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의 칼럼에서처럼, 당대의 이단아로 평가받는 허균의 면모는 그의 최후까지도 계속 드러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비정상적인 기득권에 의한 것이었다.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 인정전 문 앞에서 허균 역모사건과 관련된 살벌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허균의 혐의는 역모였다. 그 내용은 이전에 언급한대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기준격(한 때 허균의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의 상소로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필자는 허균의 파란만장한 삶, 불교와 도교에 대한 시각과 의미, 천주교를 조선에 최초로 전파한 사람이라는 주장 등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이번 회차에서는 허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이었지만, 학문 계통이 다른 이황도 허엽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허균의 큰 형 허성은 이름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였고, 글씨도 뛰어났으며, 선조가 죽으면서 어린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밀지를 내릴 때 참여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이 됐다. 둘째 형 허봉은 아버지
※ 당분간 곽재우, 허균, 김시습에 대하여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칼럼을 구성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혜량(惠諒)과 관심을 바랍니다.【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설(說)이 분분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때 왜군 안의 군종 신부에 의해 천주교가 전래됐다는 설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천주교 군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군종이 예수회 소속 신부였던 세스페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편에서 허균이 불교 신자일 수 있다는 흔적을 소개했다. 필자는 관련 내용을 작성하면서 점차 ‘허균이 불교신자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허균의 도교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을 했다는 점도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허균은 도교에도 관심을 많이 보였다. 허균의 도교에 대한 관심은 학구적 관점, 양생(養生-음식의 섭취를 통하여 무병장수에 이르는 것), 신선에 대한 관심과 동경, 그리고 양생과 신선에 대한 관심과 동경에서 비롯된 은둔사상이었다.1) 아이러니하게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