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작가 ⓒ김병종 작가

198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미술, 특히 한국화는 주된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작가들은 한국화라는 기존 표현 양식에 지나치게 묶여 그 기법에만 정통성을 부여하려 애썼다. 그것은 곧 표현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표현이라는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의 다양한 미의식을 수용하지 못한 채 재료에 갇혀 획일적인 유행이라는 표현형식을 낳았고, 수묵화가 그랬다.

그들은 때로 동양회화의 주된 조형 의식과 정신적 뿌리를 먹과 같은 재료에 의해서만 찾으려 해 동양회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높은 정신성과 표현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서양화의 1970년대식 모더니즘적 속성과 운명을 같이하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화는 동양회화의 중요한 특징인 자연관도, 정신성이나 형상의 새로운 해석은 물론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참다운 미의식과 조형성을 이룩하지 못했다.

일부 화단의 젊은 작가들이 나름의 표현체계로 경시할 수 없는 작업을 보여주긴 했지만, 동양미의식에 근거해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회화 완성에 이르는 커다란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동양회화의 참다운 정신과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조형 철학을 추구하고 그것을 표현하되, 현대적인 부단한 형식 실험을 보여주지 못한 노정(路程)을 드러냈다.

회화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후유증은 현대적 미의식과 조형성이 각별히 요청되는 시점에서 한국화의 답보 상태를 보여줌으로 현대 한국미술 전체의 가능성까지 불투명하게 했다.

1980년대 중반과 1990년대는 패기만만(覇氣滿滿)한 30대와 40대에 의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국화의 답보 상태가 붕괴하고 변증법적 양상으로 새로운 양식과 더불어 한국화 르네상스기를 맞이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김병종 작가의 <생명의 노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김병종은 ‘회화와 회화’ 사이에 단계를 넘어서, 장르를 벗어나 탈 장르 성격이 일반화되는 시점까지 혼돈과 격랑 속에서 작업과 이론으로 나름 일관된 세계를 보여준 작가다.

다양한 미술 논리의 온갖 혼란과 모순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의 작품들은 다른 어느 작가보다 견고하게 동양적 정신성 위에서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뿌리 있는 조형의식으로 꽃 피워 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흔들리지 않는 ‘한국성’을 드러낸 작가 중의 한 사람은 분명했다.

모로코 일기, 97x165cm, 한지, 캔버스, 먹과 채색, 2008 ⓒ김병종 작가

우선 그의 작업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형식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그가 수년 전부터 시도해 온 역사성을 지닌 인물들의 차용이었다.

‘역사적인 인물들의 이미지 만들기(Image Making)’를 보여주는 형식 이른바 <바보 예수>나 <대지에 누운 황진이> 시리즈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의 구성은 최근 역사성을 배제한 익명의 대상(예를 들면 어린 성자 아기불)으로 그 이미지를 전이시켰다.

이것은 그가 대상 자체의 이념적 한계에 묶이지 않음으로써 표현의 확장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면에 익명의 정신에 담겨 있는 순수한 영혼을 묘사하고자 하는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다양한 인물과 자연의 대상을 하나의 시각 형식으로 일체화하거나 조형화시킨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는 대상의 순수한 의미를 형상화하는 것부터 추상적으로 변용하는 과정까지 과거에는 없던 형식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를테면 그가 일부러 찾아 쓰는 장지와 골판지 등 재료에서부터 들기름 피마주 기름 등 전통적 삶의 매재(媒材)를 작업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전통적인 정신과 재료를 현대적으로 계승시키고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배경, 자연 풍경에 원용되는 소나무, 구름, 새, 돌 등도 <성자(聖子)> 시리즈의 인물처럼 독창적 생명체로 강한 전통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요컨대 김병종 그림 속 어휘들은 소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으로 동양적 혹은 한국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으로 집약돼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그대로 이해하고 판독한다는 것은 그의 회화가 지닌 심도 있는 정신과 내용을 간과하게 되는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

새와 구름과 나무, 꽃과 소년이 단조로운 형상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일종의 생명, 사랑과 같은 이미지의 구성체로 등장한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들은 한결같이 ‘순수함’을 드러내는데 매우 적절하고 이상적인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그려내는 하나하나의 대상과 인용되는 요소들은 도상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은유로 표지되는 그의 작품들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단순한 꽃과 소년이 있는 풍경과 인물화’로만 볼 수 없게 한다.

특히 독특하게 표출되는 인물화는 인습적인 인물의 묘사에 탐닉하지 않고 한당(漢唐)의 인물화나 조선조 초기 초상화의 연장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인물화의 세계를 드러냈다.

이것은 그의 총체적 그림의 세계관으로 ‘창조적 순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의 인물은 단순하게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자연이 하나의 생명체로 만나고, 화해하고, 대화한다는 점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마치 자연이 존재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동양만의 독자적인 철학의 자연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와 구름, 나무 등은 인간과 분리시켜 구별할 수 없는 중요한 생명체이자 살아 있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화려한 강산2, 97x162cm, 한지, 캔버스, 먹과 채색, 2007 ⓒ김병종 작가

또한, 그의 그림에 보이는 이 생명은 곧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거기서 나는 자연이고, 자연은 나이다. 이 일체감으로 비유될 수 있는 지점에서 바로 인간의 가치와 자연의 생명이 하나의 형상으로 만나 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 김병종의 자연관이자 회화 철학이다.

그는 인간, 그중에서도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에서 생명과 영원을 발견하길 노력하고 기도했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일체의 대화, 그 만남으로 승화되는 범신론적 사랑과 휴머니즘의 노래, 이것이 그의 예술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눈의 시각적 즐거움이나 기술만 보이고 끝나 버리는 작품들에 비해 그의 작업이 한결같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것. 즉, 표현 너머에서 반드시 맑은 샘물처럼 깊은 마음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회화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과연 이렇게 이중적 의미 구조로 되어 있는 그의 예술관이 오늘에 있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회화 예술이란 안료를 이용하여 견고한 물체를 평면 위에 모사하는 것이다’ 또는 ‘예술은 인간 감정의 상징 형식’이라고 수잔 랭거(S.Langer)가 정의했지만, 예술에 관한 한 플라톤과 같은 경우는 아주 냉엄하여, 예술은 사람의 삶의 가치를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고 한 역설을 기억한다.

적어도 김병종 예술의 회화적 가치와 의미는 그의 생각과 의식 전달의 수단으로 회화를 선택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능력과 이상향을 예술로 표현함으로써 척박하고 메마른 이 시대에 순수함과 인간 됨됨이의 가치를 심으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들이 건네주는 진실한 이야기 자연스러움의 감동은 이 때문이다. 미술이 단지 눈만 즐겁게 한다든지, 무의미한 개념과 실험의 반복 속에서 배회하는 그림들에 비해 <흑색 예수>나 <어린 성자>, <아기불>같은 그의 그림들은 얼마나 우리를 평화롭고 깊숙한 천국의 세계로 안내해 주고 있다.

생명의 나라로, 50x128cm, 2009 ⓒ김병종 작가

편안함, 예술은 인간을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로 이끄는 길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그가 오로지 시각이나 조형적 측면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각에만 충실한 듯 위장해 그가 의도하고 있는 대화에 우리 스스로 젖어 들게 하거나,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그가 순수하고 천진무구하다고 믿고 있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어린 성자>에서는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된 어른들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

다만 그의 회화적 대상을 어린이로 삼고 있는 데에는 그의 종교적 세계와 결부시켜서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어린이의 마음, 어린이의 생명이 결국 성(聖)과 통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 것 같다. 성서에는 돈 많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그것보다 더 어렵다는 가혹한 비유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진리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어린 성자> 시리즈는 과거의 <바보 예수>와 하나로 만나진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이런 의미에서 그가 작가로서 열망했던 인간과 함께 하는 생명의 미술을 유감없이 보여준 셈이다.

이것은 또한 서양 미술이 아닌 동양회화가 추구한 깊은 예술의 세계인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가장 조화로운 만남인 것이다.

그가 전환기에 남겨진 동양적인 회화의 답보성과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지나친 ‘인간의 마음을 떠나 버린 미술’ 속에서 생명의 노래를 홀로 부르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감동적인 한편의 이름다운 서사시로 남는다.

이제 김병종 작가는 남원에 그의 이름을 단 시립미술관을 가진 걸출한 작가이다. 이미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그림 시리즈와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20여 권의 저서로 대중적 인기를 함께 누리고 있는 명사이기도 하다.

이미 그는 유려한 글 솜씨와 그림으로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김병종의 화첩 기행>은 잊혀진 예인들을 불러내어 사람들에게 깊은 예술의 향기를 불어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병종 작가에게 주제넘게 고언을 드리고 싶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작가는 그림으로 말 할 뿐이다. 더욱이 시간은 그 누구에게나 마냥 유한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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