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화사업·선도공작 관련 의문사 피해자들
미완으로 남은 진상조사…“한 풀릴 때까지”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관련 의문사 피해자들. 왼쪽 상단부터 김두황(고려대 80학번), 김용권(서울대 83학번),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이진래(서울대 77학번), 정성희(연세대 81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최우혁(서울대 84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관련 의문사 피해자들. 왼쪽 상단부터 김두황(고려대 80학번), 김용권(서울대 83학번),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이진래(서울대 77학번), 정성희(연세대 81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최우혁(서울대 84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그때 우혁이가 이등병이었다. 근데 보안대에서 괴롭히지, 선임들이 괴롭히지, 또 훈련 나가면 두들겨 패고. 걔가 갈 때가 어디 있었겠나. 갇힌 공간에서 얼마나 막막했겠나.”

담담히 대화를 이어가던 환갑을 훌쩍 넘긴 형은 20대에 스러져간 동생의 마지막을 떠올리다 일순 감정이 흔들렸다.

강제징집으로 함께 입대했다가 혼자서 살아 돌아온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40여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60대를 앞둔 그 역시 여전히 20대로 남아있는 친구를 떠올리면 먼저 말문이 막힌다.

“친구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 원이 있기 때문에 의문사 사건에 대한 내 한은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갈 거다.”

이처럼 5공 당시 강제징집과 녹화·사전공작 관련 의문사 피해자들의 가족과 지인들은 그들을 기리며 그날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1984년 종교 관련 단체들이 공동명의로 발표한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 보고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1984년 종교 관련 단체들이 공동명의로 발표한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 보고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았다

양창욱씨와 함께 1983년 강제징집된 김두황씨는 입대 후 3개월 만에 의문사했다. 함께 입대했고, 당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상심에 젖어있던 자신에게 힘을 북돋아주던 친구 김씨의 죽음은 양씨에게 충격이었다.

“그 상태로는 가만히 못 있겠더라. 두황이가 죽었다는데 내가 견딜 수 없지 않나.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포상휴가를 받아 학교에 와서 일주일 내내 울다만 갔다.”

김씨의 죽음으로 그 가족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막내아들이었던 그가 사망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그 후 또 1년이 안 돼 어머니 역시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사진을 보며 매일 같이 그리워했다. 어머니를 걱정한 형들은 동생의 사진을 숨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모습을 사진과 똑같이 그려내며 사무친 그리움을 놓지 못했다.

당시 군은 김씨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냈다. 헌병대는 김씨가 용변을 본다며 근무지에서 이탈한 뒤 머리에 스스로 총을 쏴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 몇 가지 의혹이 나왔다. 당시 헌병대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유서가 나왔다고 했지만, 그 유서는 ‘끝’이라는 김지하 시인의 작품이었고, 그 필적 역시 김씨의 것이 아니라고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또한 김씨의 사망과 관련해 당시 증인들이 총성을 들은 시점과 장소 등 여러 의문점을 찾아내 지적했지만, 타살 여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사건은 현재에 이르고 있다.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김두황씨의 추모식 모습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김두황씨의 추모식 모습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제공

막내동생은 돌아오지 못했다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해 서울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대견한 막내동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선 시위와 집회에 참가하다가 최루탄에 발등이 부서지기도 했다. 1987년 4월, 어머니는 학교를 자퇴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려던 막내아들을 군대로 보냈다. 사회에서 잠시 떼어놓으면 운동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최우혁(서울대 84학번)씨는 그로부터 5개월 후인 87년 9월 의문사했다. 가족들이 마주한 그의 마지막은 온몸이 까맣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당시 헌병대는 최씨가 2급 비문분류 예정 문서를 일부 세절한 것과 관련해 지적 받을 것을 염려했고, 힘들다는 말을 자주했다면서 스스로 분신했다고 사건을 결론 지었다.

반면 유족 측은 최씨의 죽음은 선도공작으로 인한 압박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최씨가 수시로 보안대에 불려갔으며, 부대 내에서도 위병으로서 자세가 안 나온다며 ‘서울대 뒷구멍으로 들어갔느냐’라는 모욕을 받고, 세면장 뒤에서 구타당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시기적으로 최씨의 의문사는 선도공작이 시행되던 시기에 벌어졌다. 1984년 잇따른 군내 의문사로 논란이 되면서 마무리된 녹화사업은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2004년 2기 의문사위는 보안대가 최씨의 군 입대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과정에 개입하면서 심리적 압박감을 줬다며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을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기무사의 협조 거부로 인해 보안대의 구체적인 공작 내용은 확인할 수 없어 명확한 진상규명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최우혁씨의 형인 최종순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5공 당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최우혁씨의 형인 최종순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그렇게 막내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이후 투사가 됐다. 최씨의 사망 직후부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활동을 시작해 30여년간 연대했다. 1999년에는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420여일간 노숙농성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군대로 보내 죽게 했다는 자책감이 컸다. 그날 이후 한쪽 눈이 멀고 말을 잃었다. 그리고 1992년 2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최씨의 형 최종순(63)씨는 동생을 앗아간 녹화·선도공작에 대해 “사람을 어떻게까지 쓸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봤다. 그는 “(녹화·선도공작에서 전두환은) 사람을 소모품으로 여긴 거다. 이유는 ‘시끄러우니까’였다. 시끄러우니까 보안사령관을 시켜서 (강제징집) 보내라 했다”며 “가장 인명을 경시하는 군에서, 더구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은 보안대의 시각으로 사람을 관리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5공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자신들에게 가장 비판적이었던 학생들에 대해 수년간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의문스런 죽음들이 있었고, 공작 과정에서 이뤄진 협박과 고문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제대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형·동생을 잃었고, 친구를 떠나보냈다. 살아남은 피해자들도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진상조사는 당시 기무사(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의 비협조와 조직적 저항에 직면하며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들은 당사자인 자신들이 과거를 청산하겠다며 다시 힘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전두환씨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를 향해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및 의문사 관련 모든 자료 즉각 공개 ▲전두환과 책임자, 관련자들의 사죄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이런 그들의 심정은 친구를 잃었고, 그 자신 역시 피해자인 양창욱씨의 말이 대변한다.

“그 안에 갇혀있었던 순간 느꼈던 트라우마들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또 죽은 두황이는 살아 돌아올 수 없지 않나. 죽을 때까지 아픔을 안고 가야 한다. 죽은 두황이를 포함해 이 한이 풀릴 때까지 치유·회복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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