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패전 후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실화 각색
희극적 요소로 비극 극대화하는 똑똑한 연출
믿음과 의심 사이서 갈등하는 인물 내면 다뤄

연극 ‘나무 위의 군대’에서 ‘신병’ 역의 손석구 배우와 ‘상관’ 역의 김용준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 [사진제공=달컴퍼니]
연극 ‘나무 위의 군대’에서 ‘신병’ 역의 손석구 배우와 ‘상관’ 역의 김용준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 [사진제공=달컴퍼니]

【투데이신문 이주영 기자】 일본의 패전이 코앞에 다가온 1945년 4월, 두 일본군 병사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도망쳐 가쥬마루 나무 위로 숨는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날 동안 전쟁이 끝난 지도 모른 채 낮에는 적군의 야영지를 감시하고 밤에는 생존 물자를 훔치며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신병’은 늘 식량을 가져오던 곳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전쟁은 2년 전에 끝났습니다. 이제 거기서 나오세요.’

일본 문학계 거장 이노우에 히사시가 2010년 4월 타계하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나무 위의 군대’ 극본은 극작가 호라이 류타에 의해 완성됐다. 2013년 도쿄에서 초연을 올린 이 연극은 전쟁이 초래한 고통을 잊은 일본인에게 경종을 울린 작품으로 평가됐다.

1934년에 태어난 이노우에 히사시는 전쟁을 겪으며 전범국의 국민으로서 자기반성적인 태도를 가졌다. 그의 창작에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괴로움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민낯이 기반해 있었다. ‘나무 위의 군대’ 역시 반전주의를 주제로 삼으면서도 ‘왜 전쟁은 모두에게 고통인가?’라는 물음에 독특하게 접근한다.

최희서 배우가 연기하는 ‘여자’의 존재감은 극 전체를 몽환적으로 이끈다. 국적도 출신도 특정할 수 없는 ‘여자’는 극의 처음과 끝을 여닫으며 화자를 자청한다. 둘뿐인 ‘상관’과 ‘신병’이 서로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객석에 전달하기도 하고 그들이 처한 우습고도 비참한 상황을 해설하기도 한다. 최희서의 손짓과 발걸음은 가쥬마루 나무 전체를 부유하다가도 나무 뒤편 달 형상의 무대 장치에서 시공간과 합일하듯 배경으로서 스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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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나무 위의 군대’에서 ‘신병’ 역의 손석구 배우와 ‘여자’ 역의 최희서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 [사진제공=달컴퍼니]

그곳에서 벌어지는 ‘상관’과 ‘신병’의 다툼은 단순한 인물 간 갈등을 넘어 본토 국민과 오키나와 주민,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국가와 개인, 군인정신과 생존본능의 대립으로 확장된다. 공중에 공기뿌리를 내리며 스스로 얽히고설키는 가쥬마루 나무의 특성처럼 두 인물의 마음에 피어나는 은밀한 미움과 의심은 상대방을 포함하여 자신마저도 단단히 옭아맨다.

외적 갈등 외에도 인물에게 내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상관’은 일본이 군인에게 주입한 ‘전진훈(戰陣訓)’을 내면화한 인물이다. ‘살아서 포로가 되느니 깨끗이 자결해야 한다’는 당위는 살고 싶다는 본성 앞에서도 위세를 꺾지 않는다. 자신은 도망친 것이 아닌 전략적 요충지에서 적군을 감시하는 중이라고 합리화하지만 편지를 발견한 신병을 붙잡고 살아서 돌아가는 수치를 겪을 수는 없다고 좌절한다. 두 사람의 생명을 인질로 잡는 ‘상관’의 행태는 개인의 선택보다 국가의 명령이 우선해야 하는 당시 일본인의 무력감을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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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나무 위의 군대’에서 ‘신병’ 역의 손석구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 [사진제공=달컴퍼니]

‘상관’을 믿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신병’을 연기하는 손석구의 표정과 제스처는 실제 인물인 양 섬세하고 자연스러웠다. 지난달 2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손석구가 밝혔듯, 연극과 매체 간 구분을 두지 않은 그만의 연기 신념은 순수하지만 마냥 유약하지 않은 ‘신병’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나무 위에서 옥신각신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실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연극은 정반대다. 일면 희극처럼 보이도록 의도한 연출이 진중한 주제 의식과 상응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컷 웃다가도 입가에 감도는 씁쓸한 뒷맛으로 인해 전쟁이 자아내는 고통을 오래도록 음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라는 알레고리를 사용했지만 결국 ‘나무 위의 군대’는 자신을, 상대방을, 당위를, 국가를 믿어야 하고 또한 의심해야 하는 양가적 상황으로 인한 인간의 절망과 비합리적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뿌리 깊이 파고들어 내면부터 갉아먹는 무력감과 회의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일같이 치러지는 조용한 전쟁을 겪는 현대인도 피할 수 없는 아픔이다. 결국 우리는 ‘상관’과 ‘신병’에게서 오늘 아침 거울에서 마주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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