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시습, 생육신과 승려 사이
[칼럼] 김시습, 생육신과 승려 사이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0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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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허균이 『홍길동전』 으로 유명한 것처럼, 『금오신화』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여기에서 『금오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금오신화』는 실제로는 일종의 소설 모음집으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총 5개의 소설로 이뤄져있다. 소설의 내용들은 대개 인간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겪는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어서 부처와 윷놀이를 한다거나, 선녀나 염라대왕을 만난다는 등의 내용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환타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시습에 대해 이것 외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김시습이 『금오신화』 의 저자라는 것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아마도 그가 생육신(生六臣) 중 한 명이라는 점일 것이다. 생육신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에 분노해 관직을 맡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산 여섯 명의 충신들을 뜻하는데, 김시습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해하면서 공부를 접고 책을 모두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매장해 준 사람이 김시습이라고 쓰여 있다.1)

이와 같은 모습은 충(忠)을 강조한 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전에 언급했듯이, 관직에 진출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유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런데 김시습은 이것보다 충을 더 높은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수양대군이 즉위한 직후 관직 진출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시습이 관직에 진출했다는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김시습은 관직 진출에 대하여 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의 이름에서도 유학의 분위기가 풍긴다. 시습(時習)은 『논어(論語)』의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도 등장한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이것은 김시습의 부모가 김시습이 『논어』의 그 구절을 평생 실천하며 살길 바라는 바램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김시습은 수양대군 즉위 직후 승려가 됐다. 승려가 된 이후 약 9년 동안 전국을 유랑했고, 그 결과를 정리해 글로 남겼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김시습의 사후 그의 유지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됐고, 부도(浮屠-승려가 죽은 후 사리를 모아놓은 탑)까지 조성되었다는 것은 김시습이 당시 대외적으로도 승려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수양대군의 즉위에 반대해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었지만, 승려가 된 이후 일부 세조의 일을 도와줬다는 것이다. 김정미의 연구에 따르면, “세조 9년(1463)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불경을 한글로 풀이하는 일)을 도와 내불당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했고, 역시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했다.”2) 고 한다. 낙성회에 참가한 것이야 불교 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승려의 입장에서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불경언해에 참가한 것은 불심(佛心)을 가진 세조의 일을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절개를 지킨 생육신이자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일찌감치 글공부를 시작한 김시습이 승려가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성리학이 이단(異端)을 배격하고, 불교는 이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시습이 승려가 된 것은 김시습 개인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불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특히 세조의 불경언해에 참여한 것은 세조에 대한 원한보다 불교 경전에 대한 한글 번역 작업이 더 중요하게 여길 정도로 스스로를 승려로 규정지은 것이라고 예상된다. 혹은 유자(儒者)로서 충을 끝까지 지켰고, 이것을 위해 세상과 등지기 위해 선택한 것이 승려가 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허균과 비슷하게 여러 학문 분야에 관하여 다양하게 독서했고, 그 과정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특히 천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어린 나이부터 글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의 독서 범위가 광범위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시습은 일생에서 생육신으로 평가될 정도로 충절을 지킨 모습과 승려로서의 활동이 공존한다. 이것은 당대 조선 전기의 종교지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 전기에 불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강력한 통제가 있었지만, 천년 이상 많은 민중들에게 신봉되었고, 국가 차원에서도 숭상되었던 불교가 한 순간 없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김시습이 유자로서의 모습과 승려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조선 전기 불교가 이단으로 간주되어 많이 배척되지도 않았고, 불교가 많이 위축되지 않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김시습이 가진 세계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유학이나 성리학에서는 사후 세계를 비롯한 초현실적인 것에 대하여 거의 언급이 없다. 그런데 『금오신화』에는 꿈속의 모습, 사후세계, 석가모니와의 윷놀이 등 다양한 초현실적 세계가 등장한다. 이것은 김시습이 가진 초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고, 이것은 유학에만 몰두하지 않은 김시습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1) 김정미, 「김시습-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사람」, 『인물한국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567&cid=59015&categoryId=59015

2) 김정미, 「김시습-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사람」, 『인물한국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567&cid=59015&categoryId=59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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