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엄태정과 작업실 전경 ⓒ엄태정 작가

조각은 ‘형태’인가? 아니면 아직도 하나의 ‘의미 있는 형식’ 일 수 있는가? 현대조각에 있어 이런 유형의 물음은 더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조각가 토니 스미스가 그의 작품을 “조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존재물로 생각한다”라는 발언 속에는 현대조각이 얼마나 보편적인 조각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의 차원 속에 와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엄태정 작품의 <청동기 시대>로 명명되는 일련의 연작들은, 그의 조각에 관한 본질적인 형식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특히 그의 근작들은 작품 구성과 표현형식에서 오랜 사색의 과정을 지나 매우 단순하고 감정의 절제가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우리가 작품에서 ‘단순함’을 느낀다는 것은 그가 작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것은 이 단계와 화법으로도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충분하게 형식화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치 ‘작품은 설명하지 않는 것’이란 경구처럼 그의 ‘단순함’ 속에는 조각에 관한 확신에 찬 문법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엄태정의 작품들은 이전에 비하면 표현형식에서 매우 안정된 시각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집>의 완성은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예술관의 중심축을 상징한다는 면에서도 이전 작품들과 차별성이 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작품은 대부분 작품의 현존성에 주목하고 있어 개념이 강한 작가로 평가된다.

즉, 우리에게 어떤 형상성보다는 철학적이고 사유성이 강한 작가라는 의미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해석이나 평가가 주로 ‘작품은 물질’이라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시각이 중요하게 일치하고 있는 현상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의 조각 형태(Form)는 왜 간과되는 것일까? 간과될 정도로 의미가 없는 것일까?

엄태정 조각에 관해 사변적으로 혹은 재료 중심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형태라는 측면에서 봐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조각을 가능케 하는 ‘물질’이 아니고, ‘형태’에 대한 그의 진지한 발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질에서 조각의 개념은 보이는 ‘형태’이고, 그 형태는 곧 대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한 이유로 조각에 있어 형태는 표현의 가장 기본적인 1차 언어로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의식이나 개념도 그것이 어떤 형상, 오브제나 형태라는 옷을 입고 등장하는 한 조각의 운명은 묘사될 수 있는 것보다 만들어진 존재 형태를 지닌다.

더욱이 그 형태를 구성하는데 필연적으로 일정한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조각은 ‘재료의 예술’이다.

도날드 져드(Donald Judd)의 표현처럼 “어떤 작품의 흥미는 전체적인 성격과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의 특성에 순전히 내재한다”라는 주장이 이 작가들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비록 조각이 그러한 재료적 속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공간 속에 입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한 조각의 진정한 형식은 ‘보이는 형태의 의미 추구’에 정당하다.

이 점에서 엄태정 작가의 경우 특히 ‘보여진’ 또는 ‘보여지는’ 시형식의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을 구조 간의 관계와 형태에 주목한다고 해서 작품을 단순히 표피적이고 외형적인 재료로만 파악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가 나타내는 형태, 그것의 내적인 의미 등을 종합적으로 연계시켜 보자는 것이다.

많은 현대조각에서 작가가 작품 속에 지시하고자 하는 개념이 작품 전체를 지배함으로써 표현 언어의 기능을 상실하고 불투명해진 작품들을 우리는 종종 발견한다.

Dragon, 205x60x80cm, 브론즈, 1973 ⓒ엄태정 작가

엄태정 작가는 이미 <청동.기.시대>라는 명제 아래 충분히 ‘형태와 형태의 결합’이란 독창적인 세계로 평가받고 있다.

독특함이란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조각의 뜻에서 보면 ‘만듦’이라는 부분보다 조립 혹은 결합의 성격이 강한 것을 의미한다. 그 성격은 다름 아닌 일정한 입방체(立方體, 정육면체)들로 연결된 결합의 의미를 지향하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구조’나 ‘결합’이 동등한 재료와 질료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원숙한 표현 세계에 도달해있다. 그런 이상 우리는 그의 작업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형태와 만남’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의 조각은 온갖 입방체들이 서로 만나거나, 이루어져 하나가 된다. 각자 일정한 양태로 나열된 것들은 맞물린 상자의 단면을 잘라낸 것처럼 내부를 보여준다.

혹은 잘라낸 상자들의 맞물림 관계를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우리에게 비춰준다.

그가 늘어놓은 이 다수의 기하학적 도형들의 결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엄태정 작가의 작품에 현시되는 그 일관된 흐름에서 우리는 ‘질서’를 발견한다.

예를 들면 큰 것과 작은 것의 맞물림, 작은 것과 큰 것의 맞물림 그것들이 철저하게 ‘연결’ 또는 ‘관계’로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맞물림의 결합 또는 접속된 형상은 거의 전 작품에 흐르며 중요한 양식으로 정착한다.

이런 시기는 작가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유하고 정리할 수 있었던 베를린 체류 이후의 모습이다. 이 부분이 일관적일 뿐 아니라 질서정연하고 통일되게 작품 속에 흐른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과 철학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이 혹자에게는 마니에리즘(mannerism)적인 태도로 오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형식과 변용에서 그의 형태에 대한 작가정신은 정교하고 집요하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이 다변화 된 입체들의 맞물림 속에서 삶의 기본적인 속성이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휘어져 들어간 모습, 꾸겨져 맞물린 철판들의 관계와 큰 것이 작은 것을 삼켜버린 형상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이 다른 그 무엇보다 현실을 드러내는 근본과 본질이 된다.

그러나 그의 현실적 리얼리티는 재료에 대한 1차적 관심으로 늘 비켜나 있는데 조각을 거론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흥미를 보이는 재료도 무시할 수 없다.

엄태정 조각의 특별성을 재료가 주는 독특함, 번쩍이는 구리표면의 광택, 동(銅)판이 주는 미끈한 매력, 결코 튀지 않고 그윽함을 띄고 있는 은은한 빛깔 등 그의 작품은 시간성과 공간성과 관계없이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조각이 주는 최상의 가치를 수반한다.

작가는 결정적으로 예술에 화두를 ‘조각은 조형이 아니고 물질’이라는 점에 두고 있다.

다분히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길 요구하는 조각의 개념 즉, 조각은 조형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가 조각에 있어 조형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조각에 중요성을 물질에 둔다는 것이다.

그 대답을 <청동.기.시대>에서 명확히 답변하고 있다. 그가 그의 작품세계를 조형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이 일정한 조형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조각이 피할 수 없는 유기적인 구조 안에서 만들어지는 형태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규정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각을 조형이 아니고 물질이라고 했을 때 그 조형의 의미는 조각 예술에 있어서 조형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의 일부분이며, 조각의 기본은 언제나 조각 자체의 개념에 충실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제가 전제된다.

그의 이 명징성 있는 발언은 그의 조각이 조형적으로 단순화시켜 하나의 구조적인 형태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형태와 형태가 만나 빚어내는 그 관계, 하모니, 형태들의 절제된 구성, 일정한 질서로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연결 뒤에 또 다른 관계의 연결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 이런 요소들 모두가 엄태정 조각에 새로운 생명력을 낳고 있다.

엄태정 개인전 전경 ⓒ아라리오 갤러리

현대 영국의 추상조각에 흐름을 이끌어 온 바바라 헵워드(Barbara Hepworth)는 아르프(H.Arp)의 조각에 감명을 받고 “훌륭한 조각이 환상, 힘, 생기, 스케일, 균형, 형태 또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조각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내적 생명이다”라고 기술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할 것 없이 <청동.기.시대>라는 추상적인 그의 작품에 기본 구조는 기하학적 형태의 사용에서 출발한다. 그 기하학적 형은 때로는 규칙과 비례의 모양을 띠기도 하고 독자적인 형상의 모습으로 정형화되어 있기도 하다.

형태의 구조 또한 빈틈없이 규칙적으로 다듬어져 있다. 이 기하학적인 입체의 도형들은 무엇인가 이 입체들은 모든 사물의 바탕을 이루는 세잔의 사물 보는 방식과 맥을 같이 하지 않는가?

모든 자연과 사물처럼 그의 조각 공간 속에는 맞물림이라는 규칙 자체가 하나의 약속된 질서처럼 평면과 수직, 곡선과 수직선으로, 사면체로 엄태정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두께를 지닌 청동의 구릿빛 철판 조각들이 서로 만나거나 짜이거나 혹은 결합, 결속되는 과정에 작가가 개입 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하나의 물질로 ‘존재’할 수 있고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예술=물질’이란 개념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하나의 형태로서 의미를 지니기 이전 예술가에 의해 하나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실존적인 세계의 당위성이 있다.

이런 작품의 의미를 형태 또는 그것의 가시적인 것에 두지 않고 본질 자체로 회귀하려는 데에는 마치 논리나 사고에 구속되지 않고 작품 자체의 본질에 가깝게 지향하길 요구한다는 점에서 훗설적인(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 철학) 철학적 명제와도 관계된다.

그가 모든 세계를 실존적으로 (그는 이것을 현실적이라고 표현하지만) 파악하려는 이면에는 그의 세계가 매우 유물론적인 성격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가 유물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거나 유물론적 미학의 근간이 되는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진 않는다.

또한, 작품 속에 ‘실존과 본질’이라는 사변적 용어를 인용한다고 그의 예술과 철학의 생성, 전개 이해 등을 역사 발전 과정의 하나로 연계시키지 않는다는 점도 화가와 이론가 사이에서 화가로 구별 짓게 한다.

일견 그의 예술의 논리를 보면 인간적 본질이 대상적으로 개발돼 나가는 가운데 점점 인간의 주관적 감성의 풍부함과 형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에게 조각은 물질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하나의 도구 또는 현상을 조각이라는 것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이런 이유로 엄태정 조각의 본질은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라고 소극적으로만 정의될 수 없는 넓은 범주를 포함한다.

그의 조각은 시각적 방법에서도 큰 것과 작은 것의 만남, 큰 것 속에 작은 것의 관계 또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삼킨 다양한 형태들의 만남을 보여준다.

‘조각은 물질과 물질의 만남 또는 만남을 통한 결합’이라는 그의 정의는 이 부분에서 조각가로서 더욱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닌다. 그것만이 조각이 형태로서 존재하더라도 그 내적인 생명의 힘을 보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우리가 그의 작품을 통해 조각이 단순히 삼차원의 예술로서 조형의 전부라고 믿었던 근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점은 창조성이 부족하고 답보성이 만연한 우리 미술계에서 성찰해볼 만한 일이다. 물론 이것이 현대조각에 문제를 얼마만큼 제기하고, 극복하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그의 조각이 형태만으로도 이미 한국 조각의 위치와 지형도, 그리고 좌표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엄태정 조각은 더 평가되어야 한다.

제1세대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서 작가 엄태정(1938-)은 1960년대 초반부터 60여년을 조각의 핵심 개념을 ‘물질’과 ‘공간’에 두고 한국 추상 조각을 만들어 온 작가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197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런던 우드스탁 갤러리, 베를린 게오르그 콜베 뮤지엄 전시 등 다수의 국내외 전시가 이를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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