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 실시된 강제입대·녹화공작…시기·개인별 천차만별
문무대 사건, 운동권뿐만 아니라 비운동권 피해자도 발생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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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당사자들에게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으로 인한 피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강녹진)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조종주씨의 말처럼 당사자들에게 5공 당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선도공작으로 인한 피해는 과거형에 머물지 않는다.

군내에서 녹화·선도공작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 의문사 이외에도 제대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고문으로 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 등 살아남은 이들도 당시의 트라우마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인 양창욱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인 양창욱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악몽 속으로

양창욱(고려대 80학번)씨는 1983년 3월 친구와 함께 강제징집 됐다. 학교에서 단대별 연합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누군가의 노트가 성북경찰서로 흘러 들어갔고, 거기서 자신과 친구들의 이름이 나왔다. 지독했던 20대의 악몽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긴급체포돼 성북서에서 조사받길 이틀, 긴급체포 시한이 종료되자 근처 여인숙에서 조사는 계속됐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양씨와 친구 김두황(고려대 80학번)씨 2명은 그 자리에서 바로 강제징집됐다.

성북서에서 기동대차를 타고 향한 103보충대에서는 키와 몸무게 정도만 묻고는 얼추 맞는 군복을 던져줬다. 강원도 삼척의 훈련소를 거쳐 고성의 철책선까지 올라갔다. 당시 강제징집자들은 훈련소에서 배정받은 주특기에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 전방 철책으로 끌려갔다.

3개월이 흘렀다. 그사이 돌아온 아들의 옷가지를 받아든 아버지는 충격으로 사망했다. 상심에 찬 양씨에게 편지로 격려와 희망을 건네던 친구는 83년 6월 18일, 머리에 4발의 총상을 입고 의문사했다.

녹화공작이 마무리된 이후 피해자들이 날인한 서약서와 선서문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녹화공작이 마무리된 이후 피해자들이 날인한 서약서와 선서문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낙인찍힌 청춘

양씨와 김씨 등 강제징집자들에게는 ‘특수학적변동’이라는 낙인이 뒤따랐다. 낙인찍힌 젊은이들에 대한 보안대의 녹화공작은 시기와 개개인별에 따라 차이가 컸다. 누군가는 끌려가서 구타만 당하다가 나온 이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특별한 구타나 협박 없이 녹화가 이뤄진 경우도 있었다.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진 82년 이후부터는 체계적인 녹화사업이 이뤄졌다.

83년 3월 강제징집된 양씨의 경우가 그랬다. 자대로 옮겨 본격적인 군생활이 시작되면서 보안대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친구가 의문사했다.

그 후 3개월 뒤인 그해 9월, 양씨는 보안사 대공분실이 있는 경기도 과천으로 끌려갔다. 바지만 입은 채 일주일 동안 밤샘 조사가 시작됐다. 낮에는 가만히 내버려뒀다가 밤만 되면 조사가 이어졌다. 계속되는 취조와 구타 끝에 양씨의 손에는 자필로 쓴 전향서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녹화가 마무리됐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있었던 일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협박과 함께 양씨는 을지로 3가의 진양아파트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프락치 공작’이 진행됐다.

당시 입대한 지 6개월여가 돼가던 양씨는 첫 정기휴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녹화공작을 마무리한 보안대는 이어서 휴가기간 동안 수행할 미션을 내렸다. 프락치 공작 지시였다.

‘친구를 배신할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죽을 것이냐’라는 선택의 기로가 양씨를 옥좼다. 휴가 첫날 아버지의 산소 앞에서 하루종일 펑펑 울었다. 고민 끝에 일단 학교로 향했다. 마침 후배가 성북서에 체포돼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찰과 보안대 사이의 정보 시차가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이미 경찰에 알려진 정보를 갖고 진양아파트로 돌아갔다. 양씨의 보고에 보안대는 만족했다. 양씨에게 이틀의 추가 휴가를 내줬고, 이후 더 이상의 프락치 공작 지시는 없었다.

양씨는 당시 자행된 녹화사업·선도공작에 대해 “굉장히 잔인한 일이다. 젊은 청춘을 강제로 끌고 와서 어떻게 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강압하는 것 자체를 20살짜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나”라고 토로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저항하던 친구들도 있었고, 그래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일부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며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린 학생들을 이용했다”며 “이건 국방의 의무를 빙자해 인간을 옥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5공 당시 보안사 대공처의 '특수학변자 심사 및 순화계획 보고' 중에서 협조자(프락치) 활용 관련 내용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5공 당시 보안사 대공처의 '특수학변자 심사 및 순화계획 보고' 중에서 협조자(프락치) 활용 관련 내용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운동권만이 아니었다

강제입대는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1981년 11월, 학생 군사훈련을 위해 문무대로 향했던 고려대와 외대 1학년 159명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퇴학당하고, 군대로 끌려갔다. 이른바 ‘문무대 사건’이다. 이 사건은 5공 당시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의 초반부에 벌어졌다.

군대 한가운데에서 학원병영화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친 문무대 사건으로 고대생 109명과 외대생 50명이 제적당해 군대로 끌려갔다. 문무대 사건으로 당시 운동권 서클 등에 가입하지 않았던 비운동권 학생 다수도 제적당한 뒤 강제입대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문무대 사건으로 강제입대 당한 서지석씨(외대 81학번)는 “운동권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일반 학생들은 얼마나 더 트라우마에 시달렸겠나. 지금도 시달려서 우리가 보상받을 길이 생겼다고 해도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며 “(운동권이었던) 나야 나름 생각이 있었는데도 괴로웠는데, 아무 생각 없이 당한 일반적인 친구들은 얼마나 괴로웠고, 그 시절이 증오스럽겠나. 정말 꿈이 사라지지 않았나”라고 토로했다.

당시 시위 주범으로 몰린 서씨도 녹화공작을 받았다. 82년 초 입대한 그가 녹화공작을 받기 위해 과천 대공분실로 끌려간 건 84년 초였다. 그러나 그 녹화과정의 양상은 다소 달랐다.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인 서지석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인 서지석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그에게는 수일 동안 부르주아 기독교에 대한 저항을 담은 해방신학책을 읽게 하고 잘못된 점을 글로 쓰라고 한 게 전부였다. 그는 대공분실에서의 첫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보고 뭘 불라더라. 그래서 내가 ‘우리가 데모, 운동권하고 관계없는 거 아시지 않느냐’면서 모른다했더니 한 대 때리더라. 무지하게 셌다. 그때까지 맞은 것 중에서 제일 아프더라. 첫날에 들어가서 맞았고, 그다음부터는 책(해방신학)을 가져와서 읽고 문제점을 쓰라고 했다.”

녹화공작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프락치 공작 지시는 없었다. 다만 잦은 휴가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프락치로 오해받은 일은 있었다.

한편 서씨는 다수의 비운동권 학생 피해자가 발생한 문무대 사건이 고대와 외대를 희생양으로 삼아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의도 하에 만들어진 보안사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문무대에 입소하는 모든 대학생들은 다 시위를 벌였고, 고대와 외대의 시위가 특별히 더 문제될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이뤄진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이 “정권재창출을 위한 전두환의 치밀하고 계획된 사업”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녹화·선도공작은) 단순히 운동권 학생을 강제징집해서 정신상태를 바꾸는 게 아니다”라며 “강제징집은 정권재창출을 위한 초보적인 단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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