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면, 6월에는 6월 민주화 항쟁(이하 6월 항쟁)이 있다. 수십년간의 군부독재를 끊어낸 6월 항쟁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각계각층의 시민운동이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6월 항쟁은 4·13 호헌 조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그중에서도 이한열 열사의 사망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됐다. 우리에게 이한열 열사는 국가포격의 무고한 희생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는 피해자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대표 학생운동가였다. 본지는 학생운동가로서의 이한열 열사의 삶과 그의 죽음이 남긴 대한민국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6월 항쟁을 조명해보는 <6월 그때, 그 사람>을 기획했다.

지난 2017년 6월 항쟁 30주년 기념  ⓒ뉴시스
지난 2017년 6월 항쟁 30주년 기념 민주대행진 ⓒ뉴시스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1987년 6월 10일 서울 주교좌성당 종탑에서는 42년간의 독재를 매듭짓자는 시민들의 염원을 담은 묵직한 종소리가 마흔두번 울렸다. 그렇게 역사적인 6월의 서막이 열렸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정권은 사회 통제를 점차 강화해 나갔다. 시민들은 정부의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맞선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4·13 호헌 조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 사망은 전국민이 들고 일어선 6월 항쟁을 촉발시켰다.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6월 항쟁은 끝내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렸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역사에 굵직한 한 획을 그었다. 군부 세력의 장기 집권을 끊어 냈고 학생운동에서 시작해 시민운동, 노동자 운동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6월 항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향한 발걸음을 한발 더 앞당겼다.

◇6월 항쟁을 부른 그날들

故 박종철군 ⓒ뉴시스
故 박종철군 ⓒ뉴시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 이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정권 말기인 1980년대 중·후반에 극에 달했다.

그 무렵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故 박종철은 1986년에 있던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그해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출소 이후에도 박종철은 학생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박종철은 이듬해 자신이 머물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 의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됐다. 당시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 중이었고, 그가 소속돼 있던 ‘대학문화연구회’의 후배인 박종철을 잡아간 것이다.

경찰은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겠다는 명목으로 박종철을 폭해하는 것은 물론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무자비하게 자행했다. 밤새 계속되는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한 박종철은 다음날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숨을 거뒀다.

경찰은 고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언론에는 ‘냉수를 몇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이후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박종철의 시신을 부검했던 부검의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경찰의 고문 의혹이 불거졌고, 결국 사건 발생 5일 후 경찰은 사실을 인정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를 은폐하려 했던 전두환 정권은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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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 ⓒ뉴시스

4·13 호헌조치

1980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해 대통령에 자리에 올랐다.

1985년 12·12 총선을 치른 이후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 결여, 비민주성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됐고 야당과 재야세력의 주도 하에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 논의가 이뤄졌다.

그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발하면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이에 불안함을 느낀 전두환은 그해 4월 13일 특별담화를 열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겠다고 선언한다.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겠다’는 게 대외적인 명분이었으나, 실상은 정권을 놓지 않기 위한 계략에 불과했다.

이는 제5공화국 헌법에 기초해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및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하고 1988년 2월에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조치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 여론은 외면하고 기존 헌법을 근거로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호헌 조치에 분노했고, 전국적으로 개헌을 촉구하는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다.

故 이한열 열사 ⓒ뉴시스

이한열 사망 사건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년 미사 자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됐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리고 같은 달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꾸려졌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계획했다.

규탄대회를 하루 앞둔 9일, 1000여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이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결의대회’를 열였다.

이날 일부 전경들은 학생들을 향해 마치 총을 쏘듯 최루탄을 발사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돼 약 한달간 사경을 헤매던 이한열은 7월 5일 만 20세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뒀다.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 학생을 비롯해 일반 시민들, 정치인, 재야단체 회원까지 약 7만여 명이 참석할 만큼 많은 이한열의 죽음은 국민의 관심을 받았고, 6월 항쟁의 규모를 더욱 커지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20일간의 기록이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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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촛불 혁명 ⓒ뉴시스

군사독재의 몰락

10일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반정부 민주화 시위, 6월 항쟁이 시작됐다. 29일까지 약 20일간 이어진 6월 항쟁에는 최대 100만여명이 참여할 만큼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확대됐다. 회사원들, 넥타이 부대들의 시위 참여 덕분에 학생 항쟁에서 시민 항쟁으로 변화한 영향이 컸다. 시위 규모가 확대되는 만큼 경찰의 물리적 통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당시 노태우는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시민들이 요구하는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을 적극 건의해 승낙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을 더불어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 ‘6·29 선언’을 발표했다.

전두환이 6·29 선언을 수용하며, 같은 해 10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고,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졌다. 6월 항쟁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물거품 되며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기는 했으나 군사적 독재 정치가 종식을 끌어냈다.

한국 시민운동의 발전

6월 항쟁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빈민, 농민 등이 시민 사회 전반에 걸쳐 전국에서 전개된 운동이었다. 각계각층이 참여한 6월 항쟁은 독재 정권이 몰락하면서 그동안 억눌려왔던 시민들의 민주화 욕구를 폭발시켜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노동계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과거 노동자들은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된 임금을 요구하지 못했다. 정부의 노동 탄압으로 임금협상은 물론이고 노동법에서 보장하는 최소한이 파업도 꿈도 못 꿨다.

그러나 6월 항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직접 노조를 구성해 사용자와 정부에 맞서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공공연하게 자행됐던 부당노동행위를 비판했다. 노동자에 대한 인격적 대우와 노동환경의 민주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실제 6월 항쟁 이후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발생한 노동자 파업 건수는 이전 10년간 일어난 파업 건수의 2배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6월 항쟁은 한국에서 근대적인 임금노동자라는 개념이 들어선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의 집단적 노동자 운동을 이끌어 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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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은 현재 진행 중”

우리는 수많은 항쟁 역사를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6월 항쟁이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시민 모두가 참여해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데 있다.

6월 항쟁 당시 중앙일보 기자로 박종철 사건을 최초 보도했던 성균관대학교 신성호 교수는 성공적인 6월 항쟁은 사회 각 분야의 시민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시민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다른 민주 항쟁과 달리 6월 항쟁은 특정 집단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각 분야의 시민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나온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언론은 박종철군의 억울한 죽음을 처음 세상에 알리고 지속적인 추적을 통해 죽음을 밝혀냈다. 박군의 시신을 처음 검안한 의사는 경찰의 고문행위 가능성을 양심적으로 알렸다. 또 박군 시신을 화장해 모든 고문 흔적이 사라질 수 있었지만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검사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항쟁 진행 과정에서도 종교계 등의 노력들도 있었다.”

6월 항쟁은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민주화운동이지만 신 교수는 6월 항쟁은 완성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고 봤다.

“6월 항쟁이 그 한번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6월 항쟁 이후 시민들이 꿈꾼 사회는 정말 민주적이고,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다. 6월 항쟁 이후 여러 정권을 거치며 현재까지 과연 우리 사회가 시민들이 꿈꿨던 사회가 됐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100점은 아니라고 본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6월 항쟁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완성형이 아니라 완성해나가는 과정,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아직 1987년을 살아간다. 6월 항쟁은 성공했지만 완성되진 않았다.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혁명, 부당한 권리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시대의 또 다른 6월 항쟁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려 할 때마다, 무너지려 할 때마다 1987년 그날을 기억하며 미완의 6월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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