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 뚝배기 같은 놈’, 그의 친한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한마디로 부른다.김선두. 그는 남도의 예술이 깃든 시서화가 뛰어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붓글씨는 물론 화론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교사에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갈등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결국 할아버지의 성화를 뒤로 하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단칸방에 살림을 차렸고, 그 고생은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곤궁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속담처럼, 김선두 그는 화가가 됐
【투데이신문 조유빈 기자】 한국 현대미술 사실주의 작가들의 어제와 오늘을 다양한 관점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가 개최된다.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갤러리 나우는 내달 28일까지 진행되는 ‘올 댓 리얼리즘(All That Realism)’ 전시회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 사실주의 작가의 작품들을 선보인다.이번 전시회는 한국 현대미술 사실주의 작가들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짚어보기 위해 기획됐다. 특히 전시 참여 작가들은 한국 현대미술 사실주의 계열을 특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먼저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1부 전시에서는 상상력을
“숯은 변화한 나무다. 즉 나의 모든 작품을 꿰뚫고 있는 소재는 바로 나무다”라고 정의한 박선기 작가는 작업에 대해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고 고민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머릿속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출시키는 방법적 문제가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라며 “하지만 그렇게 나온 작품은 또 다른 창작 발전의 에너지”라고 말했다.박 작가의 이러한 자전적인 발언은 우리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말해준다.그 화두는 숯이다. 그가 숯 작업을 위한 시간을 고통스러운 순간이라고 비유했던 것처럼 그의 작품에 쓰이는 오브제나
“예술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 시대에 있어 예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지금까지 많은 미학자와 예술이론가들이 끊임없이 제기해 왔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미와 의도를 포괄하고 있는 예술을 정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하지만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해도 예술이란 모방, 혹은 직관이며, 상상의 유희, 미의 창조, 감정의 표현, 소망의 승화된 형식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일면과 속성이 제기되는 한편, 20세기 영국의 미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예술을 ‘인간 최초의 기본
민경아는 화단에서 유일무이하게 ‘거짓말’ 작업을 공개적으로 하는 교양있는 박사 출신의 여류작가다.그는 역사적인 동화 속 캐릭터 판화를 통해 오랫동안 열성 팬을 거느리며 대중들을 유혹해 왔다. 재미있는 점은 대중들이 그의 거짓말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거짓말 그림’ 속 매력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그의 상습적인 거짓말에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라는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의 이야기가 주요 무기로 쓰인다. 이 ‘거짓말’ 이야기는 아주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1881년 이탈리아는 통일 전쟁을 치르고 수도 이전의
유영국(1916~2002)은 1916년 4월 7일 경북 울진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3년 경성제이고보를 재학 중 규율에 얽매인 교육 방식이 체질에 맞지 않아 중퇴한 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그는 미술반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 그는 문학보다는 미술이 맞는 것 같아 미술을 택했다고 한다.1935년 그는 동경문화학원 유화과에 진학했고, 2년 후인 1937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화단에서 활동했다.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했던 문
“이제 내 눈에는 나무도 들도 숲도 산도 모두 투명한 유리처럼 내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 겹겹의 유리 속의 한의 맥이 보인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져진다. 이런 나의 끈끈한 한의 맥을 근원 형상으로 표출하고 싶다” - 이종상 작가일랑(一浪) 이종상을 수식하는 형용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매스컴에서는 그의 예술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많은 국내외 신문기자들, 세계적으로 저명한 미술평론가들이 이종상에 대한 예술론 또는 작가론을 다뤘다.일랑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이렇다.누보 레알리즘의 창시자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피에르
1978년 어느날 회사를 마치고 들른 명동화랑에서 난 김원숙 작가의 그림을 처음 만났다. 그림은 이쁘지도 않고. 색채도 없이 야외에 두 젊은 남녀가 누워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그런데 왜 이 그림이 매력적인 걸까. 현실과 이상이 만들어 놓은 풍경과 서정적 붓질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그의 붓질은 신비한 스토리와 시추에이션(situation)을 그림 속에 춤추듯 빚어낸다. 남녀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람, 하늘을 나는 사람 등 김원숙 작가의 그림은 이러한 구성을 거침없는 목소리와 붓질을 통해 보여준다.김원
대중적 화조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원문자 작가는 어머니이자 정년을 맞은 교수다. 그러나 궁핍한 화가로서 그리 녹록치 않은 시절을 보내왔다.원 작가는 1964년 아름다움과 정교한 필치로 아카데믹한 화단에 새로운 꽃 그림의 화풍을 선보였다. 당시에는 인물화와 산수화가 주름을 잡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화조는 아름답고 신선하게 대중들에게 다가왔다.이후 화사한 화조와 여성적인 감성으로 전형적인 채색화의 진수와 아름다운 세계를 표현하는 작가로서 주목을 받게 됐다.그는 이화여대 미대재학 시절 문공부 주최 신인 예술상에서 수석상을 받
미술의 역사 속에서 ‘미적인 대상으로서의 누드’는 중세 때 잠시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그리스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예술가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주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누드가 생명력과 아름다움의 절대적 상징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누드는 벌거벗은 여체의 그림이란 이유로 곧잘 천박한 에로티시즘으로 폄하돼 왔다. 특히 동양 쪽에서는 관련된 그림 대부분이 춘화라는 양식으로 남아있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체화는 그리 풍요롭지 못하고 궁핍한 편이다.이처럼 한국화의 열악한 전통 속에서도 조춘자 작가는 20여 년 이상 누드화를 그려왔다.
당나라의 현종이 가릉 지방의 경치를 그리워하며 오도자(吳道子, 중국 당나라 때 화가)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려오게 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어쩐지 오도자는 가릉지방을 둘러 보고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현종이 그 이유를 물으니 “저는 비록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모두 마음속에 담아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오도자는 대동전건물 벽화에 삼백리에 걸친 가릉 지방의 풍경을 하룻밤에 그렸다는 이야기다.문득 이러한 일화가 떠오를 만큼 김인옥 작가의 작품들은 그가 살고있는 양평의 주변 풍경을 따뜻하고 서정적으로 담고 있다.에서 시작해서
백철극(白鐵克) 작가는 한국 근대 서양화 1세대로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남관 등과 함께 활동했다.한국 미술사에서 그의 존재나 작품세계가 그다지 조명받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김환기·이중섭의 절친이자 동시대 앞서간 비운의 화가 백철극(1912-2007)’이라고 부른다.백철극 작가는 1912년 5월 16일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바느질로 어려운 생활을 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타고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평양 대동강 극장에 간판 조수로
미국의 신표현주의 작가 줄리앙 슈나벨은 “나는 항상 개인적인 언어는 없다고 말해 왔다. 다만 개인적인 언어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서승원의 작가 인생 속에서도 “개인적인 언어는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지켜온 언어는 무엇인가? 그는 개인적인 언어가 아닌 ‘회화 언어’를 선택해 왔다.줄리앙 슈나벨이 고뇌한 것처럼 그도 시각예술에 있어 어떤 표현을 할 것인지에 대해 개인적인 선택이 불가피했을 것이다.그는 좀 더 단호하게 기존의 회화운동을 거부했고, 아방가르드적인 태도로 그만의 예술을 시작했다.아마
그의 작업은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 구성을 추구하는 예술양식) 스타일이다. 그러나 그는 하이퍼 작가는 아니다. 그래서 박성민의 하이퍼 리얼리스트라는 명칭은 수정돼야 한다.하이퍼 리얼리즘의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는 실제와 같은 묘사를 통해 이것 또한 허구적인 이미지임을 사람들에게 폭로함으로써 가상과 현실이 바뀌어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궁극적으로 박성민은 극사실 풍으로 오브제를 마치 사진처럼 그려 낼 뿐이지, 그것을 전제하거나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2
조각은 ‘형태’인가? 아니면 아직도 하나의 ‘의미 있는 형식’ 일 수 있는가? 현대조각에 있어 이런 유형의 물음은 더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조각가 토니 스미스가 그의 작품을 “조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존재물로 생각한다”라는 발언 속에는 현대조각이 얼마나 보편적인 조각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의 차원 속에 와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엄태정 작품의 로 명명되는 일련의 연작들은, 그의 조각에 관한 본질적인 형식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특히 그의 근작들은 작품 구성과 표현형식에서 오랜 사색의 과정을 지나
198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미술, 특히 한국화는 주된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작가들은 한국화라는 기존 표현 양식에 지나치게 묶여 그 기법에만 정통성을 부여하려 애썼다. 그것은 곧 표현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표현이라는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현대의 다양한 미의식을 수용하지 못한 채 재료에 갇혀 획일적인 유행이라는 표현형식을 낳았고, 수묵화가 그랬다.그들은 때로 동양회화의 주된 조형 의식과 정신적 뿌리를 먹과 같은 재료에 의해서만 찾으려 해 동양회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높은 정신성과 표현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이석주 작가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은 대단히 문학적이다. 백마가 어디론가 황망한 들판을 부지런히 질주하는가 하면, 저 멀리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달려가고, 그 사이로 빨간 단풍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하늘을 가로지른다.10시 30분 혹은 1시를 가리키는 고전적인 시계가 아득한 풍경 속에 흐릿하게 그려져 있다.때는 언제나 대강 노을이 막 지기 시작한 저녁이거나 모든 것이 정적을 지키는 새벽이다.생각보다 그의 화실은 비어있다. 그림들은 아래층에 있고, 대부분 화가가 즐겨 그리는 오브제를 광적으로 모으는 컬렉션도 없고, 덕지덕지 그림을 붙이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이 세상 어느 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것은 남아있으며,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움이란 의미다.사람들은 문득 이름 모를 어떤 그리움에 사무친다. 그것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며, 음악이 된다.“날씨도 춥고 먹을 것, 입을 것 하나 변변치 않고, 낮에는 하늘과 구름뿐이고, 밤이면 벌레 소리와 스치는 댓잎 소리뿐이라”고 탄식했던 다산 정약용의 시도 유배지에서 보낸 그리움의 마지막 절창이다.이처럼 신철의 그림 속에는 몇 개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짜여 있는데, 그 중심에
1931년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박서보는 1956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 등 3명의 젊은이와 함께 ‘4인전’의 반(反)국전 선언을 벌였다. 국가에서 주관해 온갖 문제와 시비가 끊이질 않았던 대한민국 국전이 기승을 부릴 때에 벌어진 이들의 반국전 선언은 곧 사실상 화가로서의 장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그러나 그는 1958년 ‘현대미협’에 가담하면서 ‘뜨거운 추상’으로 불린 앵포르멜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이렇게 한국 현대 미술사에 이름을 등재한 그는 50년대 말부터 70년대 사이에 일어난 미술운동 선두에
미학자 모리스 웨이츠(Morris Weitz)는 “모든 것이 예술작품일 수 있다”며 “누구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 않은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에릭 칼러(Erlic Kahler)는 “부목 조각이나 조개껍데기는 아무리 현혹적이고 매혹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도 우리에게 그 자체로서는 결코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며 “그것은 인간의 의식적으로 제어된 충동이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최종태의 조각 작품을 보면 질서 정연하게 정제된 의식의 날카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있는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