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 작가
ⓒ최종태 작가

미학자 모리스 웨이츠(Morris Weitz)는 “모든 것이 예술작품일 수 있다”며 “누구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 않은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에릭 칼러(Erlic Kahler)는 “부목 조각이나 조개껍데기는 아무리 현혹적이고 매혹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도 우리에게 그 자체로서는 결코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며 “그것은 인간의 의식적으로 제어된 충동이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최종태의 조각 작품을 보면 질서 정연하게 정제된 의식의 날카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가 아닌,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거나 충격적이게 하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가진 빛나는 날카로움이다. 잘 정돈된 모습과 다소 어색하게 위치한 팔의 형상, 불균형적인 인체의 비례가 최종태 조각의 변증법적 흐름이다. 

일찍이 1960년대~1970년대 그의 조각들을 살펴보면 전신상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재료 또한 무쇠에서 부터 시멘트·돌·석고·나무 등 비교적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고 표현의 실험을 거듭해 왔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의 전신상은 조각이 하나의 입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로 충분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조각의 전형성과 규범을 보여주는 그의 조각은 철저하게 환조로 된 서 있는 입상(立像)이다. 당시 전후의 표현양식은 고대 조각에 비교적 근접한 모습을 보이나,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단순화된 형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울러 자세는 역동적·운동감 보다는 정숙하고 가지런한 소녀를 모델로 하고 있다. 

작품의 중심도 중앙선을 중심으로 대칭과 비례감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음을 많은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미학자 랑케(Julius lange)가 지적한 것과 같이 ‘정면성의 법칙’을 전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표정도 모든 감정을 숨긴 채 담백한 내면의 정적인 세계를 표출하는데 경도돼 있다. 1987년경에 제작한 좌상들과 비교한다면 그의 70년대 작품들은 직립상(直立像)에 대단한 열정을 보여준다.

Woman, 2015, 나무에 채색, 23.4x29.8x91.9cm
ⓒWoman, 2015, 나무에 채색, 23.4x29.8x91.9cm

물론 이러한 직립상은 조각이 갖는 근본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양식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자코메티가 그의 조각에서 획득하고 있는 ‘작품 자체 속에서의 공간효과’를 직립으로 해결했다는 흔적을 느끼게 해준다. 즉, 작품으로 공간의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닌 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최종태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가냘프고 여린 인물상으로 채우기 위해 공간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며, 상당한 예술적 원리에 입각한 예배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품위와 절대적 의미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기념조각(Mounmental Plastik)의 성격을 담고 있으며, 건축과 결합 된 종교적 의미의 예배 조각에 주는 인상을 곳곳에 풍기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준 작가들로 브랑쿠지와 자코메티, 스승 김종영을 꼽는다. 다만 브랑쿠지의 영향은 두상(頭像)에 관한 관심으로, 최종태의 80년대 작품에서 두상을 극도로 단순화시킨 얼굴 시리즈를 의외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로 해석하기보다는 브랑쿠지가 순수성을 잃지 않고 보편적인 미의 정신적 실체를 표현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오히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들을 단순화해 공감 온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얼굴이 매우 단순화된 형식을 갖게 된 것도 실제 얼굴을 묘사하기보다는 조형적 대상으로 인식 한데서 창작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작품을 선정하더라도 그의 얼굴에는 욕심과 교만이 없어 보인다. 또한 많은 것을 드러내거나 말하려 하지도 않고, 작가의 재능과 감각을 자랑하려는 치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에는 물론 그의 종교나 신앙과 결부되겠지만 작가의 인간적 심성과 작업 태도가 우선한다. 그는 스승 김종영에서 이러한 작가가 지녀야 할 자세와 기본 몸가짐을 배웠다고 수차례 고백한 적이 있다. 이외에도 그쟈드킨이나 만쥬, 헨리무어 그리고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아프리카 조각에서 많은 영감과 이미지를 얻은 것 같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는 장욱진이 비견된다. 밀도 있는 단순화와 결이 다르지만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최종태만이 가지는 독창성을 명확하게 보유하고 있다. 손의 형상을 매우 유난히 길게 묘사한다는 점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독창적인 표현법으로 평가된다.

FACE, 2014, 나무에 채색, 39.2x23.4x60.7cm
ⓒFACE, 2014, 나무에 채색, 39.2x23.4x60.7cm

독창성이나 창조성이 예술작품에서 중요한 특성으로 꼽히지만 예술가들이 홀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예술사를 볼 때 불가능한 것이다. 대표적인 미술사의 거장들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무어, 바바라 헵워드 등이 비슷한 조각 작품을 제작했던 것에 대해 명쾌하게 지적한 멜빈 레이더의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두상과 소녀상의 단조로운 주제를 중심으로 우리에게 절대적인 최종태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각인시킨 것은 그가 대상을 인식하고 다시 해체해 조형화하는 작품의 분명한 철학과 자기 양식의 언어 구축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작가가 인물이나 소녀상의 외관을 탐닉하지 않고 자기의 삶과 진실 하고자 하는 생활관, 바로 이것이 작가의 예술적 이념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흔한 기념 조각이나 상징조형물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는 것도 그의 작가적 태도와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한 대목이다.

얼굴에 대해 놀랍도록 집요한 집념은 그의 작품에서 얻어지는 최후의 관심이었다. 이 성취 뒤에는 기도와 수행을 하듯 구도자적인 자세만이 참다운 예술 언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브랑쿠지는 이러한 본질 속에서 실제를 찾은 가장 이상적인 조각가였다. 브랑쿠지에 비한다면 최종태의 얼굴과 인물에는 역동적인 생동감은 크게 없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담겨 있는 침묵과 무표정으로 감싼 소녀의 얼굴은 침묵으로 강렬하게 웅변하는 어떠한 조각보다도 감동을 더 해준다. 마치 미학자 데니스 디드로(Denis Diderot)가 “청중을 감동 시키기 위해 배우는 감동 해서는 안된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설파한 것과 다르지 않다. 

최종태의 전 작품을 개관할 때 공통으로 인지되는 것은 부드러운 인체들이 전해주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침묵의 힘이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 가운데 ‘급류와 폭풍우 같은 열정 속에서도 당신은 그것을 평온하게 할 수 있는 절제를 마음속에 품어야 한다’라는 구절을 떠올리듯 초기 작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그만큼 그의 조각은 형태의 완성 및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운 통일까지도 아우른다.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가 살아온 격동적인 시대의 삶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인내하고 담아왔는지를 반문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리 시대의 불안정과 통렬한 지성인의 발언을 그의 무표정으로 연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Face, 2018, 나무, 15.9x15.9x38.6cm
ⓒFace, 2018, 나무, 15.9x15.9x38.6cm

외양의 모습은 비록 가족의 한 구성원을 모델로 하고 있어도, 얼굴을 자신의 시대에 대한 성찰의 자화상으로 인지하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비약과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대다수의 뛰어난 거장들이 섭렵한 것처럼, 그 또한 목판화와 파스텔 등의 작업을 선보인다.

가볍게 보면 그것은 하나의 작업을 위한 밑그림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판화와 파스텔 그림은 나름대로 작품의 이미지와 특징을 명료하게 담아내고 있다. 날카롭고 부드러운 얼굴의 선, 감정의 절제된 색채 등은 분명 그의 예술세계의 새로운 표현영역에 확대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가 입체를 평면화 한다는 것은 이를 생략하고자 하는 성격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며, 조각에서 평면성이 짙은 입체를 시도한 얼굴 등의 두께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조각이 지나치게 유사한 스타일의 작품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최종태의 작업은 단연 독창성의 우위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데 기쁨을 주는 어떤 것” 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서 한 시대의 인물을 대표적으로 보여줬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결론적으로 최종태는 인간의 진실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한 익명의 소녀, 혹은 여인의 얼굴을 미적 형식의 대상으로 승화하고 단순화시킨 창조적인 예술가다.

인간의 숨결 및 생명력이 정적인 자세와 위대하게 결합한다면, 구도자적인 삶과 예술의 형식이 빚어낸 한국의 브랑쿠지는 곧 최종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스승 김종영을 훨씬 넘어선 작가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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