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 베트남전쟁, 역사의 현장을 가다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 베트남전쟁, 역사의 현장을 가다
  • 박애경 발행인
  • 승인 2018.06.0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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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6월. 여름으로 가는 길목. 그 길목에 우리의 전쟁역사가 늙은 파수병처럼 서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자신의 경계임무를 마치고 그리운 고향집에 돌아갈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말이다.

얼어붙은 한반도에 봄소식이 들려왔다. 서로 할퀴어대던 남과 북의 정상들이 서로 악수를 하고 가슴을 맞대었다. 아직 풀어야 할 과제는 많지만, 두 정상들의 감싸 안은 어깨만으로도 족하다. 전쟁으로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의 국가로 다시 세우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봄기운이 적어도 흉물스런 전쟁이란 녀석을 무덤 속에 사장(死藏)시킬 수 있다고 기대한다.

전쟁은 모든 것, 모든 삶, 그리고 인간성까지 말살시킨다. 전쟁에서 승리자는 없다. 패배자만 있을 뿐이다. 누구를 향해 파괴한, 누구의 의해 파괴된, 허무만이 남을 뿐이다. 허무를 딛고 일상을 탐미하지만, 서랍 속 감춰진 비밀일기장처럼 꺼내어 볼 때마다 절절히 아프다.

투데이신문은 전쟁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기록된 베트남 호찌민(구. 사이공)을 다녀왔다. 더 이상 이 땅에 전쟁은 없어야한다는 절절함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그리고 평화로 가는 길에 먼저 용서와 화해의 악수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제부터 베트남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베트남전쟁 이야기
전쟁박물관 ⓒ투데이신문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정부와 이를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전쟁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사이의 내전(內傳)에서 시작됐다.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 만’사건을 빌미로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이후 미국이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국제적인 전쟁으로 커졌다. 그리고 무더위보다 더 뜨거운 화염이 베트남 뿐 아니라 이웃나라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전쟁 중 미국과 한국군은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이 퐁넛 양민 학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 전쟁은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하면서 끝이 났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베트남은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 한창이었다. 1927년 베트남국민당이 조직되고, 이어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이 결성됐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독립운동 지도자인 호찌민(胡志明)을 중심으로 1941년 5월 19일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연맹)이 결성되어 일본과의 게릴라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 베트민이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때까지 9년간 지속됐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 휴전 협정을 통해 북위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제네바협정에서는 1956년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 지엠은 선거실시를 거부했다. 지엠 정권은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반발로 인해 베트민과 종교집단이 합세해 1950년대 중반 소위 베트콩(Viet Cong)이라고 불리는 게릴라조직을 탄생시켰다.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으나, 게릴라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해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섰다.

정부군과 게릴라군의 대치 속에 1963년 즈엉반민 등이 미국의 묵인 하에 지엠을 죽이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듬해 응우옌칸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베트남 정국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이때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수를 늘렸다. 그리고 1964년 8월에 미국 구축함 두 척이 베트남과 미국 사이에 위치한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고 꾸미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쏟아 부었고,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해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다. 밀림에 불을 지르고 식물을 말라 죽이는 고엽제를 뿌려 베트콩의 은신처와 보급로를 차단했다. 베트콩 역시 국민들의 지지 속에 밀림 속에서 미군과 맞서 싸웠다. 마침내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용해 남베트남 36개 도시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 호찌민)을 점령했다.

그 성과로 1969년 6월 8일 남베트남공화국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됐다. 곧바로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빼앗겼던 몇몇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전쟁을 이어가기가 힘들어졌다. 베트남에서 점점 힘을 잃고 있는데다가 미국 내에서도 반전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사실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과의 정전협상이 시작됐지만 1972년까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 내전에 군사개입을 하면서 전쟁터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됐다. 정전협상은 1972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재개되어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미군의 전면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파리평화협정 체결 후 미군은 약속을 지켰고, 포로교환도 이뤄졌다. 아울러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도 줄었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표출됐다. 결국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은 사이공(현. 호찌민)을 점령, 당시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1976년 7월 2일 남과 북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나가 됐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전쟁 당사자인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1964년 9월 의료진 등 비전투병 파견을 시작으로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파병했다. 참전군인 중 1만 6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인해 많은 수가 후유증에 시달렸다. 고엽제 후유증은 베트남 국민도 마찬가지였다. 1994년 베트남 정부는 약 200만명이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발표했다. (참고-두산백과)

전쟁의 후유증이 비단 고엽제 뿐 이겠는가. 무수한 살상을 경험했던 군인도, 민간인도 전쟁 중에 선(善)함을 포기했다. 그들이 선함을 포기한건 그들이 악(惡)해서가 아니다. 그저 생존이라는 본성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포기했던 선함에 대해 자책하고, 또 그들이 경험했던 악함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려야했다. 결국 전쟁이 남긴 건 아픔과 슬픔이다.

전장의 흔적

구찌터널 ⓒ투데이신문
구찌터널 ⓒ투데이신문

호찌민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70㎞ 떨어진 전쟁의 흔적, 구찌터널에 서있다. 이곳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밀림 속 지하터널이다. 잔혹하고 열악했던 게릴라전의 상황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구찌터널은 1948년 인도차이나전쟁 당시 베트남이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처음에는 지하 1층 구조의 터널이었지만,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약 200㎞를 더 팠다. 깊이는 3~8m로 캄보디아 국경까지 확장된 전체 길이는 무려 250㎞에 이른다. 온전히 사람이 직접 파서 만든 터널이라는 점이 놀랍다. 그만큼 생존의 절박함이 컸다는 반증이다.

어린아이조차 이동하기 힘들만큼 좁고 습한 지하 속에서 기나긴 전쟁을 버텨내야했던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 속 장면처럼 그려진다. 군사작전 회의 속 진지함, 조상신께 드리는 기도의 엄숙함, 최소한의 끼니를 나누며 서로에게 미소 짓는 따뜻함, 그리고 이어지는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처절함이 영화 속에 담겨있다. 한바탕 퍼붓고 지나간 스콜처럼 짧지만 강하게, 영화는 내마음속에 느린 영사기로 소리 없이 돌아간다.

전쟁이 남긴 것들

전쟁박물관 ⓒ투데이신문

베트남 전쟁의 실상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호찌민 전쟁박물관 벽면을 장식한다. 고엽제로 파괴된 숲 가운데 서있는 어린 소년의 눈빛이 발걸음을 잡는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라고 묻는 듯 무심히 관람객을 바라보면서. 소년의 무심한 응시가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한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어느 미군 병사의 깊게 주름진 얼굴에는 지친 허무함이 느껴진다. 그는 “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 나는 이곳에 와 있나?”는 물음을 담배 한 개비에 던진다.

갈가리 찢긴 육신을 아무 거리낌 없이 들고 서 있는 병사, 생존을 위해 위험한 강을 건너는 일가족, 도축장을 방불케 하는 쌓여진 주검들, 그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서있는 사람들... 이들 모두에게 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슴 먹먹히 사진 속 그들을 바라본다.

전쟁박물관 ⓒ투데이신문

베트남전쟁이 남긴 끔찍함은 생존하는 고엽제 피해자들이 증명해준다. 베트남 국민만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전장에 있던 모든 이와 또 그들의 후대에까지 상처를 주었다. 고엽제 영향으로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던 무수히 많은 태아들이 괴기스런 모습으로 시험관에 담겨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그나마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팔다리 없이, 머리가 두 개인 채,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부풀어 오른 얼굴로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 고엽제 제조사인 미국의 다우케미컬과 몬산토 사가 이들을 위한 손해배상을 해주었지만, 이들의 삶을 돈으로만 보상할 수 있겠는가? 이들의 일상이 담긴 사진 앞에 슬픔이상의 분노가 솟구쳤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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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박물관 ⓒ투데이신문

호국보훈의 달 6월, 휴전 상태인 우리의 남과 북 모두가 전쟁이 주는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기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야 할 적기이다. 게다가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끝내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더욱 의미 있는 6월이다. 호찌민 전쟁박물관 입구에 걸린 포스터 속 아이들이 감싸 안은 ‘We Love Peace' 글귀가 세상 곳곳에 심어지길 바란다. 아직도 전쟁 중인 중동, 아프리카 등은 물론 잠시 휴회상태인 지역까지 반목과 증오를 내던지고 평화를 선택하길 절실히 바란다. 또한 오는 6월 12일 예정되어 있는 미국과 북한의 만남에서 세계평화로 가는 지름길이 열리길 바라고 또 바란다. <타임머신>을 쓴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