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시습, 유불도(儒佛道)를 넘나들다(2)
[칼럼] 김시습, 유불도(儒佛道)를 넘나들다(2)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2.1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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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앞 회차에서는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주목받았으며 효(孝)를 실천하고, 생육신(生六臣)으로서 절개를 지키는 등 유학의 이상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김시습은 이런 모습보다 승려로서의 모습이 더 유명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했을 때도 그는 승려 신분이었고, 이전에 언급했듯 그는 사후 유지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됐다. 또 부도(浮屠-승려가 죽은 후 사리를 모아놓은 탑)까지 조성됐다.

이런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시습은 세종-성종 대에 활동했다. 이 시대는 표면적으로는 조선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는 통치체제가 자리를 잡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성리학이 조선왕조가 수립되기 전 약 1400여년간 국가의 사상적 배경이자 사람들의 신앙이었던 불교를 단번에 대체할 순 없었다. 

불교교단 자체를 통제해 그 정치력과 경제력을 위축시키고자 노력했지만, 불교는 왕실과의 연계와 백성들의 신앙, 그리고 기득권을 바탕으로 상당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김시습이 태어나고 활동했던 것이다. 

김시습은 성리학 교육을 받았고, 계유정난 당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시습은 일생 중 많은 세월을 승려의 모습으로 지냈다.

이전에 언급했던대로 세종 31년(1449), 김시습 나이 15세 때 어머니 장씨를 여의었다. 그리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던 것을 시작으로 외숙모가 사망했으며 계모도 병을 앓았다. 그리고 이 무렵 김시습은 혼인을 했으나 가정생활 또한 원만치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8세 때 김시습은 송광사에서 출가했다. 이는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적인 동시에 불교에 투신하게 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석가모니 역시 난생 처음 궁 밖을 나서서 목격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본 충격으로 출가를 결심했다. 

김시습이 출가한 것은 1455년이었으며 환속한 1481년(성종12)까지 승려 신분으로 살았다. 이 시기 김시습은 사육신과 단종의 죽음에 직면하면서 울분으로 세월을 보냈다. 특히 김시습이 출가하는 순간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스물 한 살 되던 경태 을해년(1455),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었다. 이 때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돌아오는 자였다. 선생은 곧 집을 걸어 잠그고 3일간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통곡하더니, 그 책을 불사르고 미쳤음을 가장해 더러운 뒷간에 빠졌다가 거기서 도망했다. 이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는데, 법명을 일컬어 설잠이라 했다”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경태 을해년(1455)’은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은 시기였다. 김시습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하며 출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의에 대한 분노를 승려가 되는 것으로 표출한 것은 성리학자의 충(忠)을 불교를 통해 드러낸 흥미로운 사례다. 이후 김시습은 1458년 봄 동학사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관서 지방을 유람했다. 

1481년(성종12) 이후 김시습은 잠시 환속해 결혼했지만, 그 부인이 사망하고 성종 13년(1482)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승려가 돼 방랑길에 올랐다. ‘부인이 사망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두타의 형상을 지었다’는 기록이 그 근거다.

이 기록에서 율곡 이이는 ‘머리를 깎고 옷가짐을 단정히 한 자가 두타라고 일컬어진다’고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조사(祖師) 형태의 불상을 조성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도 부인의 사망으로 인한 인생의 무상함과 의(義)를 지키려는 모습이 승려가 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김시습은 ‘충’과 ‘의’라는 유교적 덕목을 승려가 되는 것으로 표현했다. 아울러 불교 자체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의 정도도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시습의 불교 전문 저술의 제목을 보면, 그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인 천태·화엄의 교학과 조사선(祖師禪)의 세 분야에 대해 모두 최고 수준의 저술을 남긴 것을 알 수 있다. 즉 불교에서도 가장 고차원의 교리인 천태·화엄·선에 모두 능통했던 것이다. 이것은 김시습이 단순히 유교 덕목을 지키기 위해 승려가 된 것이 아닌, 불교 자체에 대해서도 높은 수준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1) 김정미, 「김시습-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사람」, 『인물한국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567&cid=59015&categoryId=59015

2)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7쪽.

3)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19쪽.

4)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20쪽.

5) 年二十一。景泰乙亥。讀書于三角山重興寺。人有自京城而還者。先生卽閉戶不出者三日。一夕。忽痛哭。盡焚其書。佯狂陷於溷廁而逃之。於是。削髮爲僧。名曰雪岑。윤춘년, 『梅月堂先生傳』.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69A_0020_010_0010_2003_A013_XML

6)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22쪽.

7) 未幾妻歿。復還山。作頭陀形。僧家。翦髮齊眉者謂之頭陀。이이, “매월당김시습전”, 「매월당집」, 『한국문집총간』.
http://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69A_0030_010_0010

8) 이창안, 「조선 초 김시습의 시대인식과 유불융합(儒佛融合)」,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1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325-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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