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영 작가
ⓒ한만영 작가

한만영의 작품은 그림인가, 조각인가, 입체인가? 그는 이러한 우리들의 질문에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의 그림이 어떻게 불리든 크게 개의치 않고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유행에도 관심이 없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그리든 너그럽다. 되려 그림에도 유행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물어 올 판이다.

70년대 작업을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작가가 모더니즘 미술에 경도돼 추상 작업을 펼쳐 올 때도 그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초기에 시작했던 일련의 연작 시리즈 ‘공간의 기원’과 ‘시간의 복제’라는 작업들을 지속해오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미련과 집념, 소신을 두루 갖춘 작가로 불릴 만하다. 이런 관점에서 아직도 자기 스타일을 그리는 드문 작가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미술의 방식에서 온전히 자유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여전히 ‘그린다’는 회화에 관한 아주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의 회화적 대상들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는 방법은 사실주의자들이 흔히 써 왔던 기술이자 방법이다. 특히 대상을 감쪽같이 그려낸다든가, 실제처럼 포착해내고 표현하는 것은 하이퍼 리얼리스트들에게 빈번하게 볼 수 있었던 테크닉이었다.

ⓒReproduction of time-Lady Acrylic on Canvas  117x89.3cm 2019
ⓒReproduction of time-Lady Acrylic on Canvas 117x89.3cm 2019

그렇다면 그의 아이디어 즉 ‘기존에 이미 알려진 명화들을 감쪽같이 복사해서 화면 속에 끌어들이는 방법’의 기술적 표현법은 다분히 극사실주의 작가의 그것으로 보인다. 그의 회화적 원형을 극사실주의 또는 하이퍼 리얼리즘에서부터 볼 수 있는 근거는 <시간의 복제 84-5 116.8 X 91 Cm> 이라는 고야의 1808년 5월3일 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는 달력과 책상 등이 있는 작품을 참고 해보자. 그는 이 작품에서 그 어떤 상상력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충실하게 묘사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작품은 구성법이나 병렬법에 있어, 사물 일부를 확대하거나 세부를 클로즈업하지는 않기 때문에 극사실주의 작가와는 뚜렷하게 변별된다. 자세히 보면 그는 많은 이미지를 모든 공간으로 불러내는 작가다. 그는 일찍이 학교시절부터 가장 데생을 잘하는 두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고 한다.

이는 즉 그가 화면에 끌어들이려 하면 언제나 어떤 것이든 다 그려낼 수 있는 그런 탁월한 묘사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눈속임의 정밀함으로 우리를 허구의 공간으로 빠지게 하거나 착각에 빠뜨리게 하는 화법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의 작품에 기본적인 제작과정은 ‘그리고’ 가져와 붙이거나 ‘만드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만든다는 것은 그린다는 행위와는 별개의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입체를 다루는 예술가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그의 그림으로 되돌아가 보자.

사실 그의 그림은 다른 여느 작가보다 매우 선명하게 우리들의 뇌리에 명료하게 남아 있어 떠올리고 할 것도 없다. 1978년 <공간의 기원>이란 명제와 <시간의 복제>라는 타이틀 아래 그는 20여년 이상의 작업을 해 왔기 때문이다.

ⓒReproduction of time 87-5 Mixed Media in Box(Objects&amp;Mirror)116x60x9.5cm 1987 Young Eun Museum of Art, Gwangju, Korea
ⓒReproduction of time 87-5 Mixed Media in Box(Objects&Mirror)116x60x9.5cm 1987 Young Eun Museum of Art, Gwangju, Korea

음화로 처리된 모나리자의 모습, 나부가 물통을 둘러메고 물을 쏟는 앵그르의 명화 ‘샘’이 있는 달력의 작품 <고야의 옷을 입은 마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 등 그의 기존 명화들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기법은 이제 한만영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전문 특허처럼 보인다.

그의 이런 작업들은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조명됐다. 어떤 이들은 그가 우리에게 익숙한 명화들을 빈번하게 빌리면서 작업을 하는 관계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패러디나 차용, 혼성모방의 시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특히 미술평론가 이용우는 “이론적 분류와는 다르게 형식이나 담론에 의해 규명하는 지식과 관념의 가변성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강하다”며 “그러한 결정권을 행사하는 자들에 의해 파괴된 본질의 향수를 즐기는 태도까지 엿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이일 역시 그의 회화를 “빌려온 이미지를 자신의 회화적 계기로 삼고 있다”며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화적 현존성”이라고 정의 내린 바 있다. 

필자도 평론가 이일이 지칭하는 것처럼 ‘빌려온 이미지를 자신의 회화적 계기로 삼고 있다’ 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먼저 그가 즐겨 인용하는 명작들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유명하고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그림들이다. 더욱이 이 그림을 그린 작가들까지도 쉽게 알 수 있는 그림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주 잘 알려진 그림의 일부분을 자기의 작품 어느 한 곳에 그대로 복사(複寫)하거나 주요한 회화의 구성요소로 정교하게 치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종종 사용해온 것으로, 예를 들면 전혀 상관없는 물체들의 결합을 통해 의식의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데페이즈망(Depaysement) 수법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의 복제-로마
ⓒ시간의 복제-로마

나는 궁극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합성, 차용, 또는 인용하는 그의 목적에 대해 관심이 있다. 그는 이 점에 관해 비교적 명백하게 그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모든 평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그의 작품에 뿌리를 캐는 발언을 보자. ‘내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분명히 또 하나의 그림이 중첩돼 있다’, ‘이미 보아왔던 명화들 그것들은 나의 화면 속에서는 한낱 장치물일 뿐이다’, ‘그림에 몰입할 때 나는 장치물을 배치하고 기획하고 설계하는 환상적인 도시 계획자와 같지만 결국 내가 의도하는 것은 장치물이 아니라 그것이 배치됨으로써 조성되는 공간성의 조화’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작품에 관한 발언은 매우 장치적인 것만큼 정치적이기도 하다. 그가 회화공간에서 어느 특정한 이미지를 인용할 때 그는 유명한 이미지를 선택하고 배열한다. 그리고 이미지의 선택이나 배열은 가장 서양적인 것과 가장 동양적인 것 또는 한국적인 이미지나 색채가 강한 대표적인 이미지들과 산뜻한 형상의 그림들을 차용한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에게 친근한 대상의 이미지로 더 이상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대표성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 이미지에는 익명성이 없다. 대상을 고르는데 그가 얼마나 대중적인 인상을 고려하는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선택하는 대상은 결코 하나의 소도구로 불릴 만한 장치물이 아니다. 하나의 완벽한 오브제 또는 이미지로 회화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작품의 구성요소다.

그의 작품을 공간 속에 놓인 대상으로 볼 때, 공간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구성요소라는 점이다. 짜임새를 위해 작품 공간 안에서 고뇌하는 이미지의 차용에 관한 선택과 고민은, 사실 그가 우리에게 보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할 것인가와 직접 연결돼 있다.

ⓒReproduction of time-Myth Mixed Media in Box&Objects(Mirror) 90x51x9.5cm 1986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Reproduction of time-Myth Mixed Media in Box&Objects(Mirror) 90x51x9.5cm 1986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임두빈은 “그는 과거의 이미지를 미래지향적 임지와 관계를 맺게 한다거나 수수께끼 적인 의미의 울림을 주는 작은 오브제 및 흔적들과 결합해 새로운 회화공간을 탄생시킨다”고 말했다. 

서성록은 “작가는 원작 복사를 단순히 그림을 예쁘게 꾸미면서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함축성을 가지는 시간과 공간, 사실과 해석, 원전과 평가, 그리고 독창성과 재창조성 등의 문제와 연결해야 한다”면서 “그림의 원래적 의미와 현재적 의미 간의 차이점과 그 결과로서 추출되는 자신의 작품에 관한 개별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공간의 기원’이라는 주제를 넘어서서 이제는 ‘시간의 복제’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작품이 상상력을 주는 방법에서 훨씬 간결한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전에는 밝고 경쾌한 이미지를 끌어다 썼지만 최근 그의 이미지의 채집은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다. 이전의 작업이 번역소설을 읽듯이 했다면, 지금은 다소 난해한 시를 읽듯이 빛에 중요성이 매우 강조된 새로운 독법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을 가져다 놓는다면 우리는 그 사물에 대한 의미파악이나 그 물체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그런 단독적인 사물의 의미를 서둘러 묻지 않는다. 하나의 오브제 하나의 사진을 붙이고 병렬하는데 아무런 의미 없이 오브제를 붙이겠는가. 그는 무의미한 것처럼 이야기할 뿐이다.

그간 그의 작업은 각각의 오브제들을 한 화면에 조립하고 몽타주 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선호했으며, 그가 몽타주 하는 것에는 각각의 공통점이 있었다. 서로 시간의 차이가 있기도 하고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있듯이 공간의 차이가 가로질러 있었다. 

게다가 그 몽타주에는 일정한 차례와 질서가 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이자 축인 ‘완벽한 조형의 추구’라는 한 유미주의자의 형식 같은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작업도 30여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요즈음 가장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Reproduction of time-K ,Beauty Mixed Media on Canvas 193.4x130.3cm 2017<br>
ⓒReproduction of time-K ,Beauty Mixed Media on Canvas 193.4x130.3cm 2017

그는 아직도 어떤 이미지를 주기 위해 ‘비천상’이나 ‘반가상’, ‘닉케’의 날개 등을 하드보드로 꼼꼼하게 오려서 붙인다. 그에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붙인다는 것은 그가 줄곧 써오던 방법이라서 그다지 새롭지 않다. 이제 그의 작업은 절대적 조형성에 주목해서 사물을 병렬시키거나 붙이던 이전과 다르게 평면으로 상당 부분 회귀하고 있다.

이즈음 그의 작업에는 설명도 많이 줄고, 화사하면서 에로틱한 여성의 이미지들도 현저하게 감소돼 있다. 그는 단순히 몇 점의 하드보드 위에 이미지들을 편집해 놓을 뿐이다. 마치 우리와 선문답을 하자는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좀처럼 이전의 근사한 모습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미지를 병치하는 것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명료성에서 극도의 단순성과 절제미로 돌아섰음을 암시해주는 코드로 해석된다. 더욱이 색채에 있어서는 한층 더 칙칙하고 어둡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예전 작업에서 이미지를 잘 맞춰 가는 데 집중했다면 현재 화법은 현대 미술에 대한 한만영의 ‘화두’, 또는 작품에 대한 ‘통찰력’을 보는 듯하다.

그의 화실을 나서면서 나는 다시 그의 기억을 떠올렸다. 수없이 우리들을 마치 서로의 사물들이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조립해놓은 작품, 바이올린의 현과 마릴린먼로의 사진, 수십 개의 박스에 올려놓은 돌 조각 대형 캔버스에 비천상의 무늬를 붙여놓은 그의 도상들이 주는 의미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그는 우리에게 서로 다른 이미지가 주는 의식의 공간에서 무한한 자유와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화법은 마치 영국의 시인 존 던이 ‘사랑’과 ‘콤파스’가 어떤 관계나 이미지를 전혀 연상시키지 않고 있음에도, 이 관계를 결합해 훌륭한 시로 형상화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이제 한만영은 적어도 일체의 상상력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최고의 입법자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면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무한한 법을 창조 해내는 입법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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