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 작가ⓒ신철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이 세상 어느 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것은 남아있으며,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움이란 의미다.

사람들은 문득 이름 모를 어떤 그리움에 사무친다. 그것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며, 음악이 된다.

“날씨도 춥고 먹을 것, 입을 것 하나 변변치 않고, 낮에는 하늘과 구름뿐이고, 밤이면 벌레 소리와 스치는 댓잎 소리뿐이라”고 탄식했던 다산 정약용의 시도 유배지에서 보낸 그리움의 마지막 절창이다.

이처럼 신철의 그림 속에는 몇 개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짜여 있는데,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그리움과 추억의 고향 청산도다.

작가는 스스로 ‘그리움이 절실해야 그림이 비로소 사랑을 알아챈다’라고 말하며 사무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가열차게 노래하고 있다.

그리움의 배경은 그가 태어난 작은 섬 완도군 청산도이고, 1960~70년대의 단발머리 소녀들의 풋풋한 낯섦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그는 넘치는 서정성과 어린 시절의 감성으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한다. 행복했던 표정과 모습을 통해 우리를 청산도 풍경에 풍덩 빠지게 한다.

신철, 보고싶어요, 72.7×91.0cm, 2015ⓒ신철<br>
신철, 보고싶어요, 72.7×91.0cm, 2015ⓒ신철

신철 작가는 청산도의 추억과 기억을 아스라이, 때로는 가슴 아리게 담아 우리를 불현듯 눈물짓게 한다. 거기에는 그가 짝사랑하고 흠모하던 어릴 적 소녀와 그가 따라다니며 고무줄을 끊어 놓고 도망치던 그때의 누나들이 화폭에 겸연쩍게 쭈뼛거리며 서 있다.

흥미로운 것은 촌스러운 옷차림의 단발머리 누나, 소녀들은 70살을 넘나드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있어 영감이며, 원천이며 추억의 가장 강력한 씨앗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언제나 키만큼 큰 꽃 앞에 있거나, 꽃나무 아래에 엉거주춤 혹은 삐딱하게 서 있다.

가끔 푸른 하늘 위로 장난감 같은 비행기가 붕 하고 떠가고, 흰 매화는 흐드러지며, 흘깃 훔쳐보는 소년의 마음은 곳곳에 얼룩져 있다. 뒤편에는 소녀의 키보다 더 큰 꽃들이 나무처럼 자리하고 지천에 붉은 꽃들이 봄날의 알록달록한 정취를 보여주며 그곳이 청산도임을 알려준다.

꽃길을 건너 바다로 이어지는 모습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과 꽃을 든 처녀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 그림에서든 꽃, 나무, 소녀 그리고 마음을 흔들게 하는 야간은 촌스러운 소녀들이 불그스레한 표정으로 화가의 앞에 서서 얼씬거리며 우리를 유혹한다.

신철, 천년의 사랑, 72.7×60.6cm, 2020 ⓒ신철
신철, 천년의 사랑, 72.7×60.6cm, 2020 ⓒ신철

그 시절로 한번 돌아 가보라고, 아니 그리움에 목말라 사무쳐 잠 못 이루던 사춘기 시절의 추억이 있는 청산도로 오라고 말이다.

나는 한번도 청산도에 가보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으로 정겨운 청산도를 수없이 드나들었다.

지금도 작가는 늘 떨쳐낼 수 없는 풍경 속에 빠져 그 기억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양평 수류산방의 아틀리에서 붓질을 서걱거린다. 그리움으로 가슴을 졸이고, 잠을 뒤척이며 회귀할 수 없는 그 시절의 풋풋한 꿈을 꾼다.

봄날, 미치게 푸른 하늘 청산도의 새파란 추억과 날것의 그리움, 그리고 사랑을 말이다.

작가는 이것을 너무나도 도저히 잊지 못해 ‘기억 풀이’라 부른다. 어떤 그림을 보아도 그의 화면에는 소녀를 향한 어린 시절의 가슴 떨림이 독약처럼 묻어난다. 봄이 오는 끝없는 설렘에 부대끼는 가슴 찡한 정경들을 남도 가락처럼 풀어 젖힌다.

철없던 시절, 바닷가 시골 촌 청년이었던 신철, 그는 정녕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는 입버릇처럼 “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되뇌었다. 그에게 착한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철모르게 굴었던 장난기 어린 순수한 10대 시절의 떨칠 수 없는 향수와 그리움, 그것과 함께 뒹굴던 추억들이다.

신철, 고백, 116.7×91.0cm, 2014 ⓒ신철
신철, 고백, 116.7×91.0cm, 2014 ⓒ신철

우리가 신철의 그림 속에서 한없이 순수함과 따뜻함에 마음 쿵쿵거리며 가슴을 흔들던 찡한 우리의 초상을 발견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봄기운이 언제나 가득 담긴 색채에서 털목도리를 둘러 감고 눈 내리는 소녀가 있는 바닷가 포구까지 자연의 색채와 빛깔로 풀어내는 기억에 대한 한풀이가 신철 작품의 따뜻함이다.

그의 그림에는 여전히 그리움과 추억이 있어 보는 이들을 10대로 되돌려 놓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창한 봄날, 꽃이 듬성듬성 핀 거리에 데이트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있다. 남자는 등 뒤 손에 꽃다발을 감추고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소녀의 순수한 척과 도도한 몸짓 때문에 그 마력은 더욱 강력하고 눈에 아른거린다.

분명 신철은 시인이거나, 아직도 어린 청순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지닌 철부지 소년임이 틀림없다. 또는, 아주 유치한 풍경처럼 그런 기억으로 평생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된 어른 시인일 것이다.

끝없이 이런 풍경들을 풀어내는 인간이 지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위한 노래인 신철의 작품은 우리에게 건네주는 축복 같은 선물이다.

신철, 순수, 2.7×60.6cm, 2020 ⓒ신철<br>
신철, 순수, 2.7×60.6cm, 2020 ⓒ신철

그는 그림의 주제는 삶을 축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 모습의 명증성(明證性)을 살리기 위해 화면을 단순화하고, 과감하게 한 폭의 동양화처럼 여백에 그리움을 심어놓았다. 이 기교 또한 끊임없이 고향이 주는 행복감을 보여준다.

장욱진의 그림처럼 까까머리 동심, 안타까운 표정은 가슴 속 깊이 풀어내는 신철의 세계 속에 흘러내리는 소박함과 숨길 수 없는 진실함과 촌놈 티가 난다.

마티스가 그랬던가, 진정제처럼 편안하고 안락의자같이 따뜻한 그림. 반 고흐가 평생 추구했던 그림은 진실해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 깊은 울림이 신철에게 있다.

신철의 그림은 거짓 없이 진솔하게 고향의 향수와 어린 눈빛과 풍경들, 무엇을 넣거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바닷가 시골의 사랑스러운 연정이 화폭 전편에 낮게 깔려있다.

그 철없던 시절의 애틋함으로 우리 가슴을 촉촉이 적시면서 유혹하는 그 행복한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치명적인 공명의 매력이 신철 작가가 화폭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다.

신철작가와 그의 작품ⓒ신철
신철작가와 그의 작품ⓒ신철

그 점에서 그의 ‘기억 풀이’ 시리즈는 단순히 지나온 과거를 이야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움 속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중독성 있는 마약의 힘을 지닌 즐거운 추억의 여행이다.

두근거리며 동네 어귀를 지나가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그 시절의 그리움, 보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는 순수함과 착함. 이로써 신철은 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화가의 희망을 이뤘다.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그가 여리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거의 잊고 지낸 정겹고, 서툴렀던 10대 소년 시절로 돌려보내 우리를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신철의 그림은 그의 예술적 신념대로 그리움에 대한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화가의 꿈을 이뤘다.

그래서 나는 이 환갑이 넘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미소년의 향수와 추억, 애틋한 그리움을 무조건 사랑한다.

그의 작업실에 붙여진 글귀가 문득 떠오른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내가 어떤 고기를 잡느냐에 따라

항구가 나를 맞이하는 태도가 다르다.

잠시 정박해서 쉬고 싶지만

내가 갈만한 항구가 나타날 때까지

망망대해에서 외롭고 절절하게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

그 바다는 내 작업실이다. - 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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