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源形象-雲雨山水)49x50닥지화 [사진제공=일랑 미술관 소장]
(源形象-雲雨山水)49x50닥지화 [사진제공=일랑 미술관 소장]

“이제 내 눈에는 나무도 들도 숲도 산도 모두 투명한 유리처럼 내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 겹겹의 유리 속의 한의 맥이 보인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져진다. 이런 나의 끈끈한 한의 맥을 근원 형상으로 표출하고 싶다” - 이종상 작가

일랑(一浪) 이종상을 수식하는 형용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매스컴에서는 그의 예술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많은 국내외 신문기자들, 세계적으로 저명한 미술평론가들이 이종상에 대한 예술론 또는 작가론을 다뤘다.

일랑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이렇다.

누보 레알리즘의 창시자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대지 위에 던져진 인간 최초의 시선>에서 이종상을 이렇게 칭했다.

“자신의 야심에 대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예술은 삶의 기원과 주제에 관한 본질적이며 올바른 사고의 표현이다. 동시에 한국의 지성인으로서, 그리고 국제적인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의 근본적인 물음에 일관된 답변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화가”

또 “현대 서정추상의 역사 안에서의 유일한 수훈인 ‘대지 위에 던져진 인간의 최초의 시선에 대한 환상적이고 시각적인 구조화’의 문제를 자신의 회화를 통해 성취하고 있는 중”이라고 쓰기도 했다.

프랑스 르피가로의 기자이자 평론가인 미쉘 누리자니는 <파도의 정상에 선 이종상>이란 글에서 “이종상은 한국미술이 가진 더욱 큰 ‘절대 자유’에 대해 그리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늘 간직하고 있는 창조물에 대한 ‘관용’의 마음, ‘너그러움의 미학’과 순수함”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세계의 찬가>라는 비평에서는 “이 모든 것 가운데서 경이로울 정도로 자유로운 거대한 붓놀림으로 이루어진 이 벽화 속에는 신선함과 생명에 대한 사랑 감성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가 진정한 너그러움으로 찬연히 빛나고 있다”고 언급했다.

프랑스 평론가 베르나르 마르까데 역시 “이종상의 작품은 파리 성벽의 유산과 한국의 닥종이에 그려지고 배면조명 된 벽화에 의해 물리적으로 형성된 경치가 돼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지적하며 “이 거대한 파노라마는 프랑스 군함의 상륙이 뚜렷이 보이는 시각적 상황에서 시작돼 군함이 유발한 거대한 혼란을 거쳐 차츰차츰 우리 눈 아래서 재현된 소재는 추상성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전 문화부 장관이자 석학인 이어령은 “한마디로 말하면 일랑은 언제나 ‘존재’가 아니라 존재 이전의 상처. 그 가능태를 만들어내는 ‘생성’을 그리고 있다. 바람 풍(風)자에 벌레 서 자가 들었듯이 바람은 무수한 벌레를 낳고 또 그 벌레들을 잠재운다. 그처럼 바다에도 무수하게 생멸하는 작은 파도들이 있다”며 “바다는 파도를 낳고 또 그 파도를 삼키면서 반짝인다. 그러한 바람과 바다의 움직임을 생성하는 평활한 공간, 자아의 주체를 넘어서 그런 반복과 지속의 공간으로 일랑은 지금도 나를 이끌어간다”고 설명했다.

인용이나 열거하기가 부족할 정도로 그의 예술과 인간에 관한 표현은 화려한 찬사와 높은 평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솔직히 그에 관한 이런 찬사 일변도, 호감과 평가가 언제나 그의 예술에 긍정적으로만 이바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91년(원형상-천지)121x90.5cm-장지화 [사진제공=일랑미술관소장]
 

실제로 그가 신작을 발표하는 전시장마다 그의 회화는 언제나 화제와 주목 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따라서 그의 화풍과 예술세계를 지칭하는 수식어들은 보기 드물게 비평가들의 관심 속에서 성장했다.

이제는 누군가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총체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일랑 작업의 세계관을 검증하는 태도와 방법이 필요한 때다.

그러한 이유는 일랑의 작품세계가 다양한 회화적 표현양식을 거쳐 왔고 또 재료에서나 장르에서나 부단히 청년작가 못지않게 실험정신으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아울러 표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철학적, 정신적 이념이 주제와 관련돼 다양한 표현방법으로 실험적 세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랑 작품세계의 변천과 흐름을 고찰하는 것은 분명히 한국화를 되돌아보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화풍 변화를 초기와 중기로 나눈다면, 초기는 개략적으로 2,30대의 묘사중심의 사실적인 표현에 기본을 둔 전통적인 동양화풍이다. 이를테면 진경중심의 기법을 중심으로 한 초기 작업이 여기에 해당된다.

1962년 가을에 열린 제11회 국전에서 일랑(一浪)은 300호라는 대작 <작업>으로 내각수반상의 영예를 얻었다. 여기서 그는 평생의 화두였던 ‘한국미술의 자생성’을 가르쳐준 운보를 만났고, 사람들은 일랑 같은 작가를 얻은 것은 동양화단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까지 평가했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인 <작업>에는 용광로의 작업장 모습이 그려져 있다. 쇳물을 끓이고 부으며 작업에 몰두하는 군상의 표현에서 그 정확한 데생과 능숙한 공간파악은 서양화 못지않은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참신한 소재와 재료의 불편과 제약을 극복”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일랑은 손상 없이 영구보존 될 수 있는 벽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랑은 우선 벽화의 발색 기법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기법의 개발을 일랑은 신벽화(新壁畵)라 했고 재료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었는지 1965년 이후 국전에서 <승화>, <침윤>, <작품32> 등 재질감을 강조한 일련의 추상화를 출품했다. 그것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추상표현주의의 뜨거운 추상을 연상케 하는 형식 실험의 작품이었다.

1968년 <국전>에 <시원(始源)>이라는 마치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마티에르’와 중후한 형상, 그리고 상징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후 그의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상징적인 형상표현, 서술적인 공간구성, 작품 전체에서 느끼는 사고의 순진성과 건강성을 요체로 한 벽화작품을 제작, 다양한 발전을 이룬다.

마침내 일랑의 벽화작업은 오늘날까지 근 20년 동안 끊임없이 상감기법, 부식기법, 혼성기법 등으로 확산시켰다.

<능선>같은 작품에서는 역사 속에 유폐되어버린 기억들을 회상하였고 <사무아>, <환상>, <그리스도의 순교> 등에서는 종교적 설화적 내용을 담았다.

일랑에게서 발견되는 벽화기법 연구의 내용과 그 의의는 논문으로 각각 발표됐다. <신벽화연구>와 <신벽화연구에 대한 사적고찰과 기법연구>이다.

그가 추구했던 양식 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온 동양회화의 주요한 표현양식 하나인 벽화다.

1964년, 국전의 추천작가로 된 일랑은 이후 일련의 벽화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 벽화란 상징적인 동양화 관념으로 볼 때는 비동양화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랑의 생각은 좀 달랐다. 따지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회화의 시원 양식은 벽화에 있다.

물론 그의 회화 세계가 형성되는 데 있어 일랑이 사숙했던 동양화의 선생들을 지나칠 수는 없다. 전통적인 소재의 인물이나 산수화는 노수현(盧壽鉉),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에게서는 문인화(文人畵)의 멋과 운치는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에게 사숙함으로써 고풍스러운 주제를 어떻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단순, 조형화시킬 수 있는가를 익혔다.

또 그는 ‘중국 동양화의 전통이 아닌 한국회화 고유한 예술정신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고 꾸준히 미학적 측면에서 이론적으로 탐구’해 온 이론과 실기를 겸한 귀한 작가다.

그러한 그의 치열한 예술정신이 결실을 보게 된 때는 바로 프랑스에서의 설치작업이었다.

그의 50여 년 작업 중에 다른 작품 못지않게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단연 캬루젤의 작품이 중요하게 논의된다. 이는 이 작품이 설치된 위치가 루브르 미술관이라는 사실 때문도, 또 이 작품의 크기가 70여 미터라는 대작이라는 사실 때문도 아니다. 바로 해당 작품은 우리 회화사에 다시금 보기 드문 불행한 역사를 위한 용서와 화해의 대서사시로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서다.

특히 <원형상 97061-마리산>은 예술가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이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1. 이 작품이 전쟁기록화가 아닌 순수회화로서 역사적 사건 (병인양요)을 주제로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

2. 작가로서는 드물게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하고 근 현대사의 문제를 한 화면에 서술적으로 표현했다는 점

3. 회화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벽을 오브제로 사용, 완성시킨 벽화인 동시에 설치 작품화하고 있다는 점

4. 외교적 사건을 문제를 미술 언어로서 제기하되 상대국의 역사적인 공간에 이를 작품으로 제작 설치한 사례가 드물다는 점

5. 작품 속에서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배경을 빌려오는 독특한 차경(借景)의 기법으로 제작한 점

6. 작품의 크기가 아니지만, 작품제작의 규모상 71미터 30센티라는 길이와 높이가 3-6미터에 이르는 대형작품으로 제작되었다는 점

7. 현대미술의 제작 기록상 조명을 뒤에서 투사하여 제작한 예가 없다는 점 등이다.

1994년작-(원형상-그밖에)-75x75cm-동유화 [사진제공=일랑미술관소장]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보기 드물게 분명한 주제의식과 역사적 사건을 그 출발점으로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검토는 학술적인 관점에서도 조명해 볼 만하다.

특히 그의 작품에 기조를 이루는 회화적 무대나 배경이 한국과 프랑스라는 양국이 극복해야 할 예민한 문제를 대담하게 벽화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도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국수적인 시각을 뛰어넘어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 서로를 존중 해주고 용서하는 관용이란 대국적인 입장에서 서로 화해하는 사랑과 부드러움의 모습을 강렬한 필치와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이미지는 그가 평소에 일관되게 추구 해오던 원형상(源形象) 작업에 마니산의 인상을 안치하고 그 성벽 위에 웅장하게 묘사함으로써, 구성으로서 루브르의 성벽은 바로 프랑스 함대들이 침략시 허물어 놓은 강화성으로 전이시키는 파라독스 한 포치법을 안정되게 구사해놓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내면에 흐르는 정신은 의외의 그의 사색에서 비롯한다.

“동창이 밝아오거나, 달이 밝을 때 창호에 맺히는 빛과 그림자를 보며 방안에서 대자연과 하나가 됐고, 방안에 등잔불이 밝아 인기척의 그림자가 창호에 비치면 밖에서 안쪽과 교감할 수 있는 일치의 창호 문화의 아름다운 미학을 프랑스의 가두어진 성벽과 조화를 꾀하고 싶었다” 고했다.

파리에서의 개인전 때 작가는 미쉘 누리자니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한국 문화론을 피력한 바 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색채 또한 한국회화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전통적인 오방색을 쓰고 있다.

이 오방색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각별하다. 그의 회화에는 이 색채들이 그의 < 원형상>을 형성하는데 언제나 기본이 돼왔다.

이 색들은 또한 노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상하좌우에 위치하면서 각자의 고유한 의미를 띄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에서의 색채가 감각적 인상력의 고유가치, 빛과 그림자 원근 등의 관계를 고려하는 양자의 통일 원리 속에 색채론의 기본 원리가 있는 것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이 색채만을 나열하거나 병치하지는 않는다. 최근의 그의 작품들은 여기에 도형 성격이 강한 기호와 형태들을 끌어들이면서 오방색과 도형들의 상징형태가 하나로 되는 통합된 형식을 드러낸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회화의 미적 형식이라든가 미적 규범이 그의 그림을 지배하지 않고 자유롭게 적재적소에 그의 그림 속에 용해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풀림과 맺힘이 화면에서 자유롭고, 강약의 힘과 흩어짐이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는 전통과 현대가 만나 어우러져 있다.

또 보자르도 “강화도의 풍경에 영감을 얻어 샤를르 5세의 루브르궁전의 성벽에 옷을 입혀 하나의 무대를 창조” 했다고 평가했다.

전통 한국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는 한불간의 문화적 대화를 미묘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가 성벽에 완벽하게 장치한 작가의 상상력과 역사를 보는 통찰력, 그 설치예술에 신선함과 그의 역사 인식에 주목했다.

캬루젤의 무너져 버린 성벽 앞에서 작가는 130여 년 전 프랑스와 치렀던 병인양요 시대의 강화성의 아픈 역사를 회상하고, 읽어 낼 줄 알았고, 그들은 강화성의 경치를 캬루젤 공간으로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세계는 큰 흥미를 일으킬 만한 사실이다.

그가 성벽에 치밀하게 장치한 한 동양 작가의 설치예술 기술에 놀랍고 이 작품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설치의 장소성과 작가로서 가져야 될 역사성에 대한 통찰력을 그는 충분히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작가로서 그는 그가 말할 수 있는 <프랑스를 향한 메시지>를 명백하게 던져 놓은 것이다.

특별히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세계를 이렇게 극적으로 전이시키는 방법도 흥미롭다.

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 정신, 그 울림을 70여 미터의 한지 종이에 풀어내는 한 조선인 화가의 역사적인 서사시. 프랑스와 한국이 가져야 했던 불행한 역사와 그 상처들을 이 그림은 아우르고 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br>(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br>
▲ 김종근 미술평론가
(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작가는 모든 작품에 생명력과 생동감을 강렬하게 담길 열망했다.

50여 년의 최고의 열정과 혼신을 다한 그의 작업들이 더없이 빛나 개인의 작품이란 차원을 떠나 한국회화의 역사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자리매김이 되고 평가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의 작가로서의 역량과 예술가적 힘을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부분이 있다. 그의 회화작업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나친 다양성이다. 그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놓고 볼 때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일관된 세계관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근래 놀랍게 주목할 만한 사실들은 그가 예술에 대한 풍부한 편력이 이제는 전방위적인 작업의 아우름에서 작업을 정리하고 종합하는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그의 예술세계를 개략적으로 개관하면서 용광로라고 명명하는 데에는 단순한 형용사 이상의 수식이 있다. 하나의 천착된 자기 세계로의 이행, 그가 50여 년을 줄기차게, 그리고 일관되게 그의 예술세계를 받치고 있는 예술정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한국미의 구현인가, 진경 정신인가, 아니면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과 다양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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