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프롤로그>

“사랑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남긴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사랑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 눈앞에 보이는 외모나 능력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진실된 마음입니다.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누구보다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 혹은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아끼고 보듬으며 더욱 사랑을 키워갑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특별하고 비극적일까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사랑은 그저 사치일 뿐일까요. 혹시 우리가 또 하나의 편견과 장애를 만드는 것은 아닐런지요. <투데이신문>은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평범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차가운, 그 둘이 어우러진 적당한 온도가 기분 좋은, 그를 만났던 어느 봄날은 딱 그런 날이었다.

지난 11일 기자가 영찬(27)씨를 만난 건 서울 종로구 신교동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동행학원’. 도착했다는 기자의 전화에 영찬씨는 “도착하셨나요? 나가겠습니다”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인터뷰를 요청했던 지난번 통화 때도 느꼈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서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이 열리고 갈색 재킷을 단정히 차려입은 영찬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우리는 여의도 못지않게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다는 화동의 정독도서관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와 어떻게 발을 맞춰 걸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영찬씨는 “제가 팔 좀 잡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살며시 기자의 팔을 붙잡았다.

▲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영찬씨는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과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시력이 낮은 ‘저시력’으로 구분하자면 전맹에 속하지만 가까이 있는 물체의 크기나 색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현재 초·중·고 학생들에게 국어, 수학,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택시를 타고 10여분 가량 달리니 목적지인 정독도서관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는 벚꽃이 바람에 흩날려 꽃비가 내리는 벤치 아래 자리를 잡았다.

괜스레 마음 설레는 봄날, 우리는 20대라면 누구나 꿈꾸는 사랑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비슷한 또래의 그와 많은 공감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소년 영찬의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소년 영찬, 이성에 눈을 뜨다’

영찬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특수학교에 다녔다. 장애가 있고 특수학교에 다닌다는 차이만 있을 뿐 영찬씨도 여느 10대와 다름없는 사춘기를 보냈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그거 처음 이성에게 설렘의 감정을 느낀건 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영찬씨의 학업과 학교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물론 꾸중과 훈계도 뒤따랐지만 모두 자신을 위한 사랑의 회초리와 같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찬씨는 그마저도 좋았다고 한다. 그는 그때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남자가 아닌 여자 선생님이어서 그런 모습마저도 좋은 게 아니었겠냐며 웃었다. 아마 이때 처음 이성에 눈을 뜬 것 같다고 한다.

▲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그 시절, 소년 영찬이 좋아했던 소녀’

20살 이전 이성교제 경험이 없어 중·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연애에 대한 로망이 있는 기자는 그에게 학창 시절 몇 명의 여자친구를 만나봤냐고 물었다. 수줍게 웃던 영찬씨는 중학교 때 1번, 고등학교 때 1번 있다고 했다.

여자친구를 처음 사귄 건 중학교 2학년때다. 당시 영찬씨가 다니던 학교에 그보다 한 살 어린 여학생이 전학을 왔다. 그 소녀는 영찬씨와 마찬가지로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이었다. 영찬씨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 사회경험이 쌓여 말수도 늘고 낯가림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와는 다르게 밝고 명랑하고 누구에게나 싹싹한 소녀는 영찬씨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소녀의 매력에 빠진 건 영찬씨 뿐만이 아니었고 하루빨리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뺏길 것만 같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찬씨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고 끝내 소녀의 남자친구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여자친구는 고등학생 때 만났다. 그 소녀는 처음에 만났던 여자친구와는 상반된 성격이었다. 첫 여자친구가 무더위에 갈증을 해소해주는 이온음료 같다면 두 번째 여자친구는 삼키는 순간 목 끝까지 톡 쏘는 탄산음료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영찬씨는 우연한 계기로 시각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연수를 갔었다. 함께 간 수많은 친구 중에 유난히 다른 사람에게 차갑고 날카롭게 구는 그녀가 영찬씨의 관심을 끌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감정보다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에서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아무도 알 수 없듯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텄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왔다.

학생처럼, 학생답게 풋풋했던 두 소녀와의 만남은 아직까지도 학창시절의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다.

▲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사랑이란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것’

영찬씨의 사춘기 시절은 생각 이상으로 아주 평범했다. 혹시나 짓궂은 친구들이 장애가 있다고 놀리진 않았는지, 장애 때문에 좋아하는 이성에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진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신이 가진 장애로 친구 관계나 이성교제를 고민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설령 고민이 있을지라도 남들한테 털어놓기 보다는 혼자 생각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꽁꽁 숨겨두고 나만 보고 싶은데 부모님이나 친구들한테 들킴으로써 나만의 보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느낌 때문이랄까.

무엇보다 고등학교때까지는 특수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여자친구를 만났다. 장애라는 공통분모를 가졌기 때문인지 비교적 교제가 수월한 편이었단다. 그래서인지 장애가 누군가를 만나는데 있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0대의 어느날 처음으로 장애가 누군가를 만나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대학교에 입학 후 그가 마주한 세상은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새내기가 된 영찬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동아리 활동이나 CC(캠퍼스 커플)나 미팅과 같은 캠퍼스 로망은 꿈꿔볼 새도 없었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때 아닌 성장통을 겪은 영찬씨는 변화한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서야 그런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어린 소년의 풋내기 사랑을 지나 한 남자로서 진정한 사랑도 경험하게 됐다.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는 영찬씨의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이미 끝난 인연이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혹여 그녀에게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고민하는 듯했다. 그는 차분하게 그녀와의 첫 만남에 대해 입을 뗐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그녀는 영찬씨가 다니던 학과의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청량한 그녀의 목소리는 앞이 보이지 않아 청각이 예민한 영찬씨의 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이들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 그가 꿈꿨던 이상형에 가까웠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영찬씨는 그녀에게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까지 영찬씨에게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녀는 비장애인이었기 때문. 가끔 비장애인 여자친구를 만나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상대방과 자신 모두 힘들어질 것 같아 욕심을 내진 않았다. 하지만 점점 커져가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영찬씨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엔 영찬씨의 고백을 거절했다. 성향이 잘 맞고 좋은 사람이란 걸 충분히 알지만 이성친구가 된다는 건 다른 문제이기때문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진 장애가 부담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착한 그녀는 선뜻 영찬씨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음을 미안해했다. 어찌보면 이때가 영찬씨 인생에 처음으로 장애가 사랑의 걸림돌이 된 순간이 아닐까 싶단다.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있듯 영찬씨가 1년 동안 따라다니며 진심을 전한 끝에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만남을 시작한 후 알게 된 얘기지만 고백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름의 용기를 가질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영찬씨도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서운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진심은 통했으니까.

두 사람의 만남 소식에 주변 친구들은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 친구들은 성격도 좋지만 외모도 빼어났던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 영찬씨에게 ‘예쁘다는 것 알고 고백한 것 아니냐. 앞이 보이는데 거짓말하는 거다’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간의 고민과 걱정이 무색하게 두 사람의 만남은 평범했다. 두 사람 모두 특수교육을 공부했기 때문에 종종 데이트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닌다는 것 말고는 영화보고 산책하고 밥먹고, 남들과 비슷한 데이트를 즐겼다.

사실 평범한 만남이 가능하기까지는 영찬씨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낯선 곳에 갈때면 그녀보다 미리 그곳을 방문해 동선을 익혔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 틈에서 튀지 않고 편하게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그녀보다 먼저 데이트 장소에 답사를 갔다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남모를 고민이 영찬씨에게만 있던 것은 아니다. 하루는 영찬씨가 발레 공연을 보고 싶어 하던 그녀를 위해 몰래 티켓을 예매했었는데 이를 알게 된 그녀가 돌연 예매를 취소했다. 앞을 볼 수 없는 영찬씨를 배려하는 마음에서였다. 영찬씨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됐지만 그녀는 영찬씨의 20대 초반을 함께한 소중한 인연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장애, 만남을 망설이는 수만가지 이유 중 하나일 뿐’

영찬씨는 자신이 가진 장애가 사랑을 하는데 문제가 될 순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남이 외적인 취향이나 성격과 생각 차이처럼 만남이 망설여지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향한 진실된 마음만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라도 분명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장애인은 연애할 수 없나요’, ’장애인은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나요‘, ’장애인 친구가 고백했어요‘처럼 본인 혹은 상대방의 장애로 이성교제를 고민하는 10·20대들의 고민 글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당연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기자에게 그런 상황이 왔을 때는 당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날 만난 영찬씨의 한마디가 기자의 생각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학생들이 이성친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면 제 대답은 늘 똑같아요. ‘사랑은 재채기다.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니 상대방도 너를 좋아한다면 언젠가 그 마음을 고백할 것이다.’ 진실한 마음은 언젠가는 통한다고 생각해요”

어느덧 20대 후반에 접어든 영찬씨는 힘이 들고 초라한 순간까지도 서로 공유하고 버팀목이 돼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단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상대방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사랑에 얽힌 여러 가지 추억들이 떠올랐다. 좋아하던 선생님을 위해 수업이 시작되기 전 칠판을 깨끗하게 닦고 행여 선생님 손에 하얀 가루가 묻을까 분필 하나하나 종이로 감쌌던 여고시절, 20대의 어느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에 떨리기도 하고 가슴 아픈 이별에 술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술 한잔을 기울였던 기자의 지난날이 어쩐지 영찬씨가 들려준 이야기들과 다르지 않았다.

흔히들 봄은 사랑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이 오듯, 지독한 이별과 외로움 끝에 찾아온 사랑 때문이 아닐까. 과연 지금 이 순간 영찬씨의 마음에는 어떤 계절이 찾아왔을까. 그의 마음에도 따뜻한 봄이 찾아와 설렘이 살랑이고 있기를.

※ 본 기사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콘텐츠 크라우드 펀딩플랫폼 <스토리펀딩>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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