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웃, 킨 메이타씨의 이야기

1993년 이대서 유학생활 마치고 5년 뒤 결혼·한국 이주
두 아들 출산으로 고향 자주 못 가…6년 전 어머니 상도
현 수원이주민센터 상임대표로 인권 증진 등 활동 진행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차별 없이 평등하게 나아가야”

‘이주민’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사는 사람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옮겨와서 사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이주민은 지난 2021년 12월 기준으로 약 213만 명이다. 현재 외국인 인구가 총인구의 5%를 넘기면 ‘다문화 사회’로 규정하고 있는데,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이미 지난 2019년 국내 인구의 4%를 넘어섰다.

이처럼 이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이들이 아닌 전국 곳곳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웃’이 됐다. 많은 이주민들 중 다문화가 대한민국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다. 

<투데이신문>은 연재 기획 [내 이웃, 이주민]을 통해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매김한 이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물론 삶의 숨겨진 그늘을 직접 들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더욱 우리나라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의 제언들을 담았다.

킨 메이타씨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br>
킨 메이타씨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이주여성’이라 하면 대개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라는 호칭들로만 그들을 정의하곤 한다. 진짜 이름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은 채.

하지만 낯선 한국땅에서 아내와 어머니이자 이주민 ‘대표’로 또 누군가의 ‘스승’으로, ‘길잡이’로, ‘친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미얀마 출신 킨 메이타씨(58)다.

한국에 거주한 지 30년 차인 킨 메이타씨는 현재 수원이주민센터에서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2000년 문을 연 센터는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에게 한국어, 문화 교육을 진행하는 등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이끌어가는 시민단체다. 그곳에서 킨 메이타씨는 지난 2015년 센터 대표에 선출돼 4년간 지냈으며, 이후 2년의 휴식기를 가진 뒤 2021년부터 지금까지 대표로서 활동하고 있다.

메이타씨는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지난 1994년 유학 차 온 한국에서 남편을 만나 1998년 결혼해 한국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가 이주했을 시기는 지금처럼 이주민이 많지 않았던 것은 물론 미얀마라는 나라가 알려지지도 않았을 때였다. 한국인들과 다소 다른 외형과 아직 서툰 한국어로 인해 그는 선입견과 은근한 하대에 시달리기도 했다.

마음속에 점차 두려움이 솟고 있던 그때, 그는 우연히 ‘이주민 센터’라는 공간을 접하게 됐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에 저절로 마음이 흔들려 홀린 듯이 센터에 방문하게 됐고, 그 계기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센터에서 그는 자신 있던 영어 봉사를 시작으로 여러 활동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책임감과 성실함은 빛을 발현했다.

메이타씨에게 봉사는 사실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움직임이었던 셈이다. 그때부터 자신에게 달린 편견의 꼬리표에 그의 삶의 경험을 하나씩 담아냈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선보이고 베풀었다.

그러자 ‘이주여성’이라는 수식어는 사회에서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고 붙잡아두는 존재가 아니게 됐다.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고 이주민에 대한 편견의 벽을 무너뜨리는 ‘용기’의 상징이 됐다.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메이타씨. [사진제공=본인]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메이타씨. [사진제공=본인]

이름 아닌 ‘결혼이민자’로 불릴 때

미얀마에서 메이타씨는 운명처럼 한국인을 자주 접했다. 대학 시절, 우연히 간 봉사활동 현장에는 한국의 모 대기업 직원들이 해외 파견을 나가 근무 중이었고, 캠퍼스 근처에 댐을 만들러 온 한국인 노동자들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다소 다른 생김새와 낯선 언어에도 그들의 상냥한 인사와 주고받는 말속에 묻어 나오는 친절함에 그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애정이 커져갔다. 더욱이 막내 고모부가 한국에 있는 미얀마대사관에서 근무 중이었다 보니 내적 친밀감마저 생겨 더욱 한국에 가보고 싶었다.

이에 메이타씨는 대학 졸업 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5년 간의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친 뒤인 지난 1993년 10월 한국 유학길을 밟았다. 주변 친구들이 모두 캐나다, 혹은 아시아 중 일본으로 유학을 택하는 것과 달리 그의 선택은 다소 파격적이었다. 당시 한국은 외국인들이 잘 모르는 국가였던 것은 물론, 유학을 가는 나라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단단했고 확고했다. 자신은 한국어가, 문화가, 한국인의 따스한 정(情)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메이타씨는 한국으로 와 이화여대 한국어학당을 다녔고, 용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영어 과외에서 제자였던 남편과의 만남이 이어져 지난 1998년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다행히도 남편의 가족은 메이타씨를 딸처럼 아껴주었고 낯선 타지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 덕에 그는 외로울 것만 같았던 한국 생활을 남편과 그의 가족과 함께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사랑과 가족을 만나 한국에 터전을 잡았다고 해도, 주변에서는 여전히 낯선 시선과 편견이 잔재했다. 남편 가족의 지인 혹은 이웃들이 메이타씨를 보며 수군거리거나 출신 국가에 대해 비하할 때면 저절로 눈치를 보게 되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제 자신이 외딴섬이 된 것처럼 동떨어져 고립된 느낌이었다.

“예전에 한 어머님이 오셔서 ‘미얀마를 갔는데, 애들이 너무 가난해서 사탕이나 초콜릿을 던져주니 다 주워 먹더라’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사실 그땐 한국에서 미얀마로 여행 가는 게 익숙하지 않을 때여서 정말로 그분이 갔는지, 아님 미얀마를 잘 모른 채 단순히 ‘못 사는 나라’로 인식해 다른 나라와 착각해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제 앞에서 하면서 불쌍하다고 하시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고 가족들 앞에서 너무 민망했어요.”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메이타씨. [사진제공=본인]<br>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메이타씨. [사진제공=본인]

딸에서 엄마가 되는 과정

자신의 선택으로 한국에 온 메이타씨지만, 미얀마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 아려왔다. 3녀 2남 중 첫째 딸인 그는 장녀답게 부모님과 동생들을 사랑했고 보살폈기에 더욱 가족들이 생각났다.

특히 결혼하자마자 임신과 출산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더욱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한국 사회를 아직 잘 모르는 그에게 낯선 곳에서의 출산은 너무나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이듬해 1999년 첫째 아들을 품에 안은 메이타씨는 낯선 환경 속에서 육아를 시작했다. 아이가 클 때까지 미얀마에 있는 가족을 보러 갈 수 없었고, 그렇게 그는 ‘딸’보다 ‘엄마’라는 이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2004년 둘째 아들까지 출산하며 지금의 가족을 일구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친정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색이 짙어져 갔다.

한국에서 결혼을 한 뒤 정착과 육아에 모든 시간을 쏟느라 한동안 미얀마에 가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느정도 크고 시어머니 혹은 남편에 맡길 정도가 됐다고 여겼을 때는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 뒤였다. 결혼 후 6년 만에 메이타씨는 고향을 찾아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이후로도 계속되는 육아와 생계 등을 이어가야만 하는 현실로 인해 자주 고향에 찾아가지 못했지만, 2년에 한 번은 꼭 가족을 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코로나19가 그와 가족을 찾아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육아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미뤄왔던 미얀마 방문이 팬데믹 시기까지 겹쳐 약 5년이나 미뤄지게 됐다. 

더욱이 최근에는 자주 하던 영상통화마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이어지고 있는 미얀마 내 쿠데타,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현지 상황이 악화돼 통화 연결이 잘 안되는 것은 물론 인터넷마저 제한돼 가족들의 근황마저도 쉽게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메이타씨는 가족 생각이 날 때마다 창 밖 하늘을 바라봤다. 저 하늘을 넘어 있을 자신의 가족을 그려내고, 무탈하기를 기원하며 매일 기도했다.

“결혼하자마자 임신하고 출산을 하다 보니, 고향에 자주 못 가게 됐어요. 아이가 3~4살은 돼야 잠시 엄마 품을 떠날 수 있잖아요. 최근에도 코로나19로 비행기표가 없어 5년 정도 못 가고 있는데,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립죠. 6년 전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전에 많은 추억을 남기지 못한 게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죄송해요.”

수원이주민센터의 내부 모습.&nbsp;ⓒ투데이신문
수원이주민센터의 내부 모습. ⓒ투데이신문

‘대표’라는 직책을 받다

두 아들을 육아하며 메이타씨는 그동안 다져온 영어 실력으로 교습소, 과외 등으로 단기간씩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지만, 자신의 직업이 아닌 것만 같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왔다. 무언가 중심을 잃은 채 겉만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의 인생이 180도 뒤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지난 2008년 남편과 차를 타고 집을 가던 중 우연히 ‘수원이주민센터’라는 간판을 본 일이었다.

이주민인 자신과 같은 심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있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센터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당장 센터를 찾아갔고, 그렇게 긴 인연이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메이타씨가 센터에 큰 주축은 아니었다. 그는 운영위원으로서 센터에 가끔씩 나와 필요로 하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쳐주거나 봉사를 하는 등으로 그쳤다.

하지만 지난 2015년 자신의 고향인 미얀마에서 홍수가 발생했다. 고향에 대한 걱정으로 그는 당시 센터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센터장은 흔쾌히 홍수 피해를 지원하기 위해 모금, 기부 등을 진행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줬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위해 도와준 센터 사람을 비롯해 한국인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껴 보다 적극적으로 각종 활동을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메이타씨는 공동대표로 추대받았고, 그 해부터 지난 2019년까지 대표로서 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물론 이주민의 인권 증진, 통·번역, 교육 지원, 네트워크 관리, 지역공동체 활동 등 많은 일을 도맡아서 해나갔다.

자신이 좋아해서 도전했던 일이었지만, 대표로서 센터를 관리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었을 당시에는 편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봉사하면 그만이었지만, 막상 대표가 되니 센터 사정을 모두 알게 되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살펴봐야만 했다. ‘책임감’으로 양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센터 일은 물론 이어오던 교습소나 과외 일도 해야 했고, 집에 들어가면 쌓인 집안일과 육아가 기다렸다. 그렇게 그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고, 자신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고, 센터의 운영위원으로 다시 돌아가며 일상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던 2년 뒤, 대표 자리가 공석이 됐고 그의 책임감과 꼼꼼함을 기억하던 회원들이 그를 다시 추대했다. 센터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그리고 믿음으로 메이타씨는 다시 대표직을 맡기로 결심했다.

메이타씨는 대표로 활동하는 6년 간 자신보다 주변을 더 많이 챙겼다. 많은 이주여성·이주 배경 청소년·이주 노동자 등 취약 계층에게 먼저 다가가 감싸주며 정착을 도와줬다. 센터에 찾아오는 회원들을 친구처럼 대하며 점심밥을 직접 만들어 제공하거나 작은 축제를 열기도 했다. 그들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누구보다 공감하고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솔선수범했다. 

더욱이 미얀마 홍수 당시 한국에서 큰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함에 지역사회에서 진행하는 각종 행사와 모금, 피켓 운동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받은 만큼 작은 힘이지만 보태고 싶었던 그다.

“사실 저는 먼저 살갑게 다가가고 친화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일을 하나 맡으면 끝까지 하고 혼자 남더라도 꼭 해내고 말아요. 또 저희가 피켓팅을 하는 것에 대해 ‘외국인이 왜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냐’고 물어보거나 역사에 관심 없을 것처럼 편견 가진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저희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현재 사는 나라이니 당연히 관심 있어요. 심각한 사회 문제 등은 자주, 많이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시민들이 ‘외국인도 저 사건을 알고 있네’ 하면서 더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요?”

메이타씨가 피켓 선전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메이타씨가 피켓 선전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아직 멈출 수 없는 꿈의 길

메이타씨는 두 가지의 꿈이 있다. 한 가지는 어머니로서, 다른 한 가지는 이주민센터의 대표로서다.

어머니로서의 꿈은, 더 이상 이주민의 자녀들이 상처받지 않는 세상이 오도록 다문화에 대한 인식과 편견을 개선하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누구나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바라고 있다.

그가 이런 꿈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첫째 아들이 고등학생 2학년이던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생인 첫째 아들이 학창 시절을 보낼 당시에는 아직 외국인, 혼혈 등이 우리나라에서 자주 접할 수 없던 시기다 보니, 그의 아들은 호기심은 물론 경계의 시선을 오롯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아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듯 말을 아끼거나 유달리 힘들어 보였을 때가 있었다. 그때 그의 아들은 사춘기였고, 이국적인 외모로 매 학기 주목을 받았던 학생인터라 메이타씨는 사소한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날 아들은 학교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능력 없는 한국 남자들이 외국 여자랑 결혼한다”라는 말을 듣고 온 날이었다. 당시 아들은 이 같은 일에 대해 아버지에게만 이야기했고, 메이타씨는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 그는 충격과 함께 너무 지치고 힘들어 보이던 아들의 모습이 머리와 마음을 꽉 채워버리는 탓에 한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때부터 메이타씨는 이주 배경을 지닌 청소년들이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길 응원했다.

“그 사건을 아들과 남편 둘이서만 알고 있었어요. 담임 선생님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은 제가 상처받을까 걱정해서 말을 안 한 거였어요. 우리 첫째 아들이 속으로 혼자 끙끙 앓는 성격이에요. 어릴 때부터 외모적으로 튀다 보니 친구들에게 놀림도 받고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어요. 어릴 때나 커서도 종종 외출할 때면 모자나 선글라스로 외모를 가리곤 했죠. 아이한테 항상 미안해요. 지금은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 있는데, 그곳에 가니 자신과 같은 이들도 많고 선입견으로 바라보지 않아서 더 자유롭고 좋다고 하더라고요.”

또한 수원이주민센터뿐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센터가 풍족하진 않더라도 부족하지 않게 운영돼 많은 이주민들에게 힘이 됐으면 하는 것이 그의 두 번째 꿈이다.

대표직을 맡아 이주민을 위한 봉사, 사업 등을 진행하고 싶어도 예산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상심이 컸다. 시에도 여러 차례 건의해 봤지만, 번번이 예산 편성에 밀려 고배를 마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그의 어깨는 물론 마음에까지 무거운 돌덩이가 올라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더 많은 것을 베풀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항상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소소한 식사 대접에도 작은 규모의 축제에도 회원들이 밝게 웃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그는 힘을 얻었고, 또 달려 나갈 힘을 얻었다.

“제가 외국인 대표다 보니, 여러 고비가 많았고 가끔 헤맬 때도 많아요. 그러나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끝까지 센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것이 바로 대표로서 저의 목표이기도 하고요. 잘 운영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연구해요. ”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이 ‘용기’였다. 한국행을 선택한 그날부터 연고하나 없는 낯선 땅에 와서 터전을 잡은 것, 타지에서 가족을 꾸리는 것, 센터에 무작정 찾아간 것, 그곳에서 대표까지 맡게 된 것 등 모든 것이 그의 용기로부터 비롯됐다.

그중 메이타씨가 가장 크게 용기를 낸 일은 바로 ‘이주여성’이라는 틀에 갇힌 자신을 거친 세상 밖으로 당당히 들어낸 그 순간이다.

수없이 찾아오는 두려움과 고난에도 내면의 단단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용기를 이끌어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메이타씨의 곁으로 모여들었고 그에게서 따듯함을 얻어갔다. 그렇게 그는 고정관념 속 이주여성이 아닌 이주민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의 귀감을 받고, 존경을 받는 ‘삶의 길잡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속에서 당당히 섰다.

“제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보다 이주민, 이주여성, 외국인에 대한 시선은 굉장히 부정적이었어요. ‘너희는 아무리 여기 살아도 한국 국민이 아냐’라는 인식도 컸죠. 과거에 비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과제는 많죠. 근데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더 나아가기 위해 배워야 하고 나아가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요. 이런 부분들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서로 다가가면 어떨까요? 그게 바로 진정한 이웃이 되는 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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