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을 고소한 피해여성에 대한 2차 가해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박 전 시장은 자신의 성폭력에 대한 고소가 이뤄진 뒤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한 채 비난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의혹제기만 됐을 뿐 밝혀진 것은 없다”며 피해자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박 전 시장 사망의 책임을 피해자에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2차 가해는 정치권, 언론, 법조계 등에서 모두 일어났습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지난 15일 피해자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며 ‘피해자’가 아닌 ‘피해 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민주당 여성 의원들도 앞서 지난 14일 서울시 차원의 진상조사와 당 차원의 성비위 일제 점검을 촉구하며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을 일방적 주장이라고 단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비판이 높아졌습니다. 이 같은 호칭은 피해자에 대해 ‘당신이 피해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라는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대구지방검찰청 진혜원 부부장검사는 자신의 SNS에 박 전 시장 등과 팔짱 낀 사진과 함께 “나도 성추행을 했으니 자수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습니다.
진 검사는 “몇 년 전 종로의 한 갤러리에 갔다가 평소 존경하던 분을 발견했다. 덥석 팔짱을 끼는 방법으로 성인 남성 두 분을 동시에 추행했다”며 “여자가 추행이라고 주장하면 추행”이라고 피해자를 조롱하는 글을 게시했습니다.
그는 “민사 재판도 기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면 2차 가해니 3차 가해니 하는 것 없다”면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문제를 공론화한데 대해서도 비난했습니다.
이에 한국여성변호사회(이하 여성변회)는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공정하고 진중한 자세를 철저히 망각하고 피해자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경솔하고 경박한 언사”라며 “검찰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키고 국민에 대한 예의를 저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여성변회는15일 대검찰청에 공문을 발송해 진 검사를 징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최근에는 라디오, 팟캐스트 등을 진행하는 방송인 박지희씨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발언을 해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박씨는 14일 공개된 팟캐스트 ‘청정구역’ 202회에서 “왜 당시에는 신고하지 못했다 묻고 싶다”며 “4년 동안 뭘 하다가 이제 와서 김재련 변호사와 함께 세상에 나서게 된 건지 궁금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라디오, 유튜브,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이동형 시사평론가도 지난 15일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미투는 신상을 드러내고 하는 것”이라며 “박 전 시장은 극단적 선택을 해 인생이 끝났는데 (피해자는) 숨어가지고 말야”라고 말했습니다.
박씨와 이 평론가의 발언은 피해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2차 가해입니다.
피해자가 당시 피해사실을 알리지 못한 이유는 박 전 시장의 ‘위력’ 때문입니다. 박 전 시장에 대한 문제제기는 피해자 입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피해자 측은 불이익을 우려해 신고가 어려웠고, 특히 비서실 근무자에게는 더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 측에 따르면 피해자가 비서로 일한 4년간 6개월마다 인사이동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지난해 7월에야 다른 부서로 이동했습니다. 지난 2월에는 다시 비서로 일하라는 요청에 “성적 스캔들의 시선이 있을 수 있다”고 거절했으나 인사담당자는 문제에 대한 파악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측은 서울시가 사실상 일상적인 성폭력을 조장·방조하고 묵인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피해자가 자신의 신상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박씨와 이 평론가의 발언과 같은 2차 가해를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이 같은 비난이 쏟아지는데, 신상을 공개한다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질 것입니다.
실제로 박 전 시장의 사망 이후 일부 누리꾼들은 피해자에 대한 신상털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피해자의 신상을 보호하고 조직 내에서 신상공개 및 유포, 인신공격 등이 이뤄지지 않도록 공문 시행 조치에 나서는 한편 2차 가해가 확인될 경우 징계 등을 통해 엄정 대응할 것을 밝혔습니다.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 안태근 전 검사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 서지현 검사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성추행 사건에 대해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입니다. 이는 박 전 시장이 지난 1992년 서울대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를 변호하면서 강조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서울대 화학과 신 교수가 조교에게 신체접촉을 강요하다 거부당하자 재임용에서 해당 조교를 탈락시키며 알려진 사건입니다.
무려 6년간 법정공방이 이어진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최종 승소하면서 성희롱이 범죄임을 명백히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박 전 시장은 이후에도 여성인권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서울시장으로서는 시장 직속의 성평등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울시 공무원의 성범죄에 대해서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을 적용해 단호히 대응하는 등 여성인권 향상을 위한 정책을 끊임없이 펼쳐왔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박 전 시장의 사망 이후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일삼는 것은 박 전 시장이 평생을 추구하고 강조해 온 뜻을 기억하는 길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박 전 시장의 뜻을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한다면, 박 전 시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피해자의 편에 서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