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 유해 발굴 현장
7~19세 가량 아동 ‘부랑아 같으면’ 입소
기록 상 4689명 중 탈출 시도만 834명
발견된 유해·유품은 치아 210점과 단추
전면 발굴조사 필요…“희생자 더 있을 것”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의 유해 발굴 현장. ⓒ투데이신문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의 유해 발굴 현장.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정인지 기자】 현장 테두리를 빙 둘러싼 차단봉과 주황색 끈은 폴리스라인을 연상케 했다. 사건 현장은 맞다. 다만 발생 후 40년이 흘렀을 뿐.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산37-1. 얕은 경사의 뒷산에는 벌목된 구역 위에 흰색 선으로 그어진 적갈색 구덩이(분묘·묘광) 여럿이 취재진과 피해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목이 이뤄진 구역은 약 2400평이다. 지난 2018년 경기도청의 의뢰를 받은 선사문화연구원에서 기초조사를 시작해 발굴과 시굴을 거쳐 선감학원 희생자들의 전반적인 매장지라는 분석이 나왔다.

작은 구덩이였다. 길이는 1m 전후에서 150cm 미만이었으며, 깊이도 50cm 미만이 대부분이었다. 채 다 성장치 못한 희생자들의 신장과 관 없이 한 가매장이 그 이유다.

발굴을 담당한 선사문화연구원 우종윤 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것이 매장 문화인데, 이곳의 묘광을 보면 크기와 깊이가 제각각으로, 정연성이 상당히 상실된 상태”라고 짚었다.

그는 “계획적으로 매장된 게 아니라 당시의 임시방편적인 시신 처리 방법으로 매장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유해 매장지 중 분묘 58호의 모습. 묘광길이는 128cm다. ⓒ투데이신문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유해 매장지 중 분묘 58호의 모습. 묘광길이는 128cm다. ⓒ투데이신문

작고, 못 먹고, 암매장돼서…뼈는 이미 사라졌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골은 없었다. 40여기 분묘 발굴 및 시굴을 통해 나온 것은 치아와 옷에 달려있던 단추 등이 전부였다.

유골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선사문화연구원은 선감학원 희생아동이 7~19세로 어렸다는 점, 이들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점, 관을 쓰지 않고 암매장·가매장했다는 점, 토양 산성도가 높고 습하다는 점 등을 들었다.

선감학원은 지난 1942년 조선총독부(총독부)가 태평양전쟁에 동원할 인력양성을 위해 설립했다. 총독부는 기관 운영에 필요한 보조 인원 15가구 70여명만을 남겨 놓고 선감도에 거주하던 주민 400여명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학원’을 설치했다.

해방 이후 1946년 2월 1일 경기도로 관할이 이관됐다. 1954년 새 건물을 지었는데 이때 ‘부랑아 수용 시설’로 변모해 1970년대 말까지 존속됐다.

부랑아 ‘일소 및 갱생’을 명분으로 외딴 섬에 갇힌 7~19세 가량의 아동 및 청소년들은 선감학원에서 강제노역에 동반됐다. 뽕잎 따기와 누에 똥 치우기, 굴 양식, 염전 등의 작업이었다.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에서 열린 유해 발굴 현장 언론공개설명회에서 유해 일부인 치아와 단추 등 발견된 유품이 공개되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에서 열린 유해 발굴 현장 언론공개설명회에서 유해 일부인 치아와 단추 등 발견된 유품이 공개되고 있다. ⓒ투데이신문

‘학원’ 생활은 굶주림과 폭행의 반복

밥을 제공했으나 양과 질에서 모두 낙제점이었다. 원생들은 산과 들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와 채 익지도 않은 열매, 뱀 등 수렵과 채집을 통해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소년들이 강제수용소인 선감학원에 끌려온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나라가 이들을 데려온 이유는 ‘부랑아로 보인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부랑아라고 해서 갱생시켜야 한다는 목적 자체가 부당하나, 고아가 아닌데 끌려온 이들도 많았다. 이름이나 생일을 물었을 때 놀란 마음에 잘 대답하지 못해 부랑아로 취급된 경우도 있었다.

폭언·폭행 등의 가혹행위도 만연했다. 인터뷰를 하던 기자는 ‘원폭·골바·물고’ 등 미지의 단어를 듣고 몇 차례 의미를 되물어야 했다. 

복수의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원폭(원자폭탄)’과 ‘골바’는 동일한 행위로, 바닥에 굴 껍데기를 깔아놓고 머리를 땅에 박은 뒤 뱅뱅 도는 행위다. 주먹 쥐고 엎드려 뻗쳐서 기어 다니기도 했는데, 굴 껍데기가 금세 피로 흥건해졌다는 설명이다.

이외에도 도망쳤다가 잡히면 당하는 ‘물고(물고문)’와 처음 들어오면 당하는 ‘신고식’, 아무 이유 없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지시하는 원생들끼리의 패싸움 ‘전쟁’ 등도 있었다.

‘전쟁’에 대해 회상하던 피해자 박모(63)씨는 “같은 방에서 자는 친구랑 이유도 없이 왜 싸워야겠나”며 “미안해서 살살 때리면 선생이 와서 ‘이렇게’ 하라며 갈겼다”고 증언했다.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에서 피해자들이 유해 발굴 현장 언론공개설명회를 지켜보고 있다. ⓒ투데이신문<br>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에서 피해자들이 유해 발굴 현장 언론공개설명회를 지켜보고 있다. ⓒ투데이신문

834명 탈출 시도했지만…‘도망치면 이 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은 삶의 유일한 돌파구로 여겨졌다. 원아대장 상 입소 아동 4689명 중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기록된 인원만 834명이다.

선감학원에 5년 간 수용됐던 피해자 곽모(62)씨는 탈출하던 동료들을 떠올리며 “겨울 되면 특히 많이 도망갔다”고 운을 뗐다.

곽씨는 “겨울에는 눈덩어리(해빙)들이 섬으로 많이 밀려왔는데, 이 얼음을 건너가면 도망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며 “근데 이제 건너가다 빠지면 못 나오는 거지”라고 회상했다.

그는 “뭐가 떠밀려왔다고 해서 따라가보니 썰물 뒤에 갯벌에 남은 얼음과 시신”이었다며 “얼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고, ‘동료 중 누가 없어졌더라’ 알아서 넘겨짚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선생님들이 ‘도망치면 이 꼴이 된다’고 겁을 준 것”이라며 “당시 의무실을 맡은 제가 시신 수습을 위해 담요를 갖고 가고, 돌아와서는 묻었다”고 했다. 그의 나이 15세의 일이다.

이날 발견된 희생자 유해 대부분은 1960년대 이후 탈출 시도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치아 210점과 단추 등 유품 27점 만을 남겼다. 이때 단추가 발견된 이유는 이들이 수의가 아닌 원생복(원복)을 입은 채로 매장됐기 때문이다.

당시 원복은 두 종류로, 하복과 동복으로 구성된다. 이를 통해 이들이 대략 어떤 계절에 사망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게 선사문화연구원의 설명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대로 당시 하복·동복, 지난 25일 유해 발굴과 함께 공개된 단추. 모양을 보아 희생자는 하복을 입은 채 매장된 것으로 해석된다. [자료제공=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대로 당시 하복·동복, 지난 25일 유해 발굴과 함께 공개된 단추. 모양을 보아 희생자는 하복을 입은 채 매장된 것으로 해석된다. [자료제공=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친구가 굴 까 먹을 때 사용하던 그 칼”

현장에서 주목받은 또 다른 유품이 있었으니, 철로 된 칼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와 선사문화연구원이 발굴 과정에서 ‘철제 조각’을 발견하고 쓰인 용도를 고민하던 중 피해자 증언을 통해 이같이 밝혀졌다.

현장에서 피해자 이모(63)씨는 “그 친구를 내가 묻었는데, 여기 어느 장소에 묻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다가 어제 (칼 이야기를 듣고) 제 친구가 굴을 까 먹을 때 사용하던 그 칼이라는 생각이, 아니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실은 제가 몸이 아프지만은 반드시 와서 밝혀야 이 친구가 이제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가 밤마다 괴롭힘 당하는 걸 본 그 친구가 (부랑아라는 이유로 입소했기 때문에 부모가 있음을 증명하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가서 너희 부모님을 데려오마’하고 갔는데 3일 만에 바닷가에 떠밀려왔다”고 한 뒤 말을 멈췄다.

물을 드시라는 권유에도 약하게 고개를 저은 이씨는 잠시 후 137호 분묘 앞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너를 못 찾아줘서 미안하다”며 구덩이에 손을 뻗고 흙을 연신 어루만졌다.

그는 “네가 없어도 자주 올 것”이라며 “이제 편히 쉬어라. 나도 이제 네 생각 조금 덜 하니까”라고 오열했다.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에서 피해자 이모씨가 동료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분묘를 매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희생자 매장지에서 피해자 이모씨가 동료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분묘를 매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투데이신문

진화위 “토지허가 왜 안 내주나…전면 발굴해야”

공식 기록에 따른 선감학원 원생 사망자는 24명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두 차례 발굴을 통해 발견된 아동 암매장 묘는 이미 45기로, 수치를 훌쩍 넘어섰다.

지난 2018년 경기도의 ‘선감학원사건 희생자 유해발굴을 위한 사전조사 계획수립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이곳 매장지에만 150여구의 유해 매장이 추정된다. 

봉분조차 없는 묘가 대부분이니, 밟고 있는 평지 아래에도 희생자들이 있을 지 모른다는 게 진화위의 설명이다.

특히 139호, 140호 등 2기는 이후 생겨난 배수로 시설과 겹쳐 있어 인근에 유해가 더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 139호 앞에 서있던 피해자들은 “맞어 이쪽에도 묻었던 것 같다”며 대화를 나눴다.

이에 진화위는 향후 매장 정보 확보를 위해 전면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체는 “사유지가 아니라 국가 땅으로, 이곳은 토지허가서만 받으면 전면 유해 발굴이 가능한 곳”이라고 짚었다.

이어 “진화위의 시굴을 통해 선감학원 수용아동들로 추정되는 유해와 유품이 확인된 만큼 국가와 경기도는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을 신속히 추진하고 적절한 추모공간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특히 진화위는 “작년(발굴)에 나온 것보다 올해 치아의 상태가 더 안 좋다”면서 “이대로 시간이 가면 이 치아마저 못 모실 수 있다”고 호소했다.

한창 꿈 많을 시기 교복도 아닌 ‘원복’을 입고 숨진 이들이 끝까지 남긴 단 하나의 유해는 지금도 부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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