 없는 것, “허공과 사람이 하나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열고 있다는 것을 알게”(「다인실 다인꿈」) 하는 것, “밤의 한 자락, 그림자를 추처럼 달아놓”고(「외계의 기후」) 존재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는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세계 속에서 시인은 슬픔도 외로움도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그저 묵묵히 동행한다. “공동주택 한 칸이 빈 종이처럼 켜지는/밤”에 “오래된 영사기, 밤의 텔레비전”(「블랙아웃」)은 삶의 면면을 굽어살피고 찰나의 순간에 담긴 아름다움을 일일이 돌이켜본다. 어둠은 허공을 가득 채워 빈 곳이 없게 만든 뒤 어둠 속의 모든 존재들을 환하게 밝힌다.

이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존재들의 그림자는 자유를 얻는다. 밤이 되면 “그림자는 바닥에서 일어나 세상을 다 가진다”(「밤과 단 하나의 그림자」). 나를 떠난 그림자는 나와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세계를 암약하며 돌아다니다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나의 뒤로 스며든다.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깔고 누운 자는 자신”(「오르골」)이기에, 어둠을 지붕 삼은 그림자의 여로는 다시금 나에게로 향한다. “가양대교 위에서 어둠과 물을 구별하는 일”(「가양대교」)만큼이나 밤의 세계에서 어둠과 그림자를 구별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내 존재의 유일한 그늘이 세계와 뒤섞여 하나가 되었다가 귀환하는 이 환상적인 시간에 시인은 오래 눈길을 둔다.

물속의 비, 어둠 속의 그림자처럼 세계와 존재의 이면을 밝히고 탐사하는 시적인 순간들에 시는 정박해 있다. 신용목의 시는 “슬픔을 몸밖에 꺼내놓고 바라보는 일은 무엇”인지, “어느날 슬픔의 말을 다 알아듣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유기」)인지를 대신 체험하게 해준다. 섞일 수 없는 것을 섞이게 하고, 나뉠 수 없는 것을 나뉘게 함으로써, 그리하여 세계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스며들고 건너갈 수 있게 함으로써 표표히 떠돌아다니는 처연한 존재들에 한 줌의 환한 곁을 내어준다. 빗줄기에 몸을 내맡긴 이들, 그림자를 짊어진 이들이 마냥 외롭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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