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당시 전두환의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미완으로 남은 진상조사…40여년 간의 분노

칠흑 같던 머리칼에는 어느덧 서리가 내렸다. 열정 넘치던 청춘의 시간도 황혼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벌써 40여년이 지난 20대의 기억은 여전히 너무나 가혹하기만 하다. 바로 어제같이 생생한, 지워지지 않는, 여전히 트라우마라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은다.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진행했다. 공식집계된 녹화사업 피해자만 1192명. 잇따라 터진 의문사 사건으로 인해 녹화사업을 공식 종료한 후에도 선도공작이라는 이름하에 그들의 사업은 계속됐다.

<투데이신문>은 5공 당시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 피해자들과 의문사한 피해자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를 통해 당시 이뤄졌던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을 살펴봄으로써 전두환 군사정권의 참혹함을 되짚어봤다.

지난 2019년 12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의 자택 앞에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가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지난 2019년 12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의 자택 앞에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가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자 우리를 협박하고 우리를 고문했던 당신들, 우리에게 밀고자가 되기를 강요했던 당신들로부터 우리는 살아남았다. 우리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강산이 4번 바뀔 만큼, 40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의 분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전두환, 당신과 아직도 당신에게 빌붙어있는 당신의 졸개들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 전두환씨에 대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들의 항의서한 중

지난 2019년 12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의 자택 앞에 이들이 모여들었다. 저마다 이름과 학교, 당시 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가 부여한 관리번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전두환을 구속하라’라고 외쳤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이하 강녹진)의 첫 행동이었다.

이들은 정부와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국회에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및 의문사 관련 모든 자료를 즉각 공개 ▲피해자들에게 자행된 반인륜, 반인권적 국가폭력에 대한 공개사과와 재발 방지책 마련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기본법 개정’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최종 배후이자 책임자인 전두환과 책임자, 관련자들의 사죄를 요구했다.

이들은 제5공화국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실시된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의 피해자들이다.

5공 당시 보안사령부 대공처의 '대(對)좌경 의식화 불순분자 대상 대공활동 지침' 중 일부. '녹화공작'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5공 당시 보안사령부 대공처의 '대(對)좌경 의식화 불순분자 대상 대공활동 지침' 중 일부. '녹화공작'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5공 당시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

2005~2006년 관련 조사를 진행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1980년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확산되자, 시위 관련 학생들을 학교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강제징집을 동원했다. 1982년부터는 강제징집자들에 대해 생각과 이념을 바꾸는 녹화사업과 함께 학교첩보를 수집해 오도록 요구하는 등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며 회유와 협박, 고문 등을 가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이었던 최경조씨는 1982년 청와대에서 열린 전반기 업무보고 자리에서 운동권 출신 입대자들이 군내 반정부 낙서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고, 이에 전두환씨가 “야 최경조, 너 인마 뭐하는 거야”라고 질책해 녹화사업 계획을 세웠다고 진술했다. 의문사위는 보안사의 특성과 보안사령관 출신인 전씨와 보안사의 특수한 관계를 볼 때, 당시 전씨의 이 같은 발언은 ‘실질적인 지시’로 판단할 수 있다고 봤다.

그렇게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이 실시됐고, 이후 1984년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 대한가톨릭대학생 전국협의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명동천주교회청년단체 연합회 등 5개 단체가 ‘강제징집문제 공동조사보고서’를 작성·발표하면서 녹화사업은 공론화됐다.

이는 곧 정치쟁점화 됐다. 1984년 3월 13일 국회 국방위원회 대정부 질의에서 ▲강제징집의 법적근거 ▲녹화사업의 진상 ▲학원시위 관련 입영자 중 6명의 사망경위 등을 밝히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당시 학원·종교계·재야 등지에서도 국방의 의무를 정치 책략화하는 반민족적 행위라며 강제징집 및 지도휴학제 폐지, 사망자 6명에 대한 사인규명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처럼 녹화사업으로 인한 논란이 거세지자,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1984년 12월, 녹화사업을 공식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1989년경까지 계속되는 등 그들의 공작은 계속 이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녹화사업과 관련해 ▲정성희(연세대 81학번, 82년 7월 사망)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83년 5월 사망) ▲김두황(고려대 80학번, 83년 6월 사망) ▲한영현(한양대 81학번, 83년 7월 사망) ▲최온순(동국대 81학번, 83년 8월 사망) ▲한희철(서울대 79학번, 83년 12월 사망) 등 6명이 의문사했다. 이후 선도공작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김용권(서울대 83학번, 87년 2월 사망) ▲최우혁(서울대 84학번, 87년 9월 사망)씨가 의문사했다. 비슷한 시기 의문사한 ▲이진래(서울대 77학번, 82년 1월 사망)씨도 보안대에 의한 피해자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의문사 피해자 이외에도 제대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피해자들도 많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1982년~1984년까지 녹화사업 피해자가 1192명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이 같은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 사건과 관련해 2000년 10월 국민의 정부 당시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고, 2005년 5월 참여정부에서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돼 관련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보안사의 후신인 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등 관련 부처의 비협조와 조직적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진상조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그들이 모였다.

“우리가 겪었던 일이 다시 되풀이될 줄은 몰랐다. 계엄령을 꿈꿨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걸 보면서 ‘이건 우리가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당사자인 우리가 반드시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가졌다.” - 강녹진 조종주 사무처장

이들이 지금 미완으로 남은 5공 당시 강제입대, 녹화·선도공작의 진상규명을 외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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