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옥 작가
김인옥 작가

당나라의 현종이 가릉 지방의 경치를 그리워하며 오도자(吳道子, 중국 당나라 때 화가)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려오게 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어쩐지 오도자는 가릉지방을 둘러 보고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현종이 그 이유를 물으니 “저는 비록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모두 마음속에 담아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오도자는 대동전건물 벽화에 삼백리에 걸친 가릉 지방의 풍경을 하룻밤에 그렸다는 이야기다.

문득 이러한 일화가 떠오를 만큼 김인옥 작가의 작품들은 그가 살고있는 양평의 주변 풍경을 따뜻하고 서정적으로 담고 있다.

<기다림>에서 시작해서 <항금리 가는 길>로 이어지는 연작과 풍경들은 보는 이들에게 포근하고 평안한 감성을 준다. 그의 화폭에는 사람의 마음을 적셔주는 서정성과 격조가 정겹게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전형적인 동양화의 채색 작품이다. 물론 그의 그림이 깊은 정신성을 요구하는 수묵화는 아니더라도 그의 회화는 자연과 사람의 가장 인간다운 정신세계를 조용하게 품고 있다.

기본적으로 채색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그리움으로 시작된다.

기다림, 2014, 125x55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기다림, 2014, 125x55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초기 그의 작품세계를 보면 그가 경험하고 바라본 자연을 구체적 풍경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김인옥 작가는 지난 30여 년간 우산, 꽃, 나비 등 자연과 오브제를 결합시킨 추상적인 화풍 이후 자연이라는 테마에 보다 깊은 애정을 가졌고, 이에 대한 주제를 안정적이고 조형적인 채색으로 표현해 왔다.

작가는 자연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는 녹색 위주의 채색으로 구성미와 조형성을 갖춘 화면을 구축해왔다. 특히 이러한 화풍을 통해 동일한 장소를 봄·여름·가을·겨울로 다양하게, 또 풍부한 색채로 자신의 양식을 구체화했다. 이는 마치 데이비드 호크니가 동일한 장소의 풍경을 사계절로 다시 화폭에 담는 형식과 비슷하다.

<항금리 가는 길> 시리즈와 서정적인 정취로 자연을 가깝게 하는 <기다림> 연작 등은 이러한 형식에 도달한 작가의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화풍이자 정체성이다.

그의 어떤 그림을 보더라도 자연을 사랑하는 온화하고 친화적인 시선이 내재돼 있다. 또한 동양화만이 가질 수 있는 붓질에는 진실과 정신성이 묻어나있으며, 이것이 곧 김인옥 작가의 철학으로 완성된다.

어쩌면 김인옥 작가의 철학이란 바로 기교가 아닌 자연을 기반으로 한 진실한 붓질의 수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이를 통해 인간적이며 정신적인 숨결이 화폭에 가득 차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김인옥 작가의 회화는 이러한 자연을 바라보는 내면의 부드러움과 여성적인 눈길이 중심을 이룬다. 이는 작가의 인간성과 회화가 맞닿아 있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필자가 본 그의 매우 인상적인 작품들은 사실 커다란 숲 위에 덩그러니 집 한 채가 올려 있는 것처럼 초현실적이지만 인간적인 회화 작품들이다.

기다림, 2021, 91x73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기다림, 2021, 91x73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종종 그의 이야기는 환상적이거나 이상향의 세계에서부터 삶의 공간에서 묻어나는 자연의 생생한 마을 풍경의 진솔한 정겨움으로 그 매력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확실한 언어의 메시지와 녹색의 채색으로 가슴 속에 새겨진 마음 속 풍경을 길어 올린다.

그러기에 전체적으로 그의 자연 관찰과 표현은 주변과 조화롭고 정적이며 고요하다. 표현기법도 정적인 붓 터치에 자연을 사랑하는 내밀한 붓질로 충만해 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주목해볼 만한 것은 <브로콜리 시리즈>다. 작가의 세밀함과 부드러움과 소박한 시선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동화 속의 나올 법한 하나의 커다란 나무로 표현 가능한지를 가장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불과 하나의 채소를 가지고 말이다.

브로콜리에 함께 들어온 작은 인형 같은 집과 멀리 뒤로 보이는 기차 풍경, 이들이 빚어내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환상과 꿈과 현실인가를 다시 한 번 묻는다. 이러한 기쁨과 희망이 화폭을 감싸고 있다.

이것들이 모두 한군데 모여 그 풍경에서 벗어나 파노라마처럼 한없이 정겨운 이미지로 탄생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마치 산이 가로막히고 물이 끝나 길이 없을 듯 하지만 버드나무 우거지고 꽃이 피어 있는 사이에 또 하나의 마을이 있다’는 옛 시인의 시구처럼 <항금리 가는 길>도 언제나 솜사탕처럼 예쁘고 푹신하다.

멀리 다소곳한 풍경이, 사람들 집이 있고 삶이 있는 그의 그림은 산과 풍경이 걸음에 따라 변하듯이 다채롭게 변화한다. 푸른색, 노란색, 핑크빛 나이면 흰 솜방망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배어나기도 한다.

항금리가는길, 2020, 75x33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항금리가는길, 2020, 75x33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가만히 보면 김인옥 작가는 대상이 되는 사물을 어떤 한 곳에서 생각하거나 묘사하지 않는 풍경화가다. 그는 가장 깊고 생동적인 순간을 풍경에 풀어놓는다. 아마도 이것은 작업에 임하기 전에 치밀하게 그 자연의 모습과 이미지를 가슴에 저장하고 새겨 둔다는 뜻일 것이다.

김인옥 작가는 이러한 기본적인 화가의 관습을 익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무가 있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복잡한 풍경도 그에게는 필법의 기교가 충분히 걸러진 후에야 비로서 모필(毛筆)을 화선지에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 그의 화폭 속에 계절과 풍경이 어우러져 사람들 마음을 시를 읽는 느낌으로 탄생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의 그림의 매력은 사실주의 화풍으로 전통적인 한국화를 현대적 양식의 풍경화로 연결시키는 구성과 채색의 힘으로 회화 표현에서 무한한 공간을 화면에 담아내는 여백을 적절하게 구하는 것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김인옥 작가의 이런 정적인 풍경들은 묘사의 세계를 넘어 양평 부근의 사계절 변화를 한없이 부드럽고 온정적인 필법으로 전통적인 채색을 계승하고 있다.

즉 박생광 작가, 천경자 작가, 이숙자 작가에서부터 이어지는 전통채색의 정신을 그는 이렇게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화풍을 시기적으로 요약하고 구분할 때 시골의 정서와 풍취가 가득한 초기의 화풍과 조형성이 훨씬 깊게 포함된 최근의 작품들은 세밀한 필선으로 감각적이며 서정성 있는 격조 있는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전통채색의 가능성도 열어 보인다.

그 채색의 바탕에는 화려한 장식미보다 소박미가, 현란한 색채보다는 담백한 녹색의 단색 채색으로 자연의 기품있는 아름다움을 이야기로 이끌어낸다.

항금리가는길, 2021, 61x73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항금리가는길, 2021, 61x73cm, 한지에 채색 [사진제공=김인옥 작가]

근작들은 모던한 감각으로 자연 풍경을 서정적인 채색으로 전환하는 <항금리>의 풍경 이후 <브로콜리>는 분명 그에게 최고의 회화적 오브제이자 대상이며 서정적 이야기의 결정판으로 인식된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매일 오가는 삶의 풍경들 속에는 사람들의 삶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녹아있다.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고 있는 그의 화폭도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바뀐다.

봄에는 파릇파릇 생명의 나무와 꽃들이 돋아나고 여름에는 짙푸른 가로수와 산, 그리고 마을들이 소품처럼 등장한다. 가을에는 황금빛의 숲속에 나무들이 색을 불러 모으고, 겨울에는 눈 내린 평원에 우뚝 서 있는 흰색의 나무가 화면을 뒤덮는다.

이 풍경만으로도 그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 속 고향이 되기에 충분하다. 소박하고 사치하지 않는 시골길, 그곳 골목마다 우리들의 고향이 있다. 또한 그 주변 풍경 속에는 꽃병이 놓여있고, 꽃무늬 커튼이 고즈넉하게 널려 있다.

그리하여 그 모든 환상적인 풍경이 빠짐없이 꼼꼼한 필치로 되살아나는 것이 김인옥 작가의 작품의 울림이며 우리를 그의 그림에 빠져들게 하는 진정한 회화적 가치다.

집요하게 자연의 서정적인 풍경을 전통적인 채색으로 한결같이 담아온 그는 최근 그 서정의 세계에 깊은 조형성을 <브로콜리>로 담는 작업으로 집중하고 있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를 보듯이 초현실적으로 회화적 원숙미를 크게 보태고 있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 김종근 미술평론가(사)한국미협 학술평론분과 위원장

필자는 이 작품들이 그의 작품세계에 성공으로 가는 향방을 충분히 가늠하게 하는 모티브로 이해한다.

구태여 비유를 하자면 양주팔괴의 이방응 작가가 매화를 그릴 때 ‘분방하게 핀 매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단지 두세 개의 가지일 뿐이니, 그 두세 가지만 빼어나게 표현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하지 않았나?

작가는 많은 풍경을 단순화하거나 생략해 가장 아름다운 두세 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낸다. 채색화의 진미를, 우리들의 마음을 흔드는 그 조형성과 회화의 형태미,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풍경화.

필자는 그것이 김인옥 작가의 예술세계를 더욱 빛나게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