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칼럼에서 필자가 실수한 것이 있다. 그 실수는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전 편에서 “청한자”라는 호가 있다는 것에서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한국의 도교와 관련된 문헌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만큼 차후에 소개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지면을 통해 그 약속을 조금이나마 이행해보고자 한다.김시습은 조선 도교의 개조(開祖), 즉 조선 도교의 맥에서 시작점이 되는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사상사에서 중국의 사상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금까지 2회에 걸쳐서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과 승려로서의 모습을 살펴봤다. 김시습은 유학자로서 충(忠)과 절의(節義), 효(孝)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어릴 때 신동으로 일컬어지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의 유학 경전을 비롯하여 유학자로서 읽어야 되는 다양한 서적을 읽었다. 반면 모친의 사망을 비롯한 각종 경험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를 감행했다. 특히 김시습의 불교 전문 저술의 제목을 보면, 그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인 천태·화엄의 교학과 조사선(祖師禪)의 세 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앞 회차에서는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주목받았으며 효(孝)를 실천하고, 생육신(生六臣)으로서 절개를 지키는 등 유학의 이상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김시습은 이런 모습보다 승려로서의 모습이 더 유명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했을 때도 그는 승려 신분이었고, 이전에 언급했듯 그는 사후 유지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됐다. 또 부도(浮屠-승려가 죽은 후 사리를 모아놓은 탑)까지 조성됐다.이런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김시습은 출가와 환속,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출가했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모습만 보면 김시습의 사상이 불교에 경도됐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의 그의 삶은 유교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의 도사의 모습도 보여줬다. 나아가 김시습의 삶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세 가지 사상을 넘나드는 모습까지 확인된다. 그 예로 김시습의 많은 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유학자의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매월당(梅月堂)으로 일컬어지고, 법호는 설잠(雪岑)이었으며, 도교의 면모를 강조할 때는 청한자(淸寒子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허균이 『홍길동전』 으로 유명한 것처럼, 『금오신화』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여기에서 『금오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금오신화』는 실제로는 일종의 소설 모음집으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총 5개의 소설로 이뤄져있다. 소설의 내용들은 대개 인간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겪는 이야기들이다. 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